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개인 오후 촉촉히 젖은 6월의 선암사
2013. 6. 19일 날씨: 비온뒤 갬
전국적으로 폭우주의보가 내린 날 하필이면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며칠전부터 일기예보에서 떠들던 거에 비하면 일찍 비가 그쳤다.
선암사에 도착할 3시경에는 이미 비가 그쳐있었고
뜨거운 지열과 오전에 내린 비로 낮아진 수온으로 인하여 계곡은 하얀 물안개로 가득찼다.
싱그런 물푸레나무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냇물을 휘감고 있는 물안개 핀 계곡은 있는 그대로 한편의 시이다.
촉촉히 젖은 모습은 바위틈에 뿌리내리는 하찮은 야생초조차 시선을 빼앗기게 한다.
선암사의 유명한 보물, 보물 제 400호 승선교를 만난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주변의 한적함과 물머금은 아름다움을 그냥 지나칠순 없다.
굳이 미끄러운 돌담을 타고 계곡으로 내려간다.
무지개 다리를 통해 바라보는 물안개 피어오르는 계곡은 선계와 다름없다.
그래서 昇仙橋 이고 그래서 降仙樓 아니겠는가?
신선이 오르는 다리라니..
아래서 올려다보니 그 아래쪽의 이음새가 어쩜 저리도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는지
예사로운 정성으로 쌓은 다리가 아님을 알게 된다.
아취아래로 올려다보이는 강선루의 실루엣도 예술이다.
승선교, 국가의 보물이라 하니 무엇이 그리 특별할까하여 허리를 굽혀 아래를 살짝 훓어본다.
길게 잘 깍은 돌들을 서로 이어서 아취모양으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작은돌들을 촘촘히 쌓아 윗면은 평평하게 만들었다.
못이나 다른 이음쇠들을 사용한 것 같지는 않은데..
고대로마시대의 건축물들도 그 흔적에 이음쇠를 사용하지 않은 아취양식을 보여주곤 하던데
그 같은 축담기술을 우리도 가지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아취아래쪽으로 쭉 삐져나온 돌부리가 신기해서 저게 뭔가 했더니 용머리라고 한다.
가까이서보면 용머리모양으로 조각이 되어 있다하며 저것을 빼면 다리가 무너져 내린다는 전설이 있단다.
무너져 내린다는 말은 전설이라기보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용머리는 장식적 효과를 위해서도 의미가 있지만 사실은 아취의 중심을 잡아주는 건축공학적 장치가 아닐까 생각되며
따라서, 저것을 빼면 다리가 무너내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마치 하얀 도포자락 늘어뜨린 신선이 저 다리위를 거닐고 있일듯한 착각이 든다.
그런 상상을 하기에 충분히 아름다운 풍경이다.
평일에 비가온뒤라 그런지 관광객이 그닥 많지 않다. 이 한적함이 좋다.
돌탑조차 촉촉히 젖고..
세상이 건조하지 않아서 좋다.
한적한 맛에 서두르지 아니하고 느릿느릿 걸어올라오다보니 어느듯 '조계산 선암사 일주문' 앞에 도달한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96호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산 48-1)
일주문은 루문인 강선루를 지나 처음 들어서게 되는 문으로 1719년에 세워진 문이다. 원래 건물은 화재로 인해 없어지고
1540년에 다시 세워졌으나 병자호란으로 피해를 당하였다가 1719년에 또 다시 세워진 것이란다.
단층 맛배기와집으로 원형의 주춧돌 위에 배흘림 기둥(기둥 중간이 굵고, 아래위로 가면서 가늘게 된 기둥)을 세웠다.
공휴일에 오면 늘 사람들에 밀려서 대충보게 되는 대웅전. 오늘은 제일먼저 대웅전의 전면부터 살핀다.
단아하니 참 예쁘다.
보물 제 1311호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802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주존불로 모신 건물이다. 이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것을 현종 원년(1660년)에 다시 지었고,
영조42년(1766년)에 다시 화재를 만나 소실되었다가 순조24년(1824년)에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른것이란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집에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대웅전 주존불 석가모니불. 협시보살없이 독불이다.
전각에 비하면 상당히 크시다.
바깥에서 보면 대웅전 가운데 출입문을 꽉 채우는 규모이다.
대웅전 바로 앞에 좌우로 3층석탑 2기가 서있다.
2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는 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이며,
다만 기단의 가운데기둥 조각이 하나로 줄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도 각 층 4단으로 줄어 들게 하는 양식은
신라 중기 이후인 9세기경 양식으로 짐작한단다.
절집 곳곳에 푸름이다.
'원통각'의 위치와 모습은 언제봐도 신비롭고 아름답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189호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산 48-1
원통전은 중생구제를 위한 대자대비한 원력으로 대중들에게 가장 친근한 보살인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으로 관음전이라고도 한다.
이 건물은 조선 현종 원년(1660)에 지어졌고 숙종24년(1698)에 호암대사가 고쳐세웠으며,
순조24년(1824)에 다시 고친후 오늘에 이른단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모습이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건물 앞쪽으로 기둥 2개를 내어 건물 평면이 T자형을 이루고 있는데 보조 기둥(활주)이 지붕 추녀 부분을 받치고 있다.
선암사 원통전은 아담한 크기의 건물로 사찰건축에서 보기 드문 T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어 주목 받는 건물이란다.
건축을 모르는 나에게조차 아름답게 보인다면 그것은 정말 아름다운 건물이 아니겠는가?
원통전을 세운 '호암대사'에 관한 전설이 다음과 같이 내려오고 있다.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을 보기 위하여 장군봉 배바위위에서 기도를 하였으나 끝내 보지 못하자 낙심하여 벼랑에서 몸을 던졌다.
이때 한 여인이 나타나 그의 몸을 사뿐히 받아놓고선 '나를 위해 몸을 버리는 것은 보리심이 아니다'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이 여인이 관세음보살인 것을 뒤늦게 깨달은 호암대사는 그 때 보았던 관세음보살의 모습대로 불상을 조성하여 원통전을 짓고
그 불상을 봉안하였다한다. 이 불상이 그 불상이다.
선암사는 석가모니불도 그렇더니 관세음보살상도 전각에 비하면 큰 편이다.
호암대사와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로는
아들이 없던 정조가 선암사 호암대사에게 기도하게 하여 아들(순조)를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人', '天', '大福田'이라는 친필현판을 정조가 친히 하사하였고
그 현판은 원통각 안에 아직 보존되어 있단다.
순조가 선암사 중창불사를 많이 한 이유인 듯하다.
종교적 신성함을 벗어나면 자연의 편안함이 맞아주고..
오래된 샛문의 돌계단과 담쟁이 그리고 기와얹은 돌담길 하나하나가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고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돌담조차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까지..
그것이 선암사의 미덕이다.
봄이면 이 길이 선암매의 향기로 가득차지만
지금은 초록의 향기로 가득차 있다.
아, 사람도 아닌 공간과 자연이 주는 위엄이라니..
선암사는 태고종 총 본산으로서
종교적 신성함과 시간의 위엄과 그리고 겸손과 조화의 아름다움을 아는 공간이다.
창건설로는
백제 성왕 7년(529)에 신라의 아도화상이 비로암을 지은 것에서 유래하였다는 설과
통일신라 경문왕 1년(861) 도선국사가 세워 선암사라 이름지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으나
최근에는 후자에 더 신빙성을 두고 있는 듯하다.
절 서쪽에 높이가 10여 장(丈)이나 되고 면이 평평한 큰 돌이 있는데,
사람들은 옛 선인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고 하며, 이 때문에 ‘선암(仙岩)’이라는 절이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설이야 어떻든간에
선암사는 갈때마다 아름답지 않은 때가 없으니
누구든 시간날때 선암사에 한번 들러 쉬어가심이 어떨지..
특히 비내린 오후, 신록이 촉촉히 젖은 날이라면 더 없이 좋을 듯하다.
그 자체로 힐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