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이라는 대 제국을 한 입에 말아먹은 서태후 '자희'의 흔적을 따라
서륙궁 즉, 서쪽에 있는 궁전인거죠.
그곳에는 여러채의 작은 궁이 있고 그 궁에는 주로 황제의 후궁들이 기거를 하였다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저수궁과 익곤궁, 그리고 채화전은
청말의 수렴청정 여장부였던 서태후로 알려져 있는 자희 태후의 거처로 알려져서
관광객이 집중적으로 모이는 곳이랍니다.
저도 역시 다른 후궁들에 대해서는 그닥 관심이 없고 오로지 서태후에 대해서는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해서 얼른 돌고 저수궁으로 향합니다.
저수궁은 최초로 명영제 18년(1420년)에 건축되어서 청 순치제 12년(1655년)에 중수되어
명청대 후궁들의 거주지로 사용되던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냥 단순히 서태후의 거주지라고만 알고 있습니다만 그 이전에도 이곳에는 후궁들이 거주해왔었습니다.
그 중 제일 유명한 사람이 서태후이겠지요.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서태후도 이름이 아니라 서륙궁에 거주하는 태후라 하여 서태후라 불려진 것이고, 그녀의 실제 이름은 자희랍니다.
현재 저수궁은 자희가 사용하던 침실모습 그대로 재현되어 있습니다.
저수궁의 전체 모습입니다. 누런 기와로..
그녀의 침실이랍니다.
그녀는 늘 이곳에서 조용히 불교서적을 읽고 사색에 잠기곤 했다는데..
오디오 가이드가 전하는대로만 곧이들으면 그녀가 굉장히 사색적이고 평화로운 여인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역사가들이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얼마나 사악하고 악날한지 신실한 불교신자가 할 짓은 아닌듯 하더군요
지붕아래 '저수궁'이라는 패찰이 있는데
청대 팻말에는 모두 한자와 만주어가 함께 병기되어 있습니다.
자희가 사용하던 개인식당인 체화전의 모습입니다.
현재는 매우 소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호화로운 식사를 하였다고 하는군요~
한끼에 128가지의 산해진미를 식단마다 바꾸어 가면서 올리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졌다하니..
그리고 그 한끼 식사에 드는 비용은 당시 천민들 1만 5천명을 먹여살릴 수 있는 비용이었다니
하루에 4만 5천명의 식사비를 그녀 혼자 썼다는 계산이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구중궁궐속 권력자들은 민심에는 사실상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자신의 권력과 영달을 유지하는것이 최고의 관심사인거죠
민심은 수단일 뿐입니다.
익곤궁에 전시되어 있던 서태후의 개인소품들입니다. 빗입니다.
이 빗으로 아침마다 그녀의 머리를 빗었겠죠
물론, 본인이 직접 빗지는 않았을 터이고..
몸시중을 드는 시녀가 아침마다 서태후의 머리를 빗기는데 머리카락이 한 올이라도 떨어지면 또한 불호령이 떨어지는지라
소매폭을 넓게하여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소매자락 안으로 모두 받아들여 위기를 면하곤 했답니다.
표독스럽지만 어리석은 서태후는 정말 자신의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한올도 빠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행복해했었겠죠~
어리석은 것이 인간입니다.
이 여인이 청나라 말년에 나라하나를 말아먹은 그 유명한 서태후입니다.
사진으로 보기에는 작으마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175센티나 되는 키를 가진, 여인치고는 큰 체구였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서태후(1835~1908)란 누구인가?
청나라 9대 황제인 함풍제(1831-1861)의 후궁이자 동치제(185-1874)의 생모였던 자희는
함풍제가 의문사한 후 여섯살 난 아들 동치제를 황제로 등극시키면서
실질적인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1875년 동치제가 세상을 떠나자 서태후는 황제 계승법을 위반하면서까지
세살 난 조카인 광서제(1871-1908)를 즉위시켜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였고 1908년 죽음을 맞을때까지 무려 48년간 중국을 통치하였던 여인이다.
1898년 무술변볍을 시행한 광서제는 서구열강에 반대하는 보수파였던 서태후와 정치적 갈등을 빚다가,
10여년 간의 연금 생활끝에 서태후에 의해 살해되었다.
'자비로운 여인' 자희라는 이름과는 달리 잔혹할 정도로 냉정하였으며 야심이 많았고 사치스러운 여인이었단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않는 사람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살해하는가 하면,
한끼 식사에 128가지 이상의 산해진미가 올라와야 했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었단다.
말년에 자신이 은거할 장소로 베이징의 이화원을 대대적으로 재건하였는데, 얼마나 사치스럽게 치장을 하였으면 이 때 해군비를 탕진하여
결국 청의 멸망을 재촉하게 되었단다.
서륙궁 관광을 마치고 고궁박물관 북문을 나와 경산공원을 구경한 후
오후에는 북해공원과 십찰해 관광을 하였지만 그 일정은 생략하고..
바로 자희의 흔적을 찾아 이화원으로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이 일정은 실제로는 마지막날 일정입니다.
이화원은 베이징중심에서 북서쪽으로 약 16키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중국최대 규모의 황실 정원이다.
290만 평방미터의 면적을 가진 이 거대한 정원은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더 유명하게 된 것은, 청조말에 서태후가 자신의 은거지로 사용하기 위하여 대대적으로 재건을 시도하다가
재건공사에 엄청난 비용을 사용하고 이는 군사력감소와 국체허약을 초래하여 결국에는 청조멸망을 재촉하게된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화원의 역사는 금나라때부터 시작하여 역대 황제의 여름궁전으로 쓰이다가 1750년 청의 건륭제 때 확장되었고
1860년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1888년에 서태후에 의해 재건된 후 지금의 이름으로 변경되었답니다.
이화원안에는 인공의 만수산과 곤명호가 펼쳐져 있으며, 여러개의 누각과 호화로운 건물들이 볼거리랍니다.
우리는 북쪽 만수산쪽으로 들어가서 남쪽문으로 나갈 것입니다
태후의 별장답게 누런 황금색 기와로 된 건물입니다.
만수산 둘레길을 빠져나오니 거대한 인공호수가 펼쳐져 있습니다. 이 인공호수를 판 흙으로 만수산을 만들었답니다.
남호 입구에 배 모양으로 건축된 건물이 있습니다.
최초로 건륭제가 대리석 건물로 지었는데,
서태후가 재건하면서 목조로 2층부분을 증축하면서 프랑스풍 인테리어와 스텐드글라스로 장식을 하여
매우 아름다운 내외관을 자랑하는 건물이랍니다.
국세는 점차 기울어져가고 있는데 서태후는 이곳에서 밤마다 달을 감상하는 연회를 베풀곤 하였답니다.
곧바로 728m에 이르는 장랑을 따라 걷습니다.
원래 장랑은 서태후가 쿤밍호를 바라보며 산책을 즐겼던 곳이라는데
저는 그닥 감명이 없습니다. 날씨도 우중충한것이..
그냥 남들이 걸으니 함께 걷습니다.
천장에는 <서유기>, <삼국지연의> 등과 과 같은 중국 고전소설에 나오는 명장면과 산수화 등
1만 4000여 저의 그림이 그려져 있답니다. 그래서 화랑이라고도 한다는데..
나는 그림의 뜻도 모른채..단지 느낌이 좋아서 몇컷 찍어봅니다.
장랑은 부드럽게 곡선을 이루면서 뻗어있고
장랑양쪽으로는 측백나무 가로수가 늘어져 있습니다.
당시에는 상당히 세련된 조경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지금으로서는 규모에서는 압도당하지만 미적 공감은 크게 없습니다.
걷다보니 '배운문'이라고 하는 곳에 왔습니다.
원래는 건륭제가 모후를 위해 건립한 대웅보전이었다는데, 서태후 시대에는 여기에서 축사나 경사를 진행하는 곳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서태후의 초상화와 옥좌등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냥 지나친거 같네요
새끼를 누르고 있는 이 사자는 아마도 숫놈인 거 같습니다.
중국에 가면 건물앞에 사자상이 많죠~
양쪽으로 암수 한쌍이 있는데
그 중 새끼를 이래 누르고 있는 놈이 숫놈이라죠 아마~
상가건물 뒤로 '불향각'이 우뚝 솟아있습니다.
멀리서 십칠공교 옆 의 누각이 아스라이 건너다보입니다.
드디어 장랑을 다 빠져나왔습니다.
장랑을 빠져나오니
이화원에서 가장 화려하다고 하는 '낙수당'을 만납니다.
이곳에서 서태후가 말년을 보냈다고 하지요. 1950년 대대적인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당시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하였다는데
내부 공개가 안된다하여 들여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녀의 장수를 기원하는 사슴과 학의 청동으로 만든 조각상들이 날렵합니다.
남들의 목숨은 파리목숨처럼 취급하면서 자신은 고고하게 오래살고 싶었던가 싶습니다.
우리는 경극공연장인 덕화원을 무시하고는 그 반대편 샛문으로 빠져나옵니다.
나오니, 조그만한 누각 하나 나타납니다. '의운관'
안내문을 읽어보니 서태후의 조카 광서제의 황후이며 서태후의 질녀였던 엽혁나락씨의 침실이랍니다.
광서제는 일찍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녀는 광서제와 서태후가 죽은 후에도 오래 살아남아 부위가 즉위함에 따라 황태후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의운관'을 나오니 'ㅁ' 자 모양의 작은 독립건물하나로 연결됩니다.
세살에 이모인 서태후에 의해 황제에 올랐으나 그녀의 꼭두각시 노릇만 하다가
성인이 되어 주도적인 정치를 꿈꾸다 서태후와 정치적 갈등을 겪게 되어
결국은 서태후에게 정치적연금까지 당하여 비운의 죽음을 당하게 되는 불쌍한 황제 즉, 광서제의 궁이죠.
죽기직전까지 광서제가 10년동안 연금되어 살던 궁이라네요 이곳이~
아직도 억울한 영혼이 그곳을 서성이고 있을 거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 공간이었어요
그래서 사진도 제대로 찍지 못했습니다.
그냥 분위기만..
다시, 베이징 고궁 박물관 북문으로 돌아옵니다.
영화'마지막 황제'에서 마지막 황제 푸위가 이 곳에서 자전거를 타며 한바퀴도는 애잔한 장면을 찍은 장소라네요~
이번 여행에서,
근대 중국의 역사속에서 서태후라는 여자의 위치가 얼마나 컷었는지를 알게 되었어요
비록 과거에는 나라를 말아먹은 여자이지만
오늘날에는 스스로 자국의 관광상품이 되어 나라를 먹여살리고 있군요
아뭏든 대단한 여자입니다.
'마지막 황제'나 한번 더 찾아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