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reading/책읽기

"여행자의 인문학", 언젠가는 BK를 만나고 싶다.

노코미스 2019. 1. 12. 13:41





저자: 문갑식(2016)



1. 폭풍의 언덕에서 브론테 자매를 찾다.


에밀리 브론테의 걸작 <폭풍의 언덕>의 무대인 하워스.

폭풍의 언덕 근처에 도착한 시간이 저녁 9시 무렵이었지만, 폭풍의 언덕 워더링 하이츠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고

고원은 그 시간까지 훤했지만 인적드문 고원에는 바람만 미친듯 불고 있었다. 


현지에선 워더링하이츠를 '톱 위덴스top withens'라 부른다.

톱 위덴스에는 '워더링 하이츠'라는 작은 호텔을 제외하면 주변에 '워더링'이라는 단어조차 없다.


에밀리 브론테는 소설에서 폭풍의 언덕을 이렇게 묘사하나디.

"영국 전체를 통틀어 봐도 세상과 이토록 동떨어져 있는 집은 찾기 어려우리라. 그런 뜻에서본다면 히스클리프와 나는 이곳에서 외로움을 나누기에 가장 적당한 사람들인지 모른다"


위덴스 표지판에서 정상을 향해 올라가다보면 1964년 '브론테 소사이어티'라는 단체에서 세웠다는 <폭풍의 언덕>세트장이 나온다.

그리고 정상을 향해 더 올라가면 바람에 고개숙인채 흩날리고 있는 히스꽃과 잡초외에 아무것도 없는 무림고원이 펼쳐진다.


브론테 남매의 아버지 패트릭이 하워스로 온 것은 1820년이엇다. 이듬해부터 이 가족에겐 비극이 닥친다. 먼저 어머니 마리아 브론테가 1821년 여성아이를 남기고 세상을 뜬다. 마리아, 엘리자베스, 샬럿, 브란웰(아들), 에밀리, 앤.

1824년 네자매는 막내 앤만을 남기고 클러지 도터스 기숙학학교에 들어간다. 샬럿은 여기에서의 경험을 <제인에어>에 나오는 로우드 기숙학교로 살려낸다.

기숙학교에 들어간 지 1년만에 마리아와 엘리자베스가 병에 걸려 집으로 돌아오지만 곧 숨지고 샬럿과 에밀리 역시 뒤따라 귀향한다. 에밀리 일가는 아버지를 제외하곤 모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다.

1848년 외아들 브란웰, 같은 해 12월 <폭풍의 언덕>작가인 에밀리, 1849년 5월엔 앤이 세상을 뜬다.

마지막까지 남은 샬럿과 아버지는 고집스럽게 하워스 사제관을 떠나지 않고 머물지만 샬럿도 1855년 임신한 상태에서 결혼한지 1년도 되지 않아 서른 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패트릭은 아내와 자식 6명, 심지어 아내 대신 집안일을 돌보던 처제까지 일찍 떠나보냈지만 자신은 84까지 장수했다. 한낮에도 어두컴컴하고 습기만은 사제관 주변을 보면 브론테 일가의 불행은 폐결핵 같은 질환뿐 아니라 교회 공동묘지 바로옆에 있는 집터에도 문제가 있어보인다.


그러나, 불운이라고 말할수 밖에없는 운명속에서도 브론테 자매는 <제인에어>(샬롯), <폭풍의 언덕>(에밀리), <아그네스 그레이>(앤>같은 명작을 남긴다. 그 중에서도,문학사상 사랑과 배신과 실연과 증오와 연민, 그리고 동정과 질투와 복수와 회한처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을 한 편에 총망라한 소설은 <폭풍의 언덕>외에는 찾을 수 없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다.


<폭풍의 언덕>주인공들의  광기어린 사랑의 무대로 하워스는 완벽하기 짝이 없다. 사방이 고립되고 인구가 6,000명에 불과한 마을, 거기서도 외딴 산속에 위치한 집과 그 위로 펼쳐잰 평원이야말로 모든 것을 불사르기에 적당한 공간으로 보인다.  사랑의 정열과 차가은 증오를 비롯해 자기 자신의 생명까지도.


하워스의 폭풍의 언덕을 찾은 작가 이문열은 다음과 같은 묘사를 남겼다.

"폭풍우 내리치는 하워스에서, 나는 끝 모를 사막 한가운데 홀로 섰을 때처럼, 높은 바위산 한가운데서 갑자기 뚫린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처럼, 인간으로부터의 한없는 격리를 느꼈다."


2. '사랑학'의 원조, 제인 오스틴을 찾아.


제인 오스틴이 살았던 햄프셔 주의 초턴은 작은 시골마을로

옥스퍼드에서 가려면 기차로 윈체스터까지 간 뒤 버스로 갈아타고 40분을 더 가야 한다. 초턴에 있는 그녀의 생가는 약 200평 정도 되는 주택인데 침실과 당시 의상을 소박하게 전시해놓은 공간, 오스틴의 가계도, 책상이 띄엄뛰엄 놓여있을 뿐이어서, 이곳에서 볼거리를 찾는다면 적잖이 실망을 하게 될 것이다. 많은 방문객들이 '볼게없다'며 투덜대는 곳이다.  


<오만과 편견>을 쓴 제인 오스틴은 1775년에 태어나 1817년에 사망한다. 마흔두해의 짧은 생애였지만 오스틴이 문학사에 차지하는 비중은 작지 않다. 그녀는 <오만과 편견>외에 <이성과 감성>, <맨스필드 파크>, <엠마> 등의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오만과 편견>은 18세기 영국을 무대로 남녀의 밀당을 다룬 연애소설이다. 단순한 연애소설같지만 <오만과 편견>에는 살펴볼 부분이 많은 소설이다. 사랑의 환상을 그리면서도 당대의 현실을 철저히 반영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젠트리gentry라 불리던 중소 지주 계급의 생활상, 당시 사람들의 연애관, 결혼풍속도 등이 숨은 그림처럼 묘사되어 있다. 젠틀맨의 원형인 젠트리는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신사'와는 거리가 멀었고, 이해와 타산을 따지기에 급급한 계급이었다.


오스틴이 본격적인 소설집필 활동을 시작한 것은 1789년부터라고 하는데, 그 시기는 도버 해협 건너에서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당시 영국사회의 관심은 온통 '계급'가 '재산'에 쏠려있었다. 당시 연국은 아버지의 재산을 딸들이 상속받지 못했고, 아들이 없으면 남자 친척들이 재산을 차지했다. 따라서 여성의 지위는 남편에 따라 좌우되었다. 그러니 여자의 관심은 온통 '높은계급의 재산많은 남자'에게 쏠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소설속에서 속물근성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엘리자베스의 어머니 미세스 베넷이 그 시대의 진짜 주인공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무도 다루지 못했던 당시의 실상을 적나라하게묘사함으로써 오스틴은 다른 소설가들을 불편하게 했고, <톰소여의 모험>을 쓴 미국자가가 마크 트웨인은 오스틴을 유행을 따르는 '세태 작가'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연애에 대한 세밀화를 그릴 정도엿던 오스틴은 정작 자신은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보냈으며, 죽을 때까지 형제나 친척이나 친구의 집을 전정했다고 한다.


3.호수에 드리워진 위대한 사랑의 밀어, 워즈워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맞닿은, 서쪽 중간 패인 곳 내륙에 '더 레이크'라는 지방이있다.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면 '레이크 디스트릭트'라는 팻말이 나온다. 이 지역은 <론리 플레닛>에서 '잉글랜드에서 걷기의 심장와 영혼이 있다면 그곳은 바로 레이크 디스트릭트'라고 소개하는 곳이다.

동서 50킬로미터 남북 40킬로미터의 넓이에, 윈디미어를 비롯한 16개의 호수가 깊은 계곡과 높은 산에 둘러싸여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이곳은 워즈워스, 키츠, 셸리, 러스킨 등에게 문학적 영감을 주어 불멸의 작품을 낳게 한 것으로 더 유명하다.


워즈워스의 대표적인 시 <수선화>는 동생 도로시와 이곳 호수인 얼스워터ullsater를 걸으며 지은 명작이다. 워즈워스는 여행할 때를 제외하고는 평생을 이곳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 보냈다.


워즈워스는 1770년 코커머스cockermouth에서 변호사 아버지 존 워즈워스의 다섯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지만 어려서 부모를 잃는다. 이후로 큰 아버지 밑에서 고독한 소년기를 보낸다. 그는 큰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1787년 케임브리지 대학 세인트 존스 칼리지를 졸업하고 1791년 프랑스로 갔다가 혁명의 열기가 타오르던 프랑스를 경험한 뒤 1792년 영국으로 돌아온다.

1799년 생가 코커머스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인 그래스미어의 도브 코티지 dove cottage라는 곳에 정착한다. 이곳에서 워즈워스는 1802년 동생 도로시의 친구였던 메리 허친슨과 결혼해 자식 셋을 낳는다. 이곳은 뒤에는 산, 앞에는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조용한 시골 마을이다. 워즈워스의 대표작들은 대부분 여기서 쓰여졌다.

다시 워즈워스는 1813년 도브 코티지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인 라이달 마운트rydal mount에 정착한다. 라이달 마운트는 말 그대로 야트마한 언덕위에 있이다. 1850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37년을 산 곳이어서, 13년을 살았던 고향 코커머스나 8년을 살았던 도브 코티지보다 워즈워스의 체취가 물씬 풍긴다.


라이달 마운트에서 고속도로로 향하는 길에 '엠블사이드'라는 호수를 끼고 있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자그마한 B&B들과 아기자기한 상점과 음식점, 호텔이 모여있다. 화이트 라이온 호텔 펍에서 피시앤칩스에 맥주한잔 곁들여 보는 것도 괜찮다.


4. <피터 래빗>시리즈의 베아트릭스 포터


 베아트릭스가 유명해진 것은 <피터 래빗>이라는 동화때문만이 아니라, 그녀가 동화출판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레이크 디스트릭트 지역의 땅을 사들여(500만평) 그것을 고스란히 내셔널 트러스트에 기증했기 때문이다. 유일한 조건은 "자연 그대로 이 땅을 잘 보존해달라"

내셔널 트러스트는 포터가 남긴유언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고, 덕분에 우리는 300년 전의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녀의 사후 3년 뒤인 1946년부터 공개된 힐탑hill top의 저택은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가 되었다.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 가가운 호크헤더 hawkhead라는 작은 마을은 베아트릭스 포터 때문에생계를 유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앰블사이드에는 <피터 래빗>과 관련된 작은 도서관도 있다.



5. 셜록홈스가 있는 런던 베이커 가 221B번지를 찾아서


영국에는 유명한 탐정이 많다. 작고 땅딸막한 체구에 커다란 챙의 모자, 우중충한 날씨를 못 미더워하는 우산, G.K.체스터튼은 뒷모습의 실루엣만으로도 모두를 흥분시키는 탐정, 브라운 신부를 탄생시켰다. 체스터튼의 소설에는 스트렛퍼드 역, 리버풀 가, 투프넬 공원, 런던 북쪽의 녹지 햄스테드 히스 등이 무대로 나온다.

아가사 크리스티 또한 영국의 탐정소설 작가로 빼놓을 수 없다. 그녀의 소설에서 가장 대표적인 주인공은 전직 벨기에 경찰 에르퀼 푸아로. 그는 런던 차터하우스 스퀘어에 있는 플로린 코트(1936년에 지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그렇지만 브라운 신부와 푸아로 탐정도 셜럭 홈즈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셜록 홈즈와 왓슨 박사의 관계는 <주홍색 연구>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런던의 살인적인 물가와 각자의 허전한 주머니 사정때문에 하우스 메이트가 된다. 런던 베이커 가 221B 번지에서.


셜록 홈즈의 작가 코난 도일conan doyle은 영국 작가 가운데 특이하게도 런던에서 거의 살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는 대부분의 생애를 고향인 스코틀렌드에서 보냈가. 그는 1859년 5월 22일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 아홉자녀중 둘째로 어렸을 적에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다한다. 

코넌 도일은 예수회 계열의 학교에 다니다가 1876년에 에든버러 의대에 들어가 1881년 졸업한다. 그는 의학공부를 하면서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안해본 일이 없었다. 몇차례 병원도 개업했지만 동업이 깨지거나 환자가 사망하면서 이사로서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다행스러운 것은그러면서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1879년부터 1887년까지 단편 30편을 집필했다.

코넌 도일의 삶이 바뀐것은 39세때 조지프 벨이라는 의학박사를 만난 뒤부터이다. 그는 동료의사들이 놀랄 만큼 관찰력이 뛰어났고 거기서 얻은 단서들로 연역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코넌 도일은 조지프 벨의 조수로 지내며 그의 능력을 마음껏 익히고, 그 때의 경험이 훗날 셜록 홈즈의 바탕이 된다.


코넌도일이 작가로서 명성을 확립한 것은 언제일까?

1886년 출판된 <주홍색 연구>로 받은 돈은 겨우 25파운드였지만, 1891년 <보헤미아 왕실 스캔들>과 <빨간머리 연맹>이후로는 본격적으로 성공가도를 걷기 시작했다. 1892년 6월까지 열두편의 단편을 발표하고 그것을 모두 묶어 <셜록 홈즈의 모험>이라는 단행본으로 낸다.

193년 12월 코넌 도일이 <마지막 문제>를 발표하고 셜록 홈즈가 사망한 것이 밝혀지자 영국 전체가 들썩거렸다. 젊은이들은 애도의 표시로 모자에 검정 리본을 달거나 완장을 차고 다녔고, 독자들은 코넌 도일을 비난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햇다.

셜록 홈즈 때문에 톡톡히 재미를 보았던 <스트랜드 메거진>도 2만 명이 정기구독을 취소하여 타격을 입기도 했다.


그런데 코넌 도일이 소설속에서 셜록 홈즈가 사는 곳을 '베이커가 221B번지'로 설정했는데, 실제로 베이커 가에는 이런 번지수가 없다. 그러나 열혈 팬들은 홈스가 그곳에 살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고, 위에서 언급했엇던 항의 편지들도 이 주소로 쇄도했다고 한다. 그래서 홈스에게 보내져오는 팬레터나 사건을 의뢰하는 편지는 소설속 주소와 가장 가까운 애비 내셔널 뱅크Abbey national bank로 보내졌는데, 지금은 바로 이 거리 북쪽에 있는 셜록 홈즈 박물관으로 전달된다고 한다.



6. 크리스마스가 되면 생각나는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찰스 디킨스, 본명 찰스 존 허펌 디킨스 charles john huffam dickens의 대표작은 <크리스마스 캐럴>이다. 1843년 12월 17일 이 작품을 쓴 이후, 디킨스는 5년 연속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발표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구두쇠 스쿠루지 이다.


스크루지는 구두쇠screw와 사기꾼gouge의 합성어이다.

평론가들에 따르면, 이 단편의원형은 서양 민담에 나오는 악귀 '교회지기를 홀린 고블린'인데 <아라비안 나이트>의 영향도 받앗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캐럴>의 서양적 가치는 서양에서 잊혀가던 크리스마스의 전통이 이 소설 한편으로 되살아났다는 데있다. 계관시인 로드 제프리는 디킨스에게 이런 감사편지까지 썻단다 "신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사람들에게 선한 감정을 일으키고 행동으로 옮기게 한 이 소설은 어느 기독교 성직자나 설교자의 말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서양에서 왜 크리스마스가 잊혀져 갔을까요? 시대 상황때문이었다.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기전까지 영국은 '경제적 궁핍과 사회적 불안이 널리 퍼져 있던 시대', 즉 고통의 계절이었다. 빅토리아 여왕 즉위후, 이러한 상황을 식민지 개척을 통한 세력팽창으로 타개하려된 순간, 디킨스가 이 소설을 내 놓았다. 이 글로 사람들이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를 반성하며 미래를 바꿔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갖도록 햇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시대분위기를 바꾸어놓자 신문 <픽토리얼 타임스>에서는 소설이 나온 지 6일 후인 1843년 12월 23일에 다음과 같은 사설이 등장한다. '추운 오두막에서 초라한 식탁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과 노숙자를 생각하자'


<크리스마스 캐럴>외에도 디킨스의 작품중에는 사회성 짙은 것들이 많다. <두도시 이야기>, <위대한 유산>, <데이비드 코스필드>, <올리버 트위스트>, <니콜라스 니클비>등이 그렇다.


영국의 군항 포츠머스에서 해군 경리국 하급 공무원의 여덟 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디킨스는 열살 때 런던으로 이사온다. 어버지의 빚때문에 디킨스는 어릴 적부터 고생을 하였고, 12세 때 구두약 공장 견습공으로 취직해 하루 열시간씩일할 정도엿다. 이런 경험이 나중에 그가 노동자의 편이 되어 사회성 짙은 소설을 쓰게 하는 밑거름이 된다. 그의 자전적 소설인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중산층에 속한다고 믿엇던 어린이 찰스가 노동자로 전락해 느끼는 좌절감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그의 등단작품은 1834년 '보즈'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보즈의 스케치>이지만, 대표작은 <올리버 트위스트>이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주인공은 고전문학을 통틀어 가장 순수하고맑은 영혼을 가진 아이로 꼽힌다. 이 작품이 오랫동안 사랑을 받는 이유는 보편적인 권선징악과 인과응보의 플롯때문이다.


디킨스는 가정적으로는 별로 ㅎㅇ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20년 이상 함께 지내왔고 열명의 자녀를 낳은 아내 캐서린 호가스와 별거상태로 지냈다고 한다. 문제가 된 점은 아내가 집을 나간 후 처제 조지나 호가스가 조카들을 돌본다는 명목으로 디킨스의 집에머물게 된 것인데, 조지나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평생 디킨스의 집안을 돌봤지만, 체면을 중시한 빅토리아 시대에서 이것은 커다란 스캔들이나 다름 없었다.


성경과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로 많은 독자들을 가지고 있다는 찰스 디킨스의 흔적은 영국에 다섯 군데가 있는데, 고향 포츠머스와 어린시절을 보낸 로체스터, 44세때 구입한 하이햄의 갯즈 힐 저택, 바닷가 마을 브로드 스테어즈, 그리고 가장 유명한 곳이 런던 다우티가 48번지 주택이다. 1837년부터 3년간 살았던 그 집에서 <올리버 트위스트>, <니콜라스 니클비>를 썻는데, 아직도 그가 쓰던 책상이며 펜 같은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곳은  셜록 홈즈 박물관과는 인근에 있다.


디킨스는 결말이 뻔한 통속 소설을 쓴다는 비판도 있지만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카프카 등 세계적인 문호들은 그를 옹호했다. 밀란 쿤데라는 '디킨스 소설의 유머는 껍질에 불과하며 감정이 넘쳐 흐르는 문제로 냉혹함을 가렸을 뿐'이라 하며 디킨스에 대한 비판을 반박하기도 한다.


7. 루이스 캐럴이 사랑했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영국의 유서깊은 옥스퍼드 대학이 배출한 세계 3대 작가가 있다. <반지의 제왕>을 쓴 J.R. R. 톨킨 <나니아 연대기>를 쓴 작가 C.S.루이스, 그리고 '루이스 캐럴'이라는 필명으로 알려진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 charles letwidge dodgson.이다.


루이스 캐럴의 대표작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이다. 캐럴이 동화를 쓰게 된 계기는 옥스포드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교수로 재임하던 시절 헨리 리델 학장과의 인연때문이다. 리델의집에서 하숙하던 캐럴은 아이들과 어울리던 중 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캐럴은 1862년 7월 4일 리델의 딸인 로리나, 앨리스, 에스디, 동료교수 로빈슨덕워스와 함게 이시스 강으로놀러가는데, 이 때 강에 함께 간 사람들을 위해 그들을 등장인물로 한 이야기를만든다. 앨리스 외에 로리나는 앵무새, 에스대는 독수리, 덕워스는 오리, 캐럴은 도도새가 된다.

캐럴은 뱃놀이를 하면서 아이들과 지은 이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고 1862년 11월부터 작업을 시작하고 줄거리를 다듬었다. 그리고 1864년 11월 26일 손수 삽화를 그린 <앨리스의 땅속 모험>을 가장 아끼던 앨리스 리델에게 선물한다. 기록에 따르면 앨리스에게 ㅜㄴ 책은 1만 5,500개 단어로 구성되었지만, 정식 출간본은 2만 7,500개 단어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캐럴은 문학가이자 수학자인 동시에 사진가이기도 하다. 캐럴의 사진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는 무척 긍정적이다. 그는 동시대의 여성사진가였던 줄리아 마거릿 캐머런과 함께 19세기를 대표하는 사진작가로 꼽힌다. 여러 분야에서 재능을 보인 캐럴은 옥스퍼드 대학에서 유명인들과 교분을 나누며 지내다 65세 때 기관지염체 걸려 세상을 뜬다.


옥스퍼드에는 캐럴과 관련된 장소들이 많이 남아있다. 제일 많은 곳은 역시 크라이스트 처치이다. 그곳은 캐럴의 집이자 직장이었는데,그가 머물렀던 곳은 대학의 북서쪽 모서리의 '톰 쿼드'라는 곳이며 리델 일가는 북동쪽에 살았다.

크라이스트 처치 앞마당에도 이들의 추억이 서려 있다. 웅장한 호두나무 근처에서 자주 크리켓 놀이를 한 것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후반부에서 홍학 크리켓 경기장면으로 구현되었고, 앨리스의 고양이 '다이너'가 그 모습을 보며 꾸벅꾸벅 졸았다는 도서관 사서의 기록도 남아있다.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를 퐐영한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의 식당에도 캐럴의 흔적이 남아있다. 왼쪽에서 다섯번째 창 스테인드 글라스에는 앨리스의 얼굴과 이야기에 나오는 캐릭터들이 잇는데 관광객들이 그걸 찾는 광경도 재밌다.

클라이스트 처치 정문 맞은편에는 '앨리스 숍'이 있는데, 이 상점은 실제로 앨리스가 사탕을 사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과련된 기념품 들로 가득하다.


8. '반지의 제왕' 톨킨을 찾아 옥스퍼드 골목으로


존 로널드 루엘 톨킨 J.R.R.Tolkien의 <반지의 제왕>은 영국의 <더 타임즈>가 '20세기 영미문학의 10대 걸작'으로 선정했다. '영어권 사회는 <반지의 제왕'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기독교 인이 성서를 읽지 않은 건 용서받을 수 있어도 판타지 독자가 <반지의 제왕>을 읽지 않은 건 구제의 여지가 없다'라는 말도 유명하다. '판타지소설의 바이블' '20세기 판타지 소설의 새 장을 연 소설'등의 찬사도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옥스퍼드 대학이배출한 많은 작가 가운데 가장 흔적이 뚜렷한 이가 톨킨다. 톨킨의 숨결이 특히 짙게 배인 곳은 액세터 칼리지.펨브로크 칼리지.모들린 칼리지.머튼 칼리지 네 곳이다. 이 칼리지들은 옥스퍼드 중심가에 흩어져 있다.

고색창연한 옥스퍼드의 도서관들에서도 그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중앙도서관인 애쉬몰리안 도서관의 전신인 올드 애쉬몰리안 빌딩은 옥스퍼드에서 가장  오래된 블랙웰 서정 바로 위에 있고, 하버드 대학이 이름을 따간 원형 건물 '래드클리프 카메라'에도 톨킨의 흔적이 숨어있다.

세인트존스 스트리트, 노스무어 로드, 애시슨 워크는 그가 아내와 함께 살앗던 집들과 산책로의 이름이다. '피누스 니그라'는 옥스퍼드 외곽의 야트마한 야산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로, 톨킨이 평생 '저 나무가 바로 나'라고 했던 나무이다.

옥스퍼드 시는 톨킨의 사후, 이 위대한 작가를 기려 두 그루의 나무를 시는데, 그것이 '두 그루의 나무'로 톨킨의 자취를 좇는 수많은 추종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톨킨은 1892년 1월 3일,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블룸폰테인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영국으로 와 옥스퍼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고, 1925년부터1959년까지 옥스퍼드 대학 교수로 일했다.

어린 톨킨의 자취는 옥스퍼드 북쪽 버밍엄에서 찾을 수 있다. 호수처럼 잔잔한 물결이 흐르는 콜 강 근ㅂ아의 셰어홀 방앗간 부근이 톨킨이 살던 곳이었다.


9. 인도와도 안 바꾼 셰익스피어의 자취를 찾아


코츠월드에는 영국의 역사가 살아숨쉬고 있는 곳이다. 첼트넘에서 승용차로20분 거리에 거의 허물어진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 서들리 성은 영국에서 가장 성격이 고약하기로 유명하면서도 국민들이 좋아한다는 헨리 8세의이야기가 얽힌 곳이다.

이 서들리 성에서 가까운거리에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이 있다. 옥스퍼드에서도 4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지역이다. 이곳은 '에이번 강가의 스트랫퍼드'라는 뜻이며스트랫퍼드는 로마인이 만든 도시이다.

1550년에 존 셰익스피어라는 사람이 이사를 온다. 그의 아버지 리처드 셰익스피어는 이웃마을 스니터필드의 부유한 농민이엇다. 존 셰익스피어는 '장갑'으로 떼돈을 벌어 1556년 집을 두 채나 사들였고 1568년에 읍장이 된다. 1564년에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존의 여덟번째 남매 중 셋째이자 첫아들로 태어난 다.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스트랫퍼드어폰에이반은 셰익스피어의, 셰익스피어를 위한, 셰익스피어에 의한 도시이다. 원래 이 도시는 상업도시로 알려졌지만 지금은 박물관이 된 그의 생가, 나이 들어서 6년을 보낸 집, 아내 해서웨이와 함게 묻힌 묘지가 제일 유명하다. 스트랫퍼드 시 당국은 셰익스피어의 형제자매 집까지 관광코스로 만들었다.


10. 영원한 자유인 오스카 와일드의 더블린


오스카 와일드는 1854년 10월 16일 저명한 의사였던 아버지 윌리엄 로버트 와일드와 시인이었던 어머니 제인 프란체스카 엘지 와일드의 차남으로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태어난다. 오스카 와일드는 1871년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입학 해 형 윌리와 함께 같은 방을 쓰며 그리스 문화에 심취한다. 3년뒤 오스카는 옥스퍼드 대학의 모들린 칼리지로 간다.

옥스퍼드 대학 시절 그에게 영향을 준 교수가 셋 있다. 존 러스킨과 월터 페이터, 1877년 함께 그리스를 여행했던 매허피 교수이다. 그리스에서 받은 감동 때문인지 이 때부터 와일드는 '유미주의'적 예술관을 견디한다 178년 이탈리아의 도시 라벤나를 찬미하는 시 <라벤나>로 뉴디기트 문학상을 탄 뒤부터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오스카 와일드가 살던 빅토리아 말기 중산층 의삭은검은색 양복 일색이었으나, 오스카 와일드는 화려한 색깔의 옷을 좋아했고 단추구멍에는 녹색 카네이션을 꽂았으며 벨벳 재킷과 짧은 바지, 검은 비단 양말을 착용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의상 못지않게 말솜씨도 화려했다고 한다. 시인 예이츠는 '일상대화에서 그렇게 완벽한 문장을 구사하는 사람은 처음봤다'면서 '밤새 열심히 써서 준비한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그게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다'라고 감탄했다. 오스카 와일드는 재치있는 표현을 구사하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타고난 총명함과 재치있는 언어감각으로 오스카 와일드는 1881년 첫 시집 제목을 <시집>이라 하고 이후 미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유미주의 강연을 한다. 1886년까지 유미주의 강연과 각종 잡지에 에세이를 발표하던 오스카 와일드는 이후 <켄터빌의 유령> <아서 새빌 경의 범죄> <행복한 왕자>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등을 발표하면서 작가로서 전성기를 맞는다.



11. 팩션의 대가 댄 브라운과 로슬린 예배당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는 템플기사단이 소설의 골격을 이루고 있으며, 사건은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전시실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다른 주요 무대로 영국 런던의 템플 교회와 웨스트 민스터 사원, 에든버러 근교에 있는 로슬린 예배당이 등장한다.


런던의 한복판에 있는 템플교회는 지금도 신비한 존재이다. 템스강 북쪽에 템플 스트리트가 있으며 영국대법원 맞은편이 템플 교회이다. 교회 입구에 '출입하려면 교회 멈버와 동행하라'는 문구가 있다. 템플기사단 영국 지부가 1185년 예루살렘 대주교의 축성을 받아 지었고 기사단 의 입문 의식이 교회 지하에서 행해졌다는데, 그 비밀스러움이 살아난다. 템플기사단 탄압 후 다른 기사단 소속으로 넘어가고 부지 일부가 변호사들에게 불하되었는데, 제임스 1세가 '영원히 교회를 현재의 상태로 보존하라'는 명령을 내려 지금같은 모습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템플 교회는 1800년대에 세 차례 복원되었고, 제 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에는 독일군 공습을 받아 1947년 건축가 월트 고드피리가 복원한다. 이 때 1666년 대화재 이후 제작된 나무 실내 장식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수도원 중의 수도원'이라는 의미로 ' the Abbey' 로 불리는 웨스트 민스터 사원은 11세기 '참회왕' 에드어드가 세운 성 베드로 성당이 모체이다. 13세기 헨리 3세의 지시로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고딕양식으로 완성된다.

이곳은 정복왕 윌리엄부터 엘리자베스 2세까지 역대 왕의 대관식 장소로 쓰였으며 내부에 처칠,뉴턴, 헨델, 셰익스피어, 윌리엄 워즈워스 같은 위인들의 묘비와 기념비가 가득한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에딘버러 남쪽 11킬로미터에 위치한 로슬린 예배당은 신비롭기 그지없는 모습인데, 1446년 스코틀랜드 명문가 오크니 백작 3세 윌리엄 싱클레어가 짓기 시작했다. 템플 기사단의 후예로 알려진 프리메이슨 석공들이 장식한 내부는 사잉들로 가득하다. 곷, 포도, 천사, 성서 속 인물과 이교도 '그린맨'의 형상, 프리메이슨과 템플기사단의 이미지까지 있다. 13인의 천사 음악가와 213개의 입방체로 인해 이곳은 일찍부터'천사의 암호' 혹은 '암호의 채플'로 불렸는데 그 중에서도 레이디 채플은 여인 막달라 마리아를 상징하는 사선으로 휘감긴 기둥이다. 소설에서는 '고대 로슬린 아래에 성배는 기다리노라'라는 암호에 따라 예배당 지하에 막달라 마리아의 무덤이 있을 것이라는 것으로 설정되지만 현실은 소설과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