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승시간만 잘 맞아떨어졌으면 버스를 탈 생각은 하지 않았을터인데,
이날, 태백에서 통리로 나가는 기차가 더 이상 없으므로 버스를 이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눈길에 버스가 안전할까.. 내심 걱정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한때는 강원도 산간지방에 눈온다는 기상청예보가 있으면 바로 뒤이어
교통마비, 교통정체 뉴스가 따라 나왔으니..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그런 걱정은 많이 없어졌단다.
요즘은 우리나라도 제설작업이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어서..
밤에 아무리 많은 눈이 쌓여도 밤새 제설작업이 이루어지므로 눈이 오더라도 버스나 자동차 운행에는 큰 지장이 없단다.
그렇다하더라도, 눈길에 익숙하지 않은 외지인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안전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내가 탔던 버스 기사양반의 말씀이시다.
어쨋거나 버스를 타니,
기차로 만나지 못하는 새로운 길과 만날 수 있어서 또한 좋다.
태백에서 통리를 넘어가는 고개길이 무슨 고개인지는 모르겠으나 고갯마루를 내려와서,
통리 부대 입구 근처까지의 눈오는 풍경이 참 좋다.
외지의 여행자로 보이는 사람들은 차창에 앉아 지나치는 풍경을 그냥 보내지 못한다.
카메라로 풍경을 연속 찍어댄다.
부대입구를 지나니 곧 통리역에 도착한다. 역 앞 대성슈퍼 앞에 나를 내려준 버스는 다시 눈길을 헤치고 갈길을 가버린다.
너무 일찍 서둘렀나..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전날, 도착할 때 을씨년 스러웠던 분위기와는 달리 이곳 통리도 새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그리고 하얀 깃털같은 눈송이들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그럴수록 세상은 고요속으로 빠져들고..
아직 시간이 30분이상 남은지라.. 버스가 사라져간 마을 뒷길쪽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통리2길쪽으로 들어가보니..
산아래에 위치해있는 가옥에서는 집앞 눈을 치우느라 열심이다.
여행자가 즐거워하는 눈이 주민들에게는 불편이다.
동일한 대상일지라도 입장에 따라 다가오는 의미가 이렇듯 다르다.
산등성이쪽으로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선로주변의 모습도 아름답고..
기차가 들어올 시간이 다가오므로 바쁜 걸음으로 대합실로 돌아오니..오메~
이 조그만 시골역 대합실이 이렇게 붐빌줄이야..
공간이 수용할 수 있는 용량을 초과한 대합실은
사람들의 목소리와 숨소리와 그리고 입김으로 가득차 있고,
끼니를 놓친 허기진 여행자들은
여유있게 앉을 자리 하나 없는 공간속에서도 어떻게 한쪽 구석을 점령하여 컵라면을 후루룩거리며 둘러마시고 있고..
지금까지 한적했던 여행의 이미지는 모두 사라지고,
뒤죽박죽, 스스로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어수선한 상황속에 매몰된 수동적인 인간의 모습을 감상하는 일도
즐거운 일이 된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으니
눈으로 인하여 20분 연착하겠다든 부전역행 기차가 곧 들어오니 기차를 타실분들은 승강장으로 나오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대부분의 승객들이 승강장으로 이동을 한다.
거의가 등산복차림이다.
이 주변에 등산을 할만한 명산이 있는겐가..
아마도 태백산을 다녀오는 것인가..?
통리에 미인폭포를 끼고 있는 통리협곡과 그곳을 거쳐서 태백으로 넘어가는 트레킹 코스가 좋다고들 하는데..
아마도 그 코스를 즐기고 오는 길인지도 모르지..
역으로 들어오는 기차를 향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에
비록 짧은 여행이었긴 했어도, 귀향길에 대한 그리움이 묻혀있다.
역주변의 마을들은 같은 듯하면서 다르다.
그렇게 다른 모습을 보이는 마을들을 감상하는 것도 재미있다.
마을을 지나고 나면 또 다시 기차는 영동의 산맥을 따라 흐르고..
그 길이 그냥 못본체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아름답다.
길은 아마도 소백산맥일 것 같은 산맥을 끼고 흐르는 황지천 개울을 따라 나 있고..
그 길 위쪽 산등성이 쪽으로 철로가 이어져 있어서..
철길을 따라 기차가 달리면, 산허리를 따라 흐르는 계곡물과 그 위로 나 있는 자동차길과 그리고 맞은편 산봉오리가 함께 달린다.
그러다가는 혼자서 터널 속으로 숨었다가 또다시 새로운 세상으로 빠져나와서는 계곡을 만나고 산봉오리를 만난다.
그렇게 만나는 산봉오리는 이미 어느 천상의 화가가 터치를 하고 간듯 하얀 수묵의 세계가 그려져 있고..
그런 풍경이 강원도를 빠져나올때까지 끊임없이 반복되고, 나는 끊임없이 감탄하고..
기차는 석포역을 지나서 승부로 들어온다.
석포에서 승부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저 뒤의 터널을 빠져나와야 한다.
돌아오는 길에 들럴까 했던 '승부역'
또 다시 마음이 변하여..
그래서, 차창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모습이라도 기억에 담아두려고
마지막 차량 꽁지 창문을 통하여 멀어져가는 승부역의 모습을 애달프게 부여잡아 본다.
중앙에 보이는 입석은 '하늘도 세평, 땅도 세평, 꽃밭도 세평'이라는 글귀가 쓰여진 유명한 시비이고,
그 뒤면으로 아스라한 곡선은 개울위에 걸쳐진 다리이다.
왼편의 조그만 콘테이너 박스가 전국에서 가장 작은 대합실이란다..
승부역과의 이어지지 않는 인연을 생각한다.
이번에 인연이 없으면 다음에 새로운 인연으로 만나면 되는 것이지..
옆에 앉았던, 도계가 고향이라고 했던 소녀가 말했다. 가을에 한번 더 오라고..
가을의 단풍이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라고..
아마도 가을날의 인연을 만들라고..
그래서, 이번에는 그냥 스쳐가라는거겠지..
다가오는 풍경과는 달리 사라져가는 풍경으로 바라보니, 그 애닯음이 더한다.
더군다나, 눈(雪)물에 어린 풍경이라니..
비룡산 자락의 계곡을 빠져나오면
하~얀 설경위에 낮으마하게 앉은 기왓집이 보이고..
남쪽지방만 하더라도 가옥들은 집단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산간오지에 가까울수록, 마을과는 떨어져서 외따로 형성된 가옥들이 더러 보인다.
산촌에 외딴 농가가 주는 이미지는 겨울의 외롭고 차가운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또렷한 정신으로 내려다 본 마지막 마을 '현동'..
타이틀도 거창한, 한국의 샹그릴라 '현동'이다.
철길 위에서 한참 내려다봐야하는 깊은 계곡아래의 작은 마을은
특별히 개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신경써서 지은 집들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마을 사이로 나 있는 길도 아름답고..
타이틀이 거창하면 어떠냐..기준이 조금 못 미치면 어떠냐..
어차피 샹그릴라가 '내 마음속의 해와 달'이므로
내가 이 마을을 '내 마음의 해와 달'로 정하면 그가 바로 샹그릴라인것을..
...
봉화를 지나고 안동근처를 지나면서 날은 어두워지고
더 이상 현동에 견줄만한 내 마음의 해와달을 찾아내기도 어려워지게 되자..
내 눈꺼풀속으로도 어둠이 밀려들기 시작한다.
어두운 의식속으로 하얀 길 하나가 이어진다. 내 의식속에 새로운 길 하나를 남기고..
나의 송구영신 기차여행은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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