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뻐근한 감동 드라마, '더 콘서트 '
더 콘서트 (2010)
The Concert
8.5
오랜만에 감동적인 영화한편으로 야위어가던 가슴이 어떤 따뜻함으로 빵빵해졌다.
2시간 내내 마치 어떤 실연공연장에 와 있는 느낌으로 뻐근하면서도 행복한 마음으로 가득찼었다.
최근에 헐리우드 영화에 식상해하면서 유럽영화쪽으로 눈을 더 돌리는 이유는
유럽영화에는 헐리웃영화에서 볼 수 있는 스토리의 과잉표출인 헐리웃 액션이 없어서 더 편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자연스러운 표현이 오히려 감정의 흐름을 자연스러이 흐르게 한다.
이 영화도 그러하다, 시나리오에 과잉자극을 넣어서 억지로 울게 만들거나 억지로 웃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처해있는 최악의 상황들을 너무나 무심한듯 그림으로서 오히려 그 무심함이 보는 이로 하여금 더 처연하게 만들고..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인간인지라 살아가기 위하여 행하는 사소한 행위들로 인해서 웃지않을 수 없게 만든다.
유럽영화를 따라가보면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참으로 진지하면서도 동시에 퍼니하게 보는 것 같아, 그것이 좋다.
이 영화에서도 그러하다
영화감상으로 들어가면..
구 소련연방 브레즈네프 시절 볼쇼이 교향악단 지휘자였던 젊은 천재 지휘자 안드레이 필리포프(알렉세이 구스코프 분)는
유대인 숙청작업의 협조하지 않고, 단원 중에 유대인을 감싸줬다는 이유로 지휘봉을 꺽인 채,
극장의 청소부로 강등되어 30년을 지내왔다.
그 후 체제가 바뀌고 통치자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지휘봉을 다시 질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에는 여전히 음악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차 있지만.. 내색은 하지 않는다.
극장 사무실을 청소하고 있던 어느날, 사무실 팩스로 파리의 샤트레 극장에서 볼쇼이 교향악단 초청 공문이 날아들어오고..
안드레이가 그 공문을 보는 순간, 파리공연을 가야겠다는 욕구가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아 오르고..
말하자면 공식적인 볼쇼이 악단 대신에 그가 파리공연을 가겠다는 건 사기를 치겠다는 건데.,
그 계획을 절친한 친구 사샤에게 조심스럽게 의논하고, 친구의 힘을 얻은 순간부터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데..
주어진 시간은 2주, 지금은 뿔뿔이 흩어져버린 당시 유능했던 단원들을 한명씩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파리공연을 설득하고,
실력을 확인하며, 최종 54명의 악단을 구성하는데까지 성공하였다.
일정을 잡으련ㄴ 샤트레 극장에서 공연곡명을 묻는다. 안드레이는 망설임없이 '차이코프스키'라고 내뱉는다.
극장 관계자와 협상을 하던 세기의 매니저 '이반'이 놀라서 다시 묻는다. 다시한번 안드레이는 '차이코프스키'라고
또렷이 말한다. 이 말에 상대방쪽에서는 대박이다.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
이 장면에서 왜 저런 설정이 가능한지..난 사실 이해가 되질 않아서 찾아밨더니..
안드레이가 영화에서 지휘했던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는
'차이코프스키가 비참한 결혼생활로부터 온 우울증을 회복하기 위하여 갔던 스위스 제네바 호수 연안의
클라렌스에서 1878년에 작곡했던 협주곡이다. 수많은 연주자들을 거쳐서 '연주불가능'이란 평을 받을 정도로 어려운 곡으로
초연부터 혹평을 받았으나 후에 재평가받은 명곡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렇게 어려운 곡을..모두들 꺼리는 곡을 안드레이가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공연하겠다하니 극장쪽에서는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극장입장은 그래서 좋지만..정작 안드레이 그는 왜 반드시 그 곡을 공연해야 하는 걸까..?
게다가 안드레이는 유럽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인 '안네 마리 자켓(멜라니 로랑 분)'과의 협연을
요청한다. 다른 사람은 안된다. 반드시 그녀여야 한단다. 왜 그녀여야 하는가..?
단순히 그녀가 당대 최고 인기 바이올리니스트라서..? 그런 것 같지는 않고..과연 안드레이는 왜 그녀를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것일까??
그리고,
아무리 과거 최고의 실력자들이었다고는 하나,
30년동안 청소만 하고 있었던 지휘자와 삶의 밑바닥에서 음악을 놓고 있었던 사람들..
외국공연을 가려고 하나 절반은 여권과 비자도 없고, 설령 그것을 만든다 하더라도,
대부분이 공연의상과 구두, 악기조차도 없는 사람들이다. 안드레이는 과연 이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을 무어라고 해서 설득시켰을까..?
단지, 음악에 대한 개인적인 열정만으로 그들이 참여했을까..?
이 세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 이 영화를 풀어가는 줄거리이다.
나머지 자잘한 에피소드들은 그냥 삶의 순간순간 일어나는 삶의 엇박자로 인하여 일어나는 코메디일뿐이다.
위의 3가지 의문은 안드레이가 파리에 와서 안네를 만나게 되면서부터 하나씩 풀려나온다.
그가 30년동안 지휘봉을 지지 못하게 된 이유에 '레아'라고 하는 유대인 천재 바이올리니스트가 등장하고..
리허설을 위하여 아무리 모여라고 해도 모이지 않던 단원들이 '레아를 위하여'라는 한 문장에
모두 극장으로 모여든다.
안드레이로부터 '레아'이야기를 들은 안네는 안드레이가 자신이 아닌
'레아'를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협연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을 때,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자신을 그동안 길러준 길리안(미우 미우 분)은
전설의 '레아'가 주석을 붙인 '차이코프스키'악보와 더불어 안드레이와 협연을 하라는 쪽지를 남기고 사라진다
더불어, 안네를 찾아온 사샤는 공연이 끝난 다음에 부모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고 한다.
과연, 안드레이와 이 오합지졸 악단과 안네와 그리고 '레아'는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것인가..?
공연당일,
'짝퉁'이지만, '짝퉁'인 줄 모르는 문화를 사랑하는 파리지엥들은 볼쇼이 악단의 콘서트를 보기 위하여
2000석이라는 대극장을 극장을 가득 메우고..게다가 전설의 지휘자, 안드레이 필리포프라쟎아~기대로 가득찼다.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더 많았던 단원들은 파리에 와 있는 이틀동안
어떤이는 여행에, 어떤 이는 개인적인 돈벌이에 몰입하느라 리허설 같은 것도 한번 해볼 시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공연이 제대로 될까..? 보는 나도 조마조마하건만..
안드레이는 말한다. 자신은 원래 리허설을 하지 않는다고..리허설은 자연스러움을 방해한다고..
평소때 연습연습연습..을 많이 했기 때문에 리허설은 안해도 된다고..걱정하는 관계자들을 안심시킨다.
그 임기응변이 실제 공연에서 사실로 전환된다면 좋겠다만..
중국제 폰 판매하느라 공연시간에 지각한 유대인 부자의 뒤늦은 등장으로 어수선해진 공연장이 진정되면서
공연장의 분위기에 순간 고요감과 긴장감이 감돌면서 뭔가 보여줄 것 같더니..연주가 시작되면서
예상치 못했던 불협화음에 다시한번 공연장에는 키득거림이 넘쳐나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렇지..30년 전에 아무리 날고 기든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30년을 손 놓고 있던 사람들이
리허설 한번 없이 완벽하게 연주를 한다는 건 아무리 지휘자가 훌륭하다해도 가능한 건 아니겠지.
.실망스런 표정의 관객들과 자신감을 잃은 안드레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후, 레아가 주석을 붙인 '차이코프스키'로 준비한 안네가 독주를 시작하고..
안네의 바이얼린 소리를 듣는 순간, 안드레이의 지휘봉에 힘이 실리기 시작하고..
그의 죽어있던 눈빛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연장은 지휘자와 연주자, 관객과 뮤지션이 하나가 되어
심장에 꽉 차오르는 알수없는 기쁨과 환희로 감동의 물결이 흐르고...
2,000석을 가득메운 극장은 15분동안의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숨소리조차 들리지않을만큼 엄숙하고,
그 엄숙함은 영화밖에 까지 전달되어 영화속 관객과 영화밖의 관객이 또한 하나가 된다.
그들의 감동이 우리의 감동이고..
그들이 기립박수칠 때, 우리도 박수를 친다. 완벽한 '하나됨'이다.
안네는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안드레이와 협연을 하는 동안..
레아가 누구인지..그리고 왜 안드레이가 안네 자신과 협연을 하고 싶어했는지를..
.
.
겉으로 보면, 이 영화는 한 개인의 차이코프스키에 대한 병적 집착과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그린것처럼 보이는 영화이다. 또는 채제에 희생당했던 한 천재음악가가 부활하는 과정을
코믹하게 그린 것처럼 보이는 영화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보면 좀 더 다른 주제가 보인다.
즉, 이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조직적인 증오인 과거 '반유대주의'에 대한 고해와 참회
그리고 그들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는 영화이다.
즉, 안드레이는 개인적으로 차이코프스키와 바이얼린에 병적으로 집착해 있었고,
그의 그런 집착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뮤지션이 '레아'였다.
그러나, 그녀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악단에서 숙청대상이 되었고,
그녀를 보호했다는 이유로 안드레이는 지휘봉을 꺽이게 되고, 레아와 그의 남편 이삭은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유배당하여 그곳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이 오합지졸 단원들은 과거의 체제가 저질은 만행에 대해서 참회하고,
그녀와 함께 했던 파리공연을 추모하기 위하여 생계를 뿌리치고 이 자리에 함께 모이게 된 것이 아닐까..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프로필 때문이다.
이 영화를 만든 '라두 미하일레아누'는 1958년 루마니아 출생으로,
그의 아버지는 나치에 의해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탈출한 경험을 가진 유태계 출신의 기자였다고 한다
1980년 차우세스쿠 독재정권의 폭압을 피해 이스라엘을 거쳐 프랑스로 이주한 라두 미하일레아누는
프랑스에서 영화학교를 졸업하고, 마르코 페레리 등 여러 감독의 조감독으로 경력을 쌓은 후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아직 몇 편 되지는 않지만, 그의 영화에는 주로 '망명'과 '정체성'을 주제로 다루고 있으며,
그런 주제들은 그의 생력사와 가족사가 반영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도 그의 이런 필모그래피를 벗어나는 거 같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