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라 /영동 기행

와우! 개실마을~

노코미스 2015. 9. 19. 22:11

 

합천에서 고령으로 가기 위하여 구도로를 타게 되면 불과 15분여 거리에

기대치 않은 아름다운 마을을 만나게 된다.

 

마실 이름은 마을의 외형과는 달리 어감이 다소 이상하게 들리지만

어원을 알고 몇 번 되뇌이다보면 오히려 아름답게 들리는 오묘한 마을,

이름하여 '개실마을~'

 

꽃이 피는 아름다운 개(佳), 골짜기 실(谷)

꽃이 피는 아름다운 골짜기

개실마을~

 

 

 

 

 

합가에서 내려 구도로를 따라 고령쪽으로 내려가다보면 아래와 같은 이정표와

세운지 얼마되어보이지 않는 '세거지비'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것을 보게 되고,

그러면 당연히 차를 멈추게 된다.

 

세계 각국의 언어가 새겨진 이정표. 마을의 특성화를 위하여 상당히 애쓰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김씨 세거비'

김씨들이 이 지역에 터전을 잡게 된 유래를 기록한 석비이다.

 

 

 

여기서 김씨라 함은 '점필재 김종직'선생의 후손인 선산 김씨들을 일컫는다.

 

 

 

 

 

세거비 바로 앞에 전면 5칸 가량 되는 재실이 하나 있다.

 

문이 잠겨있고 상시로 사람이 살진 않아서 마당에 풀이 자라 있긴 하지만

관리는 잘 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재실이다.

 

담벼락 아래에 '도연재(道淵齋)'라고 암각된 비석이 세워져 있다.

 

설명에 의하면 도연재는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 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문화유산이며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지방 유림들이 고종원년인 1886년에 건립하여

유생을 가르치고 제사를 모시던 재실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왜 김종직의 재실이 이곳에..?

 

 

 

 

개실마을은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에 위치한 선산 김씨들의 한옥마을 집성촌이다.

 

정작 김종직 선생 자신은 밀양출신이고 밀양에서 사망하였으나

500여년전 연산군대 무오사화때 선생이 쓴 '조의제문'으로 인하여 부관참시당하는 등

화를 당한 김종직의 후손들이 이곳으로 피해오면서 지금까지 18대째 350여년간

이곳에서 종가가 대를 이어오고 있다.

 

 

 

 

도연재 동북쪽 골목위로 점필재의 종택이 있다.

 

 

 

대문에서 들어서면 먼저 '문충세가'라는 현판이 걸린 사랑채가 먼저 보이고.

 

 

 

 

 사랑채 대청마루 쪽문으로 안채가 보인다.

 

 

안채는 1800년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종손이 거주하고 있는 실생활공간이다.

 

 

 

 

 

사랑채 오른쪽으로 문충공 점필재의 유물을 보관해 오던 '서림각'이 문이 잠긴채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 보관되어 왔던 여러가지 교지, 고문서 등 유물과 유품의 일부는 보물 제 1725호로  지정되어 

대가야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종택에서 나온 고문서와 저서 일부, 고령박물관전시실>

 

 

 

종택 뒤안으로 돌아가면 사당이 있다.

 

 

 

사당올라가는 언덕받이에 이 마을이 조성될 때 함께 조성되었다는 대나무밭이 있는데

누군가가 무언가를 열심히 찍고 있다.

 

알만한 분 한테 뭐하는거냐고 물으니

KBS에서 나왔단다.

 

지난 주말에는 대구방송국인가에서 개실마을을 배경으로 '고택음악회'를 주최하여 아주 환상적인 홍보를 하더니

오늘은 KBS에서 취재를 나왔나보다.

 

내가 개실마을을 처음 보게 된 것은 불과 3주전이다.

처음은 어! 하고 지나갔다.

 

그러다가 직원과 함께 고령에 홍보차 나갔다 들어오는 길에 차에서 잠시 내려 분위기를 살폈다.

그 때, 다른 전통마을들과 비교했을 때 나름 단장이 잘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

얼마나 유명한 마을인지까지는 몰랐다.

 

그 주 주말에 이곳에서 '고택 음악회'가 있음을 알고

이 시골에서 이 무슨 호사냐 싶어 퇴근하자마자 얼른 달려가 자리잡고 앉았었다.

가을비가 촉촉히 내리는 고택마을과 재즈가락이 그렇게 어쩜 그렇게 잘 어울리는지..

 

전국에서 어떻게 알고 왔는지 2~3백명은 될거 같은 인파들이

밤늦도록 자리를 뜨지 않고 이 시골마을의 정취를 만끽하였다.

역시 '고택이 대세'인 시대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더니 오늘은 KBS가..

 

바야흐로, 개실마을의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이라~

 

 

 

 

 사당뒤편으로는 점필재 선생의 선비정신을 기리기 위해 심어놓은 대나무숲이 무성하고

앞쪽으로는 빨간 배롱꽃이 낮으마한 토담벽을 장식하여

그 정취가 참 좋다. 아름답다.

 

 

 

 

그런데...

 

 

문이 잠겨 있다..

 

굳게 잠겨 있다..

 

 

 

 

조금 전에만 하더라도 문이 열리는 것을 봤는데..ㅜ

 

 

 

취재진한테만 잠시 열어주고..

 

내가 올라갔을 때는 이미 사당 취재는 끝나고

대나무숲 취재중이었나보다..ㅜ

 

 

 

내려가는 길에 조망하는 종택의 구조는 들어올 때 보았던 종택구조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마을 입구 체험마당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 한참 나락이 익어가는 논길가를 따라 걸어가니

초가을 늦은 아침 담벼락에 잎떨어진 대추나무 그림자가 아름답다.

 

 

 

길 끝날 무렵에 또 재실 분위기가 나는 아담한 고택이 하나 나타난다.

 

 

 

이름하여 '모졸재'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을 이렇게 정성스럽게 가꾸기도 쉽지 않을 터인데..

짧지 않은 시간동안..

 

 

후손들이 선조에 대한 자긍심이 있어서 그러한 것인지

마을을 참으로 지극정성으로 가꾼다는 느낌을 준다.

 

 

마을끝에서 마을안쪽을 내려다본다.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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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 김종직 선생님은요~

김종직(1431~1492/세종 13~성종23)은 조선초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본관은 선산, 자는 효관, 계온, 호는 점필재, 시호는 문충이다. 1431년 밀양 대동리에서 태어나 정몽주와 길재의 학통을 이은 부친 김숙자에게 수학했으며 일찍부터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훗날 사림의 종장이 된다.

1457년(세조3)에 그 유명한 '조의제문'을 짓고, 1459년(세조5)에 과거에 급제하면서 관료생활을 시작하였다.

1470년(성종원년) 함양군수로 부임했을 때 문하에 학도가 운집하여, 김굉피리, 정여창, 조위, 남효은, 유호인, 김일손 등 많은 후임을 배출하였고, 이들은 의리와 절의를 숭상하여 성리학의 발전과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정계에 진출해서는 훈구세력과 대립하여 사림파를 형성하였다. 

 그 외에도 선생은 홍문관, 예문관, 제학, 경기도, 전라도 관찰사, 형조판서 등 중요직책을 역임하였고, 1489년(성종20)밀양으로 낙향하여, 학문과 후학 지도에 전념하다가 1492년(성종23) 8월 19일에 명발와에서 돌아가셨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로 부관참시되었다가 1507년(중종2)에 중종반정으로 벼슬과 시호 등이 복권되었다. 1689(숙종15)영의정에 증직되고, 1708년(숙종34)'문간'에서 '문충'으로 시호가 고쳐졌다. 저서로는 점필재집, 유두유록, 청구풍아, 오경석의, 동문수, 동국여지승람 등이 있으며 무오사화로 인하여 많은 문헌이 소실되고 약 1,200여편의 시가 전해지고 있다. 밀양의 예림서원을 비롯하여 구미의 금오, 함양의 백연, 김천의 경렴, 덕림서원 등 8곳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