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주변을 왔다갔다 하면서도 '관동리 유적 모형관'이 있다는 건 알지못했다. 홍보도 제대로 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도로변에서 한 쪽으로 들어가 있어서 나처럼 오로지 앞만보고 다니는 사람은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위치는 '롯데 프리미엄 아울렛'에서 관동리로 들어오는 입구 '시민체육공원'입구에 있다. 옆으로는 서부산으로 향하는 남해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관동 유적 모형관'을 보면서 잠시 '율하 유적 전시관'과 혼동했다. '전시관'은 무엇이고 '모형관'은 무엇이야?? 그러나 알고 봤더니,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율하 유적'이고, 이것은 '관동 유적'이라..
약도상 ④, ⑤번 위치에 '관동 유적 모형관'과 '야외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별 생각없이 들렀던 이 전시관에서 새로운 사실 3가지를 알게 되면서,내 정체성의 폭이 1mm정도 확장된 것 같다.(참고로 ①, ②는 율하유적 전시관과 유적공원이다.)
첫번째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이번 택지개발 과정에서 발굴된 유적들에 의하면 삼국시대에는 '반룡산 아래 관동리 입구 '화촌'까지 해안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자료에 대한 디테일을 보완하기 위하여 자료를 찾다보니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이라는 재미있는 블로그가 있다. 그 블로그에 의하면 2002년과 2003년에 발견된 '김해 봉황대 유적'에서 이미 김해의 항구관련 자료들이 출토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관동리 유적'은 김해봉황대 유적에 이어 좀 더 확실한 자료들이 출토됨으로서 김해 봉황대에서 관동리에 이어지는 古 김해만이 해상왕국이었던 가락국의 중요한 항구였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단순히 항구도시였던 것이 아니라, 이 지역이 오늘날 홍콩, 싱가포르, 상하이, 나가사키 등이 중개무역항역할을 하듯이 그 당시 금관가야로 지칭되는 가락국이 중국과 일본열도를 연결하는 유일무이한 국제적인 중개무역항이었다고 하니 대단한 역사이다. 이제, 과거 우리세대가 배워왔던 잘못된 역사 즉,'가야왕국이 번창했던 이유는 기름진 김해평야 때문'이었다는 가설은 대대적으로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
'삼국시대의 지형'으로 추정되는 모형이다. 너무나 신기해서 모형도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옆에 있던 중년남성분이 '본인은 이동네에서 500여년을 살아 온 사람'이라고 소개하면서 윗세대 어른들 말씀에 의하면 500여년 전만 해도 이 해안선이 여기까지 들어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저 반룡산 중턱쯤에 가면 '조개무지'가 아직도 남아있단다.
기록에도 표고 2-300m 산 중턱에 거주지가 있었다고 하니, 아마도 산기슭에서 움막을 짓고 살던 사람들이 해안까지 내려와서 조개를 잡아다 삶아 먹은 흔적이리라..그러나 500년 전이란 말은 신빙성이 조금..??
어쨋거나, 사람들의 생활용품들을 살펴보면 1000-1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변화된 것이 없어보이건만, 변경된 지형을 보면 1000-2000년이란 세월이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닌 모양이다.
이 지역에 해안이 있었다고 짐작하는 것은 사람이나 화물을 배에서 내리기 위하여 해안가에 설치하는 선착장역할을 하는 '잔교'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라는데..
그것을 떠나서, 패널에 '삼국시대의 선착장'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이영식 교수의 설명에 의하자면 이 선착장과 이 지역의 유적은 '가락국의 선착장'이 옳은 것 같다. 가락국은 우리 역사에서 신라, 백제, 고구려와 어떤 한 시대를 공유했던 엄연한 독립국이었고, 김해만은 가락국 소속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림에 나타난 부두접안시설이나 잔교설치등은 가락국의 축조기술이라는 것이다. 이 기회에 우리 고대 역사에 대해 좀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번더 강하게 하게 된다
'잔교'의 모형. 이런 접안시설의 기초공사는 돌이 아닌 나무가 사용되었다고 하는데..이런 것 조차도 그 당시 이 지역의 지형적 특성에 따라 습지에 가라앉을 가능성이 높은 돌보다는 나무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가야인의 건축학적 지혜가 엿보이는 축조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잔교'흔적이 있었던 곳에 '잔교'를 복원해두고 있다. 모형관 뒷편 '시민 체육공원'에 조성되어 있다
잔교 아래쪽으로 곡선으로 표시된 안쪽이 삼국시대의 '해안선', 왼편 윗쪽으로 장유에서 서부산으로 연결되는 고속도로가 뻗어있다. 격세지감을 아니 느낄 수가 없다.
해안선 바로 앞에 이런 거주지 흔적이 남아있다. 낮은 기둥은 '지면식 가옥, 높은 기둥은 '고상식 건물'의 자리이다. 원래 삼국시대의 집은 크게 움집과 고상식 가옥형태로 나타나는데 '관동유적'에서는 특이하게도 '지면식 가옥'이 나타난 것이 특징적이란다(아래 설명 참고).
'지면식 가옥'과 '고상식 가옥'의 모형이다. 일반적으로 움맘이나 지면식 가옥은 사람이 생활하는 거주가옥이고, 고상식 건물은 곡식을 쌓아두는 창고기능을 하는 건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해만 해안 근처에 고상식 건물이 몇 채가 있었다고 한다.
이 가옥양식은 관동리 덕정공원에 잘 복원이 되어 있어서 삼국시대의 가옥양식에 대한 이해를 확대할 수 있다. 삼국시대의 특이한 가옥양식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이 관동유적을 통해 얻게 된 두번째 수확이다.
세번째는 이 유적에서 밝혀진 것은 항만을 끼고 창고형 건물 흔적, 우물이 있는 마을과 고분군 그리고 그 배후로 관통하는 간선도로의 흔적까지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이 지형도를 보면 위쪽이 '반룡산'이고 이 산 자락 아래까지 해안선이 들어와 있다. 그리고 이 해안선 주변에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고, 주거지를 중심으로 중심도로와 간선도로가 있었던 흔적이 있는데..
이 도로를 보니 현재 우리가 신문리에서 '화촌'쪽으로 들어오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는 '반룡산 둘레길'로 보인다. 결국, 길이란 처음부터 길이난 길로 길이 나나보다. 1000년 2000년전 우리 조상들이 다녔던 그 길로 오늘날 우리가 같이 걸어가고 있다는 점이 신기하기 그지 없다. 단지, 옛길에 새로운 길을 내기 위하여 시대별로 포장만 겹겹이 덧쒸웠을 뿐이다.
게다가 이 설명서에 의하면, 이 시기에 조성된 '간선도로'와 '지선도로'가 자연스럽게 난 오솔길이 아니라 '일부러 조성한 도로'라는 점에서 더욱더 놀라웁다.
폭 6m정도의 '간선도로'는, 일부러 아래쪽으로 돌을 깔고 그 위에 진흙을 다져 노면을 만들고 도로 양측에 배수를 위한 도랑을 설치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과학적인 축조기술을 갖추고 있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발굴된 흔적에 의하면 도로 중간중간 수레바퀴에 의해서 패인 자국들이 남아있고, 어느지점에서 도로를 가로질러 도로 아래쪽으로 배수구를 만들어 지형이 낮은쪽으로 물이 빠져 내리도록 만들어 놓고 있다.
이런 축조기술은 조선시대의 도로축조기술보다 훨씬 앞선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니, 삼국시대 특히, 영남지역을 거점으로 발달된 가야시대의 여러가지 토목 또는 건축 기술들을 볼 수 있어서 의미있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건축기술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과학적이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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