남 나라 /06-08 터어키

이스탄불의 아침

노코미스 2009. 5. 11. 13:35

2006년 8월 10~11일  

 

여름이면 언제나 그렇듯이 보수교육이 끝나자마자 다음날 바로 출발하였다.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한 학기 내내 강의하고

쉴틈도 없이 연속 3주 직무교육강의하고..그리고는 또 다시 장거리 여행..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이스탄불 다음날은 표정이 여~엉 초죽음 상태이다.

 

그러나 하루의 몸살로 지난 피로를 말끔히 씻어내고,

다행이 다음날 카파도키아에서부터는 컨디션이 충분히 회복되어 행복한 여행이 되었다.

터어키는 지금 가지 않으면 언젠가는 한번은 가봐야할 숙제거리같은 국가였다. 그래서 후딱 다녀왔다.

그 때만 해도 자유여행에 대한 두려움으로 페키지여행상품을 선택했었는데..

 그것도 친구랑 7일짜리로 하느냐 8일짜리로 하느냐로 상당히 설왕설래했던 것 같다.

친구는 7일로 하자, 나는 언제다시 갈지 모르는데 8일짜리로 하자..

해서 결국은 8일짜리를 선택하였다.

 

하루가 더 있는 것은 '트로이'를 포함하느냐 빼느냐하는 것이었는데, 난 꼭 트로이가 보고 싶었다.

터어키에서 나에게 익숙한 지명이 있다면 '트로이'가 유일한데..^^

그것이 빠진 터어키여행은 나에게 전혀 의미가 없어 보였다.

결국 우겨서 8일짜리로 결정하였고, 갔다와서는 그러길 정말 잘했다고 서로 만족해 하였다.

 

3년이 지난 지금 여행기를 정리한다는 것이 새삼스럽기는 하지만,

잊고 있었던 당시의 설레임과 그 때의 그 감동을 다시금 느낄수 있어서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그 당시의 그 느낌을 그대로 재현해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어쩌면 느낌보다는 사실중심의 여행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그것도 좋다.

왜냐하면 터어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알아야 할 것이 많은 나라이기 때문에..

많은 역사와 유적과 신화를 간직하고 있는 나라.. 터어키..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나라가 바로 터어키다  

 

터어키여행의 시작은 이스탄불이다. 

 

 

 

 따라다닌 여행은 기억이 오래가지 않는다.

 

어쨋거나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이스탄불까지 무사히 갔던 것 같고..

아타튀르크 공항에 내리니 주변은 이미 어둠이 짙게 내린 한 밤이었다. 그래서 호텔로 바로 들어갔다.

이스탄불의 첫 인상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것은 아마도 첫날 호텔때문이었을 것이다.  

 

위 사진에서 오른쪽 귀퉁이에 살짝 나와있는 호텔이 우리가 묵었던 호텔이다.

명색이 별이 네개인 호텔인데 우리가 들어갔을 때 호텔의 분위기는

마치 침침한 백열등 하나로 버티고 있는 시골 간이역사 같은 분위기였다.

 게다가 종업원의 그 무뚝뚝함이란..

 

뿐만 아니라, 배정된 룸의 상태는 어떠하고..자면서 몇번을 깨야했다.

밖에서 들려오는 실외기 돌아가는 소리와 쿰쿰한 곰팡이냄새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텔이나 가이드에게 한마디 컴플레인도 하지 못한채, 그 밤을 지새워야 했다.

지금생각하니 다음날 나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것은

전날의 잠자리가 불편했던 탓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까지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클레임을 제기하지 않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떠나기 전에 친구와 나의 암묵적인 약속중에 하나가 '튀지말고 조용히 갔다오자'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밤을 자는둥 마는 둥 했지만 여전히 여행지에서의 나는 아침형이다.

 

여행지에서의 늦잠은 먹이를 찾는 참새가 늦잠을 자는 것 만큼이나 치명적이다.  

남들보다 한 타임 일찍 일어나면 남들이 보지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다.

호텔밖을 나서니 이스탄불 시내에 새벽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그리고 도로를 가로지르며 나부끼고 있는 터어키국기가 인상적이었다.

후진국일수록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국기를 많이 이용한다.

우리나라도 한 때는 가는곳마다 국기였다^^

 

 

 

 

하릴없이 도로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본다. 아직 셔트를 올리지 않은 상가도 보이고, 옷집도 보이고..

슈퍼마켓앞에 왠 소쿠리가 하나 걸려있어서, 줄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니 줄이 윗집 창문으로 연결되어 있다.

 

소쿠리에 돈을 담아서 내려보내면, 아래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넣어서 올려주는,

말하자면 장바구니 두레박이다^^

 

근데 이집 주인이 머리가 좋아서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낸 것이 아니라,

이스탄불의 많은 시민들이 이런 장치를 이용하고 있었다는 것이 재밌었다ㅎㅎ

 

 

 

 

빵집에서는 아직도 기계보다 손으로 밀가루를 반죽하여 시미트도 만들고 포아차도 만든다.

 

구수한 빵냄새를 맡으면서, 때때로 발걸음을 멈추고..

 펑퍼짐한 엉덩이를 깔고 시미트를 굽고 있는 아주머니를 열심히 들여다보기도 하면서 아침산책을 한다.

 

대로로 나오니 스카프를 두른 현대여성들이 아침출근을 서두르고 있다. 상당한 미인들이고 멋쟁이들이다.

 

특이한 점은 그렇게 후덥지근한 여름에도 현지여성들은 거의가 긴소매의상을 입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살갗을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차단하는 것이 여름을 더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지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이 입고 있는 옷감들은 매우 시원한 재질로 되어 있다.

 

 

 

 

 

 이스탄불에서의 첫날은 여러가지로 이국적인 풍물이 많았다. 곳곳에 널려있는 모스크들..

굳이 이름있는 모스크가 아니어도 좋다.

그냥 오랜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는 모스크들이 마을 곳곳에..자리잡고 있는 모습들이 참으로 이국적이었다.

 

 

 

 아침을 먹고 첫날은 톱카프궁전으로 갔다.

 

토프카프 궁전은 15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오스만 왕조의 지배자들이 살았던 성으로,

    400여년간 정치와 문화의 중심부역할을 하던 곳이다.  

 

그리고 토프카프 궁전 이름은 과거에 이곳에 대포가 설치되었던 것을 기원으로 하여

토프(대포)카프(문)궁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매표소를 통과해서 들어가자마자 제2정원을 통해서 옛 주방부터 줄줄이 구경한 뒤

의상실과 보물관을 구경하고, 제 4정원으로 들어간다.

 

여기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파노라마 포인트이다.

 

 

 

  

테라스로 나가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궁전 아래쪽으로 남아있는 성벽의흔적과

보스프러스 해협 저편으로 바라다보이는 시가지의 모습이 전체적으로 조화롭다

(이미 저 건너편은 아시아란다)

 

 

 

 

제 3정원을 돌아서 궁전뒤에 있는 바다트 쾨쉬퀴라는 테라스가 있다.

이 테라스에서는 금각만과 신시가지가 정면으로 바라다보인다.

 

 

 

 

 

첫날부터 제법 많은 것을 보긴했건만 컨디션이 좋지 않은 관계로 기록을 많이 남기질 못했다. 

 

구경을 하는둥 마는 둥하고는 바깥으로 나왔다.

첫날의 이스탄불 관광은 워밍업을 목적으로 토프카프에서 끝내고..

 우리는 오후내내 카파토키아로 갈 것이다.

 

슐탄아흐메트 역사지구의 나머지 관광은 마지막날 마무리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아야소피아를 배경으로 흔적을 남겨둔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는 풍경하나하나가 이국적이다.

 

지중해의 물빛은 지금까지 내가 보아왔던 물빛과는 또 다르다.

짙푸른 지중해 물빛, 울긋불긋한 건물들, 해얀여객선, 노란택시, 그리고 바쁘게 오고가는 사람들..모두모두

 

 

 

 

   이스탄불의 가장 이국적인 모습은 뭐니뭐니해도 빨간 지붕곳곳을 뚫고 나오는 회색시멘트 건물의 모스크와

연필심처럼 뾰족뾰족 솟아있는 자미들이다.

 

한국에 교회가 한집건너 한집있다면, 터어키에는 모스크가 그러하다

 

 

 

 

해협 가장자리를 따라 저렇게 딱 붙어서 지어진 건물들 역시 새롭다.

경험이 얕은 중년동양여자의 눈에 이스탄불은 여러가지로 새로운것이 많다.  

 

해협의 물이 불어나도 저곳에 사는 사람들은 과연 괜찮은 것일까?

 

 

 

보스포러스 해협 가장자리 아시아쪽 모습이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부촌이라 했던가?  

 

  

 보스포러스 해협을 따라가다가 보이는 성벽! 이 해협을 따라 오른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흑해가 나온다.

 

 

-이스탄불의 역사- 

이스탄불은 로마, 비잔틴 제국에, 오스만 왕조를 합쳐

모두 122명의 통치자가 1600년동안 지배해왔던 도시이다.

 

330년 5월 11일,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수도를 로마에서 당시에는 비잔티온으로 불리우던 이 도시로 옮기고

이곳을  제국의 동쪽 반에 해당하는 새로운 로마인 '신성로마' 또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 삼으면서 이름을 콘스탄티노플로 바꾸었다.

 

콘스탄티노플이라 불리웠던 시절의 이도시는 그리스도교의 중심지로서, 실크로드의 종착역으로서 번영이 극에 달하면서

  중국의 장안이나 페르시아의 바그다드와 나란히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다.

 

한창 번영하던 도시 콘스탄티노플은 1204년 4월 6일, 제 4차 십자군 전쟁으로 몰락했다.

 

비잔틴은 약 60년 후에 재탈환했지만 제국의 약화는 어쩔수 없었고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왕조의 술판 마흐메트 2세의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에 들이닥치면서

콘스탄티노플의 역사는 끝나고 이스탄불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스탄불을 수도로 삼았던 오스만 왕조 역시 이 도시를  예전 콘스탄티노플의 번영 상태로 되돌려놓았고,

다시 이 도시는 세계 최대의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왕조 역시 비쟌틴 제국과 마찬가지로 후퇴를 해야하는 날이 닥쳐왔다.

 

제1차 세계대전과 함께 등장한 영웅, 무스타파 케말을 중심으로 한 대국민의회는

1923년 10월 13일에 앙카라를 수도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채택했고,

이스탄불이 수도였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다양한 왕조에 의해서 다양한 종교적 지배를 받아온 이스탄불의 역사는 오늘날에 와서 봤을 때

이스탄불을 유럽의 문화와 아시아의 문화가 혼재해 있는 상당히 이국적이면서 매력적인 여행지로

만드는 기반이 되었고, 이런 매력에 이끌려 많은 동서양의 여행자들이 이스탄불을 찾는다.

 

그러나 터어키 여행에서 이스탄불은 부분일 뿐이다. 터어키 전역의 매력은 이보다 더 강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