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reading/책읽기

신을 사랑한 한 남자의 더 나은 인생이야기 '파이이야기'

노코미스 2018. 10. 12. 12:19





아픔을 겪고 난 후 난 슬프고 우울했다.

공부와, 마음을 다해 꾸준히 행한 종교의례 덕분에 차츰 삶을 되찾았다.

나는 남들이 이상한 종교의식이라고 여길 만한 예배를 계속 올려왔다.


남인도 지역의 폰디체리라는 곳에서 캐나다로 가족이민을 위하여 일본 국적 여객선 침춤호를 타고 오다가 인도양인가?  망망대해에서 여객선 조난을 당해 혼자서 2백몇십일을 떠돌다가 구조된 인도청년 파이는 토론토대학에서 종교학과 동물학을 공부하고

종교학 졸업논문은 사페드(팔레스타인의 갈릴리 위쪽지방)출신으로 16세기의 위대한 카발라 사상가였던 아이삭 루리아의 우주론과 관련된 내용을 주제로 하였고, 동물학 논문은 세발가락 나무늘보의 갑상선에 대한 기능적 분석을 주제로 하였다(이런 걸 왜 하는거야?). 연구대상으로 나무늘보르를 선택한 것은 이 동물의 차분하고 조용하고 내성적인 태도가 갈가리 찢긴 내 자신을 위로해 주어서였다(아~!)


어린시절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친 사람 두 사람이 있는데 그 중 하나사람이 사티시 쿠마르인데, 그는 파이가 다닌 중학교의 생물선생님이다.

활동적인 공산주의자이고, 외모는 아주 독특하게 기하학적으로 생겼지만 얼굴에는 언제나 미소가 넘쳐나는 사람이다. 그는 파이가 만난 최초의 무신론자이다. 무신론자인 쿠마르 선생님에게 파이아버지가 운영하는 동물원은 사원과 같은 곳이엇다. 선생님에게는 동물이 저마다 이성과 역학의 승리였고, 모든 게 늘 질서안에 있으며 모든게 질서임을 확인하고는 과학적인 신선함을 안고 동물원을 떠나곤 하였다.

인간이 하는 정치나 종교는 믿을게 없고 종교는 오히려 '암흑'에 가깝다고 믿는다. '현실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을 넘어설만한 근거가 없다. 우리가 감각으로 경험하는 이외의 것을 믿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소아마비를 앓았던 어린시절 선생님을 구해준 것은 신이 아니라 약이엇단다. 언젠가는 있었을지도 모르는 신. 그러나 신은 죽었다. 아니 선생님이 신을 죽였다. 소아마비가 얼마나 무서운 병이기에 한 사람 안에서 신을 죽일 수 있었을까?


내용은 황량하고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운 말이었지만, 선생님의 억양과 어투는 사랑이 넘치고 용감했다. 나는 여전히 선생님을 좋아하고 오히려 그와 형제애를 느낀다. 왜냐하면 무신론자들도 또다른 형태의 신앙을 가진 형제임을 알기 때문이다. 선생님으로 인하여 그들의 말이 모두 믿음의 말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무신론자가 아니라 불가지론자다. 한 때는 의심도 쓸모있는  일이지만, 의심을 인생철학으로 선택하는 것은 삶을 '정지'상태에 놓아두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 모두는 천국도 지옥도 아닌 곳에서, 종교도 없이 태어났다가 누군가에게 이끌려 신을 소개받는다.

파이는 태어나면서 이모에 의해 힌두교를 통해 처음으로 종교에 입문하였고, 그날 이후로 겨자씨보다 작지만 신앙적인 기쁨의 씨가 내 안에 뿌려져 싹을 튀우기 시작했다. 나는 힌두사원에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영을 의식한다. 흔히 느껴지는 개인적인 영이 아니라 더 큰 존재를 인식한다. 사원의 깊은 성소에서 신의 존재를 보여주는 신상을 보면 가슴이 뛴다. 진정 나는 신성한 우주의 자궁에 있다.


나에게 힌두교는 우주를 이해하는 눈이다. 우주에는 세상의 영혼인 브라만이 있고, 브라만은 시바, 크리슈나, 삭티, 가네샤 등의 이름을 가지고 사랑, 자비, 두려움 등의 속성을 드러낸다. 브라만은 신의 모습으로뿐만 아니라 인간과 동물, 나무, 한줌의 흙에서도 표현된다. 브라만은 우리 안에 있는 영적인 힘으로 '영혼'이라고 부르는 아트만과 같다. 개인의 영혼은 세상의 영혼에 닿는다. 브라만과 아트만의 관계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신비롭게 맺고 잇는 관계와 같다. 아트만은 브라만을 실현하려 애쓴다. 절대적인 것과 하나가 되려하고, 이 생에서 순례에 나선다.

해탈까지의 길은 무수히 많지만 길을 따라 있는 강둑은 언제나 똑 같다. '업의 강둑', 거기서 각자는 자기의 행위에 따라 해탈하기도 하고 윤회하기도 한다.


이 성스러운 그릇이 힌두교이며, 파이는 힌두의 눈으로 우주를 본다. 힌두교는 우리가 누구이며,왜 존재하는지 정의해준다. 힌두교는 사랑넘치는 자비심의 어마어마한 우주적인 힘을 믿게 해준다.


열네살 무렵에 파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문나르에 있는 세 언덕에는 신전들이 하나씩 있었다. 호텔과 강 사이에 있는 오른쪽 언덕에는 힌두사원이 있었고, 멀리 가운데 언덕에는 이슬람 사원이 있고, 왼쪽 언덕 꼭대기에 기독교 교회가 있었다. 우연히 들르게 되었던 기독교 교회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십자가에 메달려있는 신을 보았고, 작은 날개를 단 통통한 아기 천사들이 날고 있는 그림을 보았다. 가톨릭교는 무거운 심판과 엄격함으로 유명하지만, 교회에서 만난 마틴신부는 굉장히 친절했다. 그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너무나 놀라웠다. 인간이 죄를 지었는데 신의 아들이 대신해서 댓가를 치른단다. 왜? 아무리 물어도 마틴 신부의 대답은 하나로 회귀한다. '사랑'때문이라고.


이기적이기도 하고 까탈스럽기도 하고 처량하기도 한 이 신을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되지만, 머리에서 그를 쫓아낼 수가 없어서 급기야 사흘만에 나는 기독교인이 된다. 기독교는 성질도 급하다. 일주일만에 세상을 창조하고, 한 순간에 탕아가 되기도 하고 구원도 받을 수 있다. 기독교는 한 순간에 존재한다. 지금 당장.  힌두교가 갠지즈 강처럼 표표히 흐른다면, 기독교는 대도시의 출퇴근 시간처럼 부산스럽다. 제비처럼 날렵하고 구급차처럼 급하다. 나자렛 예수를 내 앞길에 끼워준 크리슈나 신에게 감사한다. 나무관세음보살.


열다섯살 어느 날, 이슬람 구역의 작은 마을에서 사티시 쿠마르를 만났다. 그는 이슬람 신비주의자 수피였다. 그의 이름이 공산주의 무신론자 과학선생님 이름과 같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두 쿠마르씨는 내게 생물과 이슬람교를 가르쳐 주었으며, 대학에서 동물학과 종교학을 전공하게 한 사람들이다. 이 두분은 내 어린 시절의 선지자들이엇다.

그는 이슬람을 '사랑받는 사람들에 대한 종교'라고 했다.  그는 신과의 합일을 추구했고, 신과의 관계는 사적이고 사랑 넘치는 것이었다. "우리가 신께 두 걸음 다가가면, 신은 우리에게 달려오시지!" 

그를 만나기 이전에, 이슬람교에 대해서는 좋은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슬람교는 기독교보다 폭력이 심한 종교라고 들었다.  그래서 사원이 텅비어 있는데도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햇다. 그러나 이슬람교와 그 정신을 이해하고 나서 본 이슬람 사원은 신에게, 또 바람에게 열린 구조이다. 신도들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이맘의 말을 듣고, 그러다 기도시간이 되면, 일제히 일어나 줄을 맞춰서서는 이마를 땅에대고 절을 한다.


집에서 일을 하다가도 애잔소리가 들리면 그 자리에서 바로 절을 한다. 양손을 귀에 대고 마치 알라의 응답을 들으려고 애쓰는 사람처럼..그러다가는 허리를 굽혀 절을 한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같은 과정을 네 차례 반복한다. 빠르고, 필요한 동작만 하고, 육체적이고, 중얼거리며..

십자가의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꼼작않고 조용히 기도해야 하는 기독교의 의식과 비교해볼 때, 이슬람교의 의식은 얼마나 효율적인가! 

이슬람 교란 단지 쉬운 운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베두인 족들이 하는 뜨거운 날씨 속의 요가, 힘들이지 않고 천국에 가겠네. 그날 이후 파이는 금새 이슬람교에 깊은 신앙심을 느낀다.


그 이후로 나는 신이 아주 가까이 있는 느낌을 받는다. 밤새눈이 내린 후, 햇살이 맑고 화창한 날, 친구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숲속 작은 빈터로 쏟아져 내리는 금빛햇살 사이로 나는 성모 마리아를 보았다. 내게 사랑넘치는 미소를 지어주었다. 두려움과 기쁨으로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순간순간 천국에 있는 느낌을 받는다. 그 전에도 지났던 장소이지만, 이후로 보는 눈이 달라졋다. 우주에서 분출되는 에너지와 깊은 평화가 묘하게 뒤섞인 느낌은 강렬하게, 축복으로 다가왔다. 이전에는 바다와 나무들, 공기, 햇살이 저마다 다르게 말했지만, 이제 모두 하나의 언어로 말을 걸어온다. 나무는 길을 안내하고, 길은 공기를 인식하고, 공기는 바다를 생각하게 하고, 바다는 햇살과 모든 걸 나누었다. 모든 요소가 이웃해서 조화를 이루었고, 모두 친척이 되었다. 나는 언젠가 죽어야 할 인간으로 무릎을 꿇었고, 영원불멸한 존재로 일어났다. 하나의 작은 원의 중심이 된 듯했고,우연히도 그 원은 훨씬 큰 원의 중심인 느낌이었다. 자아가 알라와 만났다.


부모님은 내가 한꺼번에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 예배를 다 본다는 걸 알고는 그 중에 한가지만 선택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에 나는 동의할 수 없어서 간디의 말로 그들의 입을 닫게 만들었다 "간디께서는 '모든 종교는 진실하다'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신을 사랑하고 싶을 뿐이에요'. 당황한 아버지가 목청을 가다듬고는 "우리 모두 그렇게 해야될 것 같군. 신을 사랑해야.."

나는 종파를 초월한 대화에 그렇게 입문하게 되었다.


우리가 죽는 날, '메마르고 누룩없는 사실주의'를 지탱하는 불가지론자들은 어떤 모습으로 죽게 될까? 마지막까지도 상상력 부족으로 더 좋은 이야기를 놓치고 말겠지. 신이란 상상의 산물이지만, 우리삶에 대한 '더 나은 이야기'를 선택하게 해주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