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여름 방학의 끝자락..
올여름은 마음만 조급한 채로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채..이렇게 방학의 끝자락으로 달리고 있다.
방학 마지막 주를 딸내미랑 함께 하는 시간으로 잡는다.
이 놈도 대학들어와 첫 방학이라 그런지 지 나름대로 일정 소화하느라 바쁘다더니만
이번 주는 흔쾌히 나에게 일정을 맞추어 준다.
우선,
너무 가깝지도..그렇다고 피곤할만큼 너무 멀지도 않은 곳으로 생각해보았다. 어디일까..
마음이 허해서일였을까..
나의 과거가 있는 곳으로 마음이 끌린다. 구룡포..
딸이 좋댄다.
10시반에 픽업하여 휴게소 중간중간에서 군것질도 해가면서 제법 여행 기분을 내어본다.
빗줄기가 오락가락 하지만..전혀 상관없다. 오히려 너무 뜨거운 날씨보다 여행하기에는 더 좋다.
분위기도 다소 센티멘탈하게 만들어주고..
나도 간만에 편안하게 즐긴다.
가는 중에 '양동마을'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약 20여년 전, 구룡포에 근무할 때 한번 들러본 기억이 있는 곳..
그저 시골 깡촌이었던 느낌이 있던 곳..그런 곳이었는데
근래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고 하고
많은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극찬하는 마을..
도대체 어떻게 변했길래.. '들러볼까?'하니 딸내미 "콜~"
포항가는 길목에서 안강쪽으로 빠져서 잠시가다가 '양동마을'이정표를 보고는 오른 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설창산과 성주봉 사이의 계곡을 끼고 형산강을 바라보며 제법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우리는 급한 김에 마을입구에 마련되어 있는 임시주차장에 주차를 한 후
눈에 보이는 순서대로 마을을 훓었지만
다녀온 후 생각하니, 좀 더 체계적으로 훓었으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있어서
이 포스팅을 하게 된다.
이전에 한번 가봤다는 자만심으로 '별것 없던데..'라며 금방 끝날 것이라 생각하여 발길 닿는대로 다니다보니
나중에는 지쳐서 다 보질 못했다.
그런데 구석구석 살펴보니 이 마을이 산기슭에 자리잡은 마을치고는 쾌 큰 마을이며
마을에 남아있는 가옥들이 재현되었다기 보다는 초기 원형이 계속 관리되면서
그대로 보존되어 온 것이라는 점에서 볼수록 놀라움이 커진다.
나의 경험에서 볼 때,
먼 곳에서 일부러 찾아가는 사람들은 그냥 예쁜 마을 하나 본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오는 것도 좋겠으나
이 마을의 역사를 알고 체계적으로 본다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후회도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양동마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마을의 형성유래부터 알고 들어가면 더 많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초가나 기와집들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그리고 오랜 세월의 풍파속에서도 옛모습을 지켜오고 보존해 왔다는 점에서만 보더라도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만큼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형태의 마을이 형성되고 보존될 수 밖에 없었던 이면의 내용을 알고 본다면
현재 남아있는 한채 한채의 가옥들은 단지 외관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서 더 큰 하나의 역사적 아이콘으로 남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
양동마을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아이콘은..
우재 손중돈 선생(1463-1529)과 회재 이 언적 선생(1491-1553)이다.
그들은 조선의 18현 중 두분이고, 그중 이 언적 선생은 조선 5현 중 한분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재 이 양동마을은 조선의 18현중 두분이 태어난 상당히 의미있는 마을이고
현재 남아있는 건축물들도 알고보면, 우재 손중돈과 회재 이언적 선생과 관련된 유적지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빼버리고 마을을 보게 되면
그저 초가집 몇 채와 기와집 몇채 본 기억으로밖에 남지 않게 된다.
물론,
경주 손씨와 여주 이씨의 집성촌이 된 현재의 양동마을 이전에도 물론 사람은 살고 있었다고 기록된다.
고고학적 자료들에 근거해서 보건데, 기원전서부터 이곳에서 거주가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으며
여주(여강) 이씨와 경주 손씨의 집성촌이 되기 전까지는 오씨, 아산 장씨가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경주손씨와 여주 이씨의 집성촌이 되어 있다.
경주(월성) 손씨와 여주(여강) 이씨가 이 마을에 입향하게 된 것은
조선의 청백리라 하는 우재 손중돈의 아버지인 손소가
아산 장씨 집안에 장가왔던 풍덕 유씨 유복화의 무남독녀와 혼인하여 이 곳으로 장가를 들면서부터이고,
그 이후, 회재 이언적 선생의 부친인 여주 이씨 이번이 손소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장가를 오면서 부터란다.
그러니, 우재선생과 회재 선생은 외삼촌과 생질관계가 되는 셈이다.
재밌는 것은 이 마을은 외손들의 세가 강한 터라하여
외손이 탄생하게 되면 외가의 세가 쇠퇴해 버린다는 설이 있다. 그래서 이 마을을 외손마을이라 하며,
손소가 들어오면서 처가인 류씨집안이 절문이 되어버렸고..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이 마을은 우재 손중돈 선생과 회재 이언적 선생의 후손들이
살아가는 터전이 되어 버린 것인데,
여전히 외손마을의 전설이 작용을 한 것인지,
남아있는 고택과 주요 문화재에는 손씨보다 이씨 문중의 것이 훨씬 많더라는 사실도 재미있다.
안내 맵에 표기되어 있는 주요 문화재 및 유적지 중 빨간색으로 동그라미 되어있는 부분은
경주 손씨의 유적이고 나머지는 모두 여주 이씨 유적이거나 소유이다.
이 마을에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 곳이 월성손씨의 종가인 '서백당'이다.
이 곳에 터를 잡아준 지관이 이 곳이 설창산의 혈맥이 모이는 자리로서
이곳에서 앞으로 3명의 현인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다는데,
실제로 그 곳에서 우재 선생과 그의 생질인 회재 선생이 태어났고 나머지 한분의 현인을 더 기다리고 있단다.
그러나, 손씨 가문에서는 회재 선생 이후 현인을 여주 이씨 가문에 한 명 빼앗겼다고 생각하여
이후로는 출가한 여식이 출산을 하러오면 더 이상 서백당에서 출산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듯, 두 집안은 사돈관계이면서도 암암리에 경쟁관계가 되어
마을의 건축물의 축조배경과 축조구조와 배치에서도 서로간의 대립이나 경쟁구도가 드러나게 되었고,
이런 역사적 배경을 알고 이 마을을 보게 되면 하나하나가 더 의미있게 다가오리라.
참고로, 본 블로거는 사전 공부가 미약하여 그렇게 터가 좋다는 '서백당'은 버리고 왔나이다ㅠ.ㅠ;;
과연 한분 남은 위인은 언제쯤 태어나실라나..
마을을 이렇게 분산해서 요목별로 보게 되면 좀 더 체계적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주로 '향단 코스' 중심으로 보다가 나중에는 그 집이 그 집같아서 탐방을 포기해버리게 되더이다.
양동마을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더 상세한 이야기들이 있답니다.
http://yangdong.invil.org/village_n/history/contents.jsp
이런 개괄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이제 양동마을의 아름다운 모습들을 하나씩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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