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라 /영동 기행

통일신라의 종교적 열정의 결정체, 석굴암

노코미스 2010. 1. 4. 23:26

 

석굴암은 자연석을 다듬어 돔을 쌓은 위에 흙을 덮어 굴처럼 보이게 한 석굴사원으로서 경덕왕 10년 (751년)에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창건하기 시작하여 그가 죽은 이후 774년 혜공왕 때 완공되었다. '돌로 비단을 짜듯 감실을 조성했다'는 옛 기록이 말해 주듯이 거친 화강암으로 부드럽고 아름다운 부처님의 모습을 표현한 것은 가히 불교미술의 백미라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은 통일신라의 불교문화와 과학. 종교적 열정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석굴은 국보 제 24호로 등록되어 있다(1995년 12월 9일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등재) -비유리플 경주 발췌-

 

 

불국사를 관람하고는 입장시간 5시를 맞추기 위하여 부랴부랴 움직여서 올라가니 어느 덧 해는 서라벌 벌판으로 뉘엿뉘엿 지고 있다.

 

 매표소 입구의 종루를 바치고 있는 기둥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석양을 감상할 틈도 없이 폰샷만 한장 날리고는 바로 암자로 오른다.

 

 

 

저 뒷편 건물이 본존물이 조성되어 있는 석굴암이다. 

목조전실 뒤편으로 노란 봉분처럼 보이는 것이 석굴암이다.

석굴 안쪽은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관계로 도록 사진을 인용하여 내부를 기록한다.

 

 

 

석굴암은 화강암재를 사용하여 토함산 중턱에 인공으로 축조된 석조 건축물로서 장방형의 전실(입구)과 원형의 주실(본존불이 안치된 곳) 이 비도(가운데 좁은 통로)로 연결되는 구조로 조성되어 있다. 이 안에 통일신라 불교예술의 결정판이 응집되어 있다.

 

첫째, 원형주실의 천장은 하늘처럼 둥글게 짜인 궁륭모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이한 것은 30개의 돌못이 쐐기처럼 박혀 궁륭천장을 받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돌못은 기능적으로는 궁륭천장을 받혀주는 역할을 하지만 미학적으로는 천장이 지루하지 않게 해 줄뿐만 아니라, 마치 석가여래의 광명이 하늘에서부터 퍼져나오는 듯한 공간감을 느끼게 하는 교묘한 건축기법을 적용하고 있다.  

그리고, 천장 맨 꼭대기에는 하나의 큰 돌을 중심으로 하여 웅장하고 화려한 단선 복판의 연화를 새겨놓고 있는데, 이 큰 돌은 김대성의 창건설화에 나오는 바와 같이 천신이 세 조각을 이어붙인 듯 균열이 나 있다.

 

 

 

둘째, 암자내의 다양한 부처들의 조각들이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다.

주실  한 가운데 3.4m높이의 본존불이 1.6m높이의 연화대좌위에 '항마촉지인'의 모습으로 동해를 향하여 앉아 있고, 본존불을 둘러싸면서 천부상, 보살상, 나한상, 관음보살상 등으로 주벽을 메우고 있으며, 본존불의 얼굴높이에 10개의 감실을 만들어 환조로 된 보살상을 안치하고 있다. 전실과 통로 좌우로는 4구씩 8부신장과 금강역사, 사천왕상 등이 조각되어 있다. 이 석굴암의 조각을 모두 합하면 38채나 되는데, 그 조각들이 각자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는 미술사적으로 상당히 우수한 작품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난 한 시대의 종교 및 예술적 결정판을 이해하는데? 아니 보는데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자랑인지, 양심선언인지 원~ㅜ.ㅜ)

 

 

그리고 하나의 암자이지만 이 구조안에 일반 사찰의 구조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주실의 본존불은 일반 사찰의 대웅전에 해당되고, 관음상은 관음전을, 다른 보살 군상들은 천불전 정도에 해당된다고 한다.

 

 

우리같은 사람은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더 많다. 석굴암에 들런 김에 '세밑 치성'을 드리는 등 하나 달고 가라는 처사님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아이들 이름 얹어서 등하나 달고 왔다. 아무래도 통일신라의 종교적 열정의 결정체라 불리는 곳이니만큼 그 기운도 영험할 것이라 믿는 마음이 더 크다.

 

새해에는 맑고 건강한 생각만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이웃과 오해없이 살았으면 좋겠다. 딸아이가 예쁜 마음으로 공부열심히 해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으면 좋겠다. 재훈이가 아빠랑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 생각해보니 내 소원이 참 많다. 부처님, 죄송해요~^^

 

 

 

 <아니온듯 다녀가세요>라고 쓰인 글귀가 좋아서 한 컷 쏘았는데, 가지런한 옆모습과 단정한 처맛살 결이

나름 아름답다. 일제가 지었다고 해서 무조건 나쁘다고만 내칠수는 없지 않겠는가.. 억울하긴 하지만..

 

 

 일제 때, 해체보수를 하고나서 복원되지 못하고 남은 석재들이 난간아래 방치되어 있다.

 

석굴암은 문화재 관리비로 가장 비싼 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어왔건만 가장 빠른 시간에 둘러보고 나와야 했다. 아깝기 그지 없다. 입장료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석굴암에 안치된 38채의 조각상 하나하나에 대한 감상을 빠뜨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그것은 불가능하다. 고백하기 부끄럽지만 그래도 해야 된다면.. 그것은 시간때문이 아니라 나의 미천한 안목때문에,,

 

다음에 석굴암을 들릴 때는 불교미술에 대한 안목을 좀 더 키운후에 도전해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