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가의 신궁전, 피티궁
2010. 8. 13. 금요일. 날씨:비
전날 하루종일 무거운 가방들고 장거리를 움직이고
피렌체 들어와는 이 도시의 첫날을 장식하기 위하여 밤늦게까지 돌아다녔더니..
몸이 얼마나 힘들었든지 아침에 일어날 수가 없다.
피렌체에 사흘이나 있을텐데, 급할건 없지 하는 생각에 자꾸 몸과 마음이 처지고..
방과 베드가 좋으니 자꾸 베드속으로 빠져들어간다.
편한 마음으로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11시경에야 슬슬 숙소를 나선다.
방향을 놓고 잠시 고민을 한다. 우피치로 가나..피티궁으로 가나..
우피치 예약도 하지 않았는데..
에이, 피티궁으로 가자..우피치에 있는 작품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보고, 많은 사람들이 소개를 해줬잖아..
글고, 피티궁에도 우피치 못지않은 훌륭한 작품들이 많다잖아..
괜히 치기에 남들 가지 않는 곳으로 가기로 선택..
해서, 베키오 다리 건너편의 피티궁으로 향한다.
피티궁은 피렌체에서 대표적인 르네상스 건물중하나이며, 한 때는 피렌체 공국의 메디치가문에서 사들여 거주지로
사용하기도 했던 건물이다.
원주인은 피렌체의 야심만만한 루까피티Luca Pitti라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살기 위하여 1458년부터 짓기 시작했던 집을
메디치 가문에서 1539년에사들였고, 나중에는 투스카니 공국의 대공가족이 사는 관사로 사용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에는 나폴레옹이 한 때 머물기도 하였으며, 통일 이태리 시대에는 왕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단다.
그러다가 1919년에 빅토르 임마뉴엘 3세가 이태리 국민들에게 반납하면서 피렌체의 가장 큰 미술관 중 하나로 개방되게
되었다는 지난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궁이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피티궁을 지었던 루까 피티Luca Pitti에 관한 이야기이다. 위키 백과의 자료를 인용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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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까 피티(1398~1472)는 코시모 데 메디치가 통령으로 있던 공화국 시대의 피렌체 금융가였으며,
메디치 가문과는 절친한 친구였고 그들에게 헌신했던 사람이다.
그는 코시모가 나이가 너무 많아 정부를 혼자 통치하기 힘들어하던 재임후반기동안에
코시모를 도와 정부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에 대한 보상으로 기사작위도 받고
메디치가족으로부터 많은 선물이나 특혜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당시 피렌체의 최고 행정관으로서 그는 대단한 권력과 영향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그의 가문은 기품있는 가문일뿐 아니라 부자이기도 했고. 그가 가진 부로
그는 최대한의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
당시 피렌체의 실제 통치자는 코시모가 아니라 피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메디치가의 권력 아니면 명예와 경쟁하기 위하여 메디치궁에 비견하는 궁을 짓고 싶어했는데
그것이 피티궁이다. 동시에 루치아노에도 빌라를 짓기 시작했는데, 이것역시 권력과 부의 과시용이다.
피티궁을 지을 때 그는 당대의 최고의 건축가를 고용하여
라르가가에 있는 메디치궁의 연건평크기보다 큰 후원을 조경하고 메디치궁의 출입문만한 창문을 달겠다고
했다는 말이 하나의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피티의 영화는 1464년에 그의 후원자였던 코시모가 죽으면서 함께 쇠퇴하기 시작한다.
피티궁 건축은 1465년부터 건축이 멈추어졌고, 1472년에 그가 죽자
더 이상 피티궁은 완성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최소한의 권력과 영향력만을 남겨둔 그의 후손이 재정난에 빠지게 되면서
코시모1세의 부인인 투스카니 대공부인에게 이 궁을 팔게 되면서 이궁은 메디치가로 넘어오게 된다
피티광장에 도착하니 아르노강 주변보다는 약간 고지대에 아주 견고한 직사각형 3층 건물이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앉아 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아직은 사람들이 그닥 많질 앟다. 그러나 9시가 넘은 시간임에 비추어 본다면 하늘색이 무겁다.
저 끝쪽에 보이는 매표소로 향한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하여 출입문으로 들어서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갑자기 기분이 우울모드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오늘의 날씨때문만은 아니다.
이태리에 들어온지 딱 일주일째 되는 날이다. 그동안 너무 외로웠다. 벌써 심신이 지친다.
이상하다..
그동안도 늘 혼자였는데..이번 여행은 유독 더 외로운 것 같다. 외롭다기보다는 쓸쓸하다해야할까..
어쨌거나, 독일이나 스위스보다는 이태리 여행이 더 활기찰 거라 생각했는데..
내 기대와는 완전히 다르다.
독일이나 스위스에서는 외로울때도 있었지만, 이렇게 슬프진 않았다.
외롭다가도..
거리에서 마주치는 눈빛과 미소를 교환하고 그리고 간단한 담소라도 나누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지곤 했는데..
이곳에선 사람들의 눈빛과 미소를 볼 수가 없다.
게다가. 이태리에는 혼자 여행하는 사람이 거의 보이질 않는다. 생각보다 이태리가 가족주의적 성향이 강한것 같다.
아님 혼자인걸 싫어하든지..
그러니, 혼자인 여행객이 끼어들 틈이 없다.
완전히 나혼자 떠도는 외로운 섬이다. 눈물이 나려한다.
그러잖아도 우울모드에.. 비까지 내려주시니 이건 완전히 확인사살이다.
더 비극적인건, 아직 식사전이라 배까지 고프잖아..이정도되면 이건 완전 슬프죽으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우선,
미술관 관람보다는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되어
궁내 까페테리아로 향한다.
테라스 의자에 자리를 잡으니 옆자리에 중년의 남자가 혼자서 하도 하염없이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거 있길래
그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몰카 한장 찍어보았다
비는 내리고..
내 마음은 우울하고..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따뜻한 카푸치노 한잔과 달달한 프루츠케익 한 조각..
이것으로 내 우울이 달래지면 좋으련만..
완전 달달한 100% 생과일 케익..기분이 급~ 좋아진다.
맛있는 케익한조각이 사람마음을 이렇게 낙관적으로 만들다니..
이제, 회복된 몸과 마음을 일으켜 '팔라티나 갤러리 Palatina Galleria'로 자리를 옮긴다.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관계로 현재 기억에 남는 작품들은 별로 없으나..
짧은 기억력으로 그나마 인상에 남아있는 것은 치골리Cigoli라 불리기도 하는
'Ludovico Cardi(1559-1613)'의 작품이 비교적 많이 남아있었다는 점이다.
치골리의 가장 대표작인 '에크호모(이 사람을 보라)', '막달레나' '피에타' 등은
그림을 볼 줄 모르는 내가 봐도 가슴이 저리고 아프다.
느낌이 부드러우면서도 찌르는 감성은 날카롭다.
<출처:위키백과>
그 외에도 메디치 사저로 사용될 당시, 그들의 방으로 사용되던 방에는 'Rapael(1483-1520)'의 그림이 많다.
'의자에 앉은 성모마리아, '성자들과 함께 한 성모자' '성요한과 함께 있는 성모자'
그리고 '안젤로 도니의 초상화'와 '막달레나 도니의 초상화' 등..
그리고, 티치아노의 '참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 ..
중간 중간 갤러리아 창을 통해 내다보이는 빨간 테라코타 기와로 덮힌 피렌체 시내가 아름답다.
어느덧 비는 그쳤나 보다.
갤러리아를 도는 동안 나의 우울도 일부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