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역', 오늘은 안녕~
통근열차기능을 하는 무궁화호답게 부전역에서 출발한 1682호 열차는 부산시내에서도 동래역, 해운대역에서 일일이 다 정차하고..
인근의 좌천, 남창, 태화강 등도 모두 안부를 묻고는 경주를 지나서야 제법 속도를 낸다.
전국적으로 눈발 휘날리던 전날의 날씨와는 달리..
그리고 아침의 낮은 수은주 지수와는 달리..차창 안에서 느끼는 오늘의 날씨는 '햇볕은 쨍쨍'이다.
햇살이 아주 따뜻하다.
혹 오늘도 눈이 오려나..했던 나의 기대는 헛된 망상이었다
오히려 어제 내려서 쌓였던 잔설마저도 뜨거운 햇살이 다 녹여내리고.. 대지는 해맑은 표정으로 '언제 눈이 왔었니.?'라고 묻고 있다.
한동안은 그렇게 건조한 대지가 계속되더니..
경북지역을 통과하면서부터 잔설이 남아있는 흰빛 세상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하얀 잔설들이 남아있는 자금자금하고 낮으마한 시골마을들도 오랜만에 보니 정겹고 반갑다.
비어있는 땅들은 지난가을 수확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마을이 조용한 것은, 이미 수확을 마친 농부들이 이번에는 아랫목에 배깔고 시절을 즐기고 있다는 의미겠지..
도시의 비어있는 공간들은 왠지 모르게 불안해보이지만,
시골의 비어있는 땅은 넉넉한 곳간을 연상시키고..
도시의 조용함은 왠지 모르게 비정해 보이지만,
시골의 조용함은 넉넉한 여유로 보인다.
이렇게 한동안 시골의 정취에 넋을 잃고 가다가..
문득, 한가지 불안함이 내 의식위로 기웃기웃해온다.
위로 올라갈수록 눈이 좀 더 많이 쌓여있어야 하는데..
그나마, 음지쪽은 흰빛이 다소 남아있지만,
햇살이 강한 양지쪽은 희끗희끗한 잔설만 간신히 남아있어서..
이러다가 하루종일 기차만 타고 올라가서
고작해야 하얀 떡시루판에 팥고물 덜 뿌린 떡판에 희끗희끗 쌀가루 비치는 모양새인 눈의 잔해만 보고 내려와야 하는 건 아닐까..
아주 짧은 시간에 세운 계획이지만,
이번 여행을 계획하면서 재빨리 이번여행을 결정하게 된 것은
지난 겨울, 일본의 추부여행을 하면서 보았던 일본의 '설국'이 떠 올랐기 때문이다.
그 때, 우리나라에도 이곳못지않게 아름다운 눈의 나라가 있는데..
내가 왜 먼 남의 나라에와서 남의 나라 정서에 미쳐서 이러고 있을까..?하는 미안함이 살짝 있었다.
그래서 그 미안함을 이번 승부여행으로 상쇄해보리라는 내 나름대로의 애국심을 송구영신에 업혀서 발휘해 보려 했는데..
현재의 이런 풍경이 계속된다면..흑
난 실망하고 말꼬야..
그래도
산이 깊어지면 좀 더 진한 설경을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끝내 버리지 않고 가기..
드디어 봉화역을 지나고..
태백산맥 기슭으로 깊숙히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드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경은 없다.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내가 그렇게 인정하는 것과..내가 그렇게 느끼는 것은 다른 것이다. 즉, 지금 내 눈앞의 풍경에 대해서
나의 감정은 아름답다는 느낌을 전혀 일으키지 않는다. 어쩌면 좋은가..
아니, 이곳에서 머물만큼 유혹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다.
유혹하지도 않는 곳에서 내가 머물 이유는 없는 것이다.
현동역을 지나 분천역을 지나고..잠시후면 승부역인데..
내 혼을 빼앗는 풍경이라기보다는
한 겨울의 춥고 벌거벗은 앙상한 풍경만 내 눈앞에 펼쳐진다.
..사실은 이 산골마을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포근한 이불처럼 눈으로 감싸인 산골의 차가운 아침정기를 경험하고 싶었는데..
이런 풍경이라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한동안 갈등을 하다가..
목적지를 바꾸기로 결정을 하였다.
원래는 승부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정선으로 갈려고 했었는데..오늘 바로 그곳까지 가는 것으로 여정을 변경하였다.
정선이야 눈이 있거나 말거나..
그 자체로 볼거리들이 있는 곳이니까, 여기보단 덜 썰렁하겠지..
변경을 하고나니
마음은 홀가분해졌건만..
가는 길은 그다지 홀가분하지 않다.
친절한 승무원의 안내를 받아서
승부에서 약 40분정도 더 가야하는 '통리역'에서 내린다.
'통리'는 강원도 태백시에 해당되는 곳인데..
나의 개념속에서 강원도는 우리나라의 설국이라서..겨울만 되면 항상 눈으로 뒤덮혀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곳역시 녹다남은 잔설만 희끗희끗 남아있다.
아~ 이번 여행은 결국 이런 눈의 잔해들만 보는 것으로 끝나는건가..
승부에서 14:52분에 도착하기로 한 도착시간이 통리로 연장되면서 15:35분에 도착하였다
정선을 가려면
강릉 또는 청량리에서 들어오는 기차를 타고 통리에서 다시 '민둥산역'까지 가서 그 곳서 다시 '정선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다음 내가 탈 기차는 16:21분에 있으므로 약 46분정도 더 기다려야한다.
기다리는 동안 역주변 마을을 한바퀴 돌아본다.
역사 정문을 빠져나오면 바로 왼편에 간이 버스 승강장이 있고,
도로 건너편으로 작은 마을이 있다. 마을이라하기에는 세대수가 많아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큰 모텔도 있고.. -,.-
하지만, 민박은 없다.
숙박을 할려면 다음역인 '태백'으로 들어가란다...
양철지붕의 골 사이로 흘러내린 눈물이 얼어서 고드름이 된 모습이 참 반갑다.
어릴 날 외갓집 처마끝에 메달려 있던 모습을 본 이래 처음이다.
크게 볼 것도 없는 마을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역사안으로 들어와서 마냥 기다린다.
겨울의 추위에 태양신이 벌써 퇴근을 하셨는지..벌써 날씨가 어둑해지려한다.
어두워지기전에 어딘가에 도착을 해야 할 텐데..
다음 환승역 '민둥산 역'은 또 어떤 곳일까..?
통리에서 민둥산역까지는 50분을 더 가야한다. 이 기차 역시 좌석이 없으므로 입석으로 간다.
앉아있는 사람옆에 서서 가는 것보다는
열차내 미니까페에 가서 차라도 마시면서 가는 것이 훨씬 우아해보인다. 입석표 산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고..
성애 낀 창밖으로 보이는 살짝 미스티한 바깥 풍경은 그나마 적나라한 풍경보다는 훨씬 낭만적이다.
게다가 이 구간은 눈은 없어도 강원도지역만의 독특한 분위기나 페이소스가 있어서 그것을 구경하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목적지까지 가게 된다. 통리에서 민둥산까지 구간에는 태백-고한-사북 등의 역이 있다.
사북 다음역이 '민둥산 역'이다. 이름이 참 독특하다고 생각하면서 하차를 한다.
내리니..
경북보다는 여기가 확실히 고지대인게다. 철로변의 눈이 훨씬 두껍다. 다른 곳보다 강설량이 많은게 분명하다.
승강장이나 역사가 생각보다 크다.
민둥산역에 대해서 깊이있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냥 막연하게 강원도 산간 지역의 조그만 간이역 수준일거라 생각했는데..
나름대로 이 주변에서 환승역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규모가 큰 역사에 속하나보다..
역사로 들어가서..다시 정선행 차편을 알아보아야 한다.
민둥산역에서 아오라지까지 운행되는 '정선선' 열차는 하루에 통털어 4회뿐이다. 08:28, 09:17, 11:36, 12:25...
그러니, 지금 이 시간에 만약 정선으로 들어가려면 기차는 없다
버스편을 알아본다. 버스는 기차보다는 늦게까지 운행한다. 08:25, 08:45, 12:00, 12:45, 13:45, 15:55, 16:25, 18:25
시간은 40분정도 소요된다.
민둥산역에 도착했을 때 시간이 17:11분이니,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차편은 마지막 버스 18:25분발 버스뿐..
40분 걸려서 정선에 도착하면 19:05.. 낯선 곳에서 날이 어두워지면 숙소 알아보는 것이 힘들다는 것은
외국이나 내국이나 다르지 않다.
게다가, 역무원의 충고도 나의 생각과 동일하고 해서, 오늘 밤은 이곳, 한국의 무릉도원으로 불리웠다는 '증산'에서 머물기로 한다.
철로변의 반대편으로 나 있는 역사정문을 빠져나가니..깊은 계단 아래로 '증산시가지'가 눈아래로 펼쳐져 있다.
통리보다는 훨씬 크지만, 시로 보기에는 매우 작은 시가지이다.
그럼에도 역무원이 이곳에서 자고 가라고 조언하는 것은..
이곳이 이 주변에서 그나마 숙소가 많기 때문이란다.
실제로 마을을 내려다보니..무릉도원의 느낌보다는 모텔촌 같다는 느낌이 더 많이 든다.
왜 그런가하고 물어보니..옆마을 '사북'에 카지노가 들어서다보니..
사북에서 외부 유입인구들을 모두 다 수용하기가 어려우니, 그 잉여인구들이 이곳 증산으로까지 흘러들어온단다.
이 조그만 시골마을에 거의 두집건너 한집이 모텔이고 호텔인 거 같은데..그래도 빈방이 없단다..
그런 증산시를 본 나의 느낌은
마치 촌티도 제대로 벗지 못한 16살 순이가 머리파마하고 언니뾰족구두로 어설픈 도시 여자 엘레나를 흉내내고 있는
목불인견의 모습이랄까..
그러나, 다음날 기차안에서 만났던 이 동네 주민과의 대화에서
그들은 현재의 이런 변화를 매우 행복해하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외부인의 이런 안타까운 마음들은 주민들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는 마음이 아니라는 점에서 할말을 잊는다.
사북에 카지노 경기가 흥행하면서 이곳 무릉리까지 그 여파가 미치면서 현재 땅값이 왠만한 도시의 땅값만큼 올랐다는점에서
그들은 매우 만족스러워하고 있다.
외부인은 무릉리가 파괴되어 가는 것 같아 안타까워하지만,
정작 무릉리에 사는 사람들은 파괴된 무릉리에서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한다면
과연 어느것이 진정한 무릉도원인가..전자인가, 후자인가..???
역사주변 곳곳에 호텔과 모텔이지만..내 한몸 뉘일 곳은 마땅치 않다.
시간은 아직 이르지만..이미 해는 서산너머로 넘어가버렸고..태양신도 귀가를 하셨고 해서 날은 캄캄하다.
더 헤메고 다닐 수도 없어서 눈에 뜨이는 민박집 한곳을 정하여 잠자리를 정해두고는 마을을 한바쿠 돌아본다.
역에서 계단을 타고 내려오면 낮은 분지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가운데 대로를 중심으로 오른편, 왼편으로 골목이 펼쳐져 있고, 한편은 무릉 1길, 무릉2길, 무릉3길..로 펼쳐지고
다른 한편은 도원1길, 도원2길, 도원3길..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과거에는 이곳이 무릉도원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현재에 무릉도원은 도로 표지판에나 있을 뿐이다.
도원1길 표지판이 향하는 골목을 보니 '증산5일장터'가 남아있다. 4일, 9일날에나 선다.
도원길 반대편으로 난 골목으로 나가니 이런 큰 내가 흐른다.
이 곳이 아마도 도연명이 무릉도원을 들어갈 때 타고 들어갔다던 그 강물이런가..
비록 지금은 물이 말라서 흐르는 물은 없지만..그 강위로 '무릉교'라는 다리가 가로놓여 있는데..
도대체 언놈이 이 다리 설계했는지..하도 기가차서 흑백효과를 넣어버렸다.
아래가 원판이다.
이것이 증산시의 수준인가.. 더 둘러볼 것도 없다.
다행히 날이 어두워져서 핑계대기도 좋으니..
그냥 방에 들어가서 연말 시상식 프로그램이나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