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reading/영화읽기

바흐 이전의 침묵

노코미스 2011. 1. 19. 18:43

 

 


바흐 이전의 침묵 (2010)

The Silence before Bach 
7.7
감독
페레 포르타베야
출연
알렉스 브렌데뮬, 페도르 아킨, 크리스티앙 브렘베크, 조르지나 카르도나, 다니엘 리고리오
정보
뮤지컬, 드라마 | 스페인 | 102 분 | 2010-10-21

 

 

우연히 검색을 하다가 발견하게 된 '바흐 이전의 침묵'

 

'바흐'

음악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긴 하지만

지지난해 여름 튀링겐의 아이젠아흐에서 만났던 그를 이곳에서 만나게 되니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상영관을 찾아보니 '부산 국도 예술관'이 유일한 상영관으로 뜬다.

 

여긴 또 어딘가..찾아보니 아마도 독립예술영화 전용상영관인듯하다.

예술전용 상영관에서 유일하게 상영하는 영화라...

 

이거 둘중 하나다. 무지 고차원적인 감동을 주던지 아님 무지 재미없던지..

 

 

마침 주말에 딸내미가 와 있었던 터라,

바로 의기투합하여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상연을 보기 위하여 바로 부산까지 달린다.

 

제목과 스틸만 보고는 다른 사람의 리뷰나 평점을 볼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은채,

당연히 바흐가 살았던 당 시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전형적인 전기영화이겠거니 생각하며 달려갔다.

 

 

 

<출처: medulafilms.com>

 

'바흐이전의 침묵'은 짐작대로 바흐에 관한 영화이기는 하지만

전기영화라기 보다는 음악영화라고 보는게 낫겠다.

 

처음에는 음악부터 마구 쏟아 낸다.

 

 

텅빈 공간, 마치 시공간을 초월한 듯한 텅빈 공간에 선율만이 남아서 공간을 메우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장거리 악기 운송트럭 조수의 하모니카 연주,

피아노 조율사의 피아노 여주

지하철에서의 첼로 연주,

성토마스 합창단의 아름다운 합창,

피아노를 배우는 어린소년들의 오르간 연주 등등으로 바흐의 아름다운 선율들을 마구 쏟아낸다.

 

처음에는 미완성된 콜라쥬속의 일부가 되는 이런 단편적 장면들이 이해가 되지 않아

영화에 적응하기가 다소 힘들다.  

 

직조로 치면 모자이크 직조도 아닌 여러가지 편린들을 이리저리 찢고 오려붙여 완성하는

콜라쥬형태이니 완성되기 전까지는 부분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출처: medulafilms.com>

 

그러나, 완성된 모습으로 보고나니 다소 이해가 된다.

 

즉, 초기의 이런 장면들은

바흐의 음악이 우리 현대인들의 삶속에 곳곳에 천착되어 살아 숨쉬고 있음을 말해준다.

 

전문적인 음악가를 통하여 아름답게 연주되건, ..

또는 단순한 트럭기사나 보조기사의 시간을 메꾸기 위한 킬링타임용으로 활용되건,

아님 현대인에 의하여 화려하게 변주되건

또는 어린아이들의 피아노 연습곡으로 사용되건..

또는 그것이 누구의 작품이지 알고 연주가 되건, 모른 채 연주되건..

 

 

 

<출처: medulafilms.com>

그런 선율 중간중간에 감독은 바흐에 대한 정보의 편린들을 조금씩 조금씩 끼워넣어서 관객들에게 전달해준다.

마치 현대인이 바흐의 복장을 코스퓸한 채, 과거를 소개하듯이..

 

 

 

영화는 바흐의 전기를 완전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그의 라이프찌히 시절(1724-1750)만 다루고 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1685-1750)는 그의 탄생 전후 200여년에 걸쳐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한 대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는 튀링겐주 아이젠아흐 시골농가에서 태어났으나

9살 이후 양친을 잃은 후에는 일을 찾아 고향주변의 몇 개지역을 옮겨다녔는데,

그의 생애 가장 마지막 시기가 라이프찌히 시절이다.

 

1723년 5월 바흐는 성토마스 교회의 음악감독인 칸토르가 된 후 1750년 숭을 거두는 날까지 27년동안 라이프찌히에서

 수많은 교회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영화는 그 시절의 일부를 다룬다.

 

칸토르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교회 부속학교의 음악교사로서 음악교육뿐만 아니라

그 도시의 교회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할 책임까지 진다. 당시 바흐는 성토마스 교회와 성니콜라이의

2대 교회에서 일요일마다 칸타타를 연주하고, 성 금요일에는 대규모의 수난곡을 연주하여야 했으므로

그의 생활은 상당히 빠듯하고 바빴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바빴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이 그렇게 풍족해 보인다는 느낌은 없다.

 

성장과정에서 많이 잃기는 했지만 20명의 자녀를 생산했다고 하니..

그 많은 식솔을 풍족하게 먹여살리기에는 교회 칸토르의 월급은 그다지 넉넉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풍요롭지 않은 그런 생활속에서도 바흐의 성실하고 우직한 성격과 독실한 기독교에 대한 신앙으로

신을 찬양하는 수많은 종교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하였다.

 

아쉽게도 당시대에 바흐는 그다지 인정을 받지 못하였었던 거 같고,

그의 사후에는 그의 악보나 음악이 그닥 소중하게 취급되지는 않았던 듯하다.

푸줏간에서 고기를 싸는 종이로 사용될 정도로 하찮게 취급되고 있었으니..

 

 

 

 

신을 찬양하는 바흐의 아름다운 소리들은 아마도 멘델스존이 없었다면 영원히 침묵속에 잠겨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바흐 사망후 60여년 후의 사람인 멘델스존(1809-1847)은 함부르크의 부유한 유대계 집안에서 태어나

스스로 작곡도 하고 지휘도 하고 연주도 하는 음악가이기도 했지만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의 숨겨진 명곡들을 세상에 소개하면서

 라이프찌히를 유럽음악의 중심지로 끌어올린 사람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에 의해 세상의 빛을 본 명곡들이 수도 없이 많은 중에,그 중에 바흐의 음악은 대표적이다.  

 

실제로 바흐의 음악을 재현하는 과정에

영화에서처럼 푸줏간 고기 싼 악보를 하나하나를 수집하여  복구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어쨋거나 멘델스존이 없었다면 바흐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만큼

바흐는 멘델스존에게 진 빚이 크다.

 

 

 

특히, 멘델스존이 1829년 베를린 징 아카데미에서  바하가 죽은 후 처음으로 재연한 '마태 수난곡'은

바하 르네상스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영화에서 성토마스 교회 합창단이 재연하는 '마태수난곡'의 웅장한 하모니는 가슴을 진동시킨다.

 

독일의 어떤 고서점 주인은 말한다.

'바흐이전의 세상은 침묵이었다. 바흐가 없었다면,신도 삼류에 머물렀을 것이다'

 

'마태 수난곡'을 듣는 순간, 그의 말이 진실인것을 알 수 있다.

 

...

 

그러나, 그의 생애와 음악이 감동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가 감동스러우냐하는 문제는 다른 문제이다.

 

누군가 말하길, 고차원적인 취미활동은 이해를 위한 '사전지식'를 필요로 한다고 했든가..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확실히 고차원적인 장르에 속한다.

 

왜냐하면,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 영화로부터 감동을 얻기 위해서는  '바흐에 대한 사전지식'은 필수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는 어지러운 조각들의 모음일뿐이다.

 

그리고..

내 딸과 같은 반응이 나온다.

 

 

"지겨워서 미치는 줄 알았네~"

... ;;

 

 

 

더보기

 

작곡가 이야기 -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바흐의 가계(家系)

바흐의 가계는 200년에 걸쳐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한 대 음악 가계였다.
빵제조업자로서 찌터(Zither:현악기의 일종)를 연주했다고 전하여지는 파이트(1619 사망)이후, 중부 독일의 튀링겐 지방이 바흐 가문 대대의 중심지가 되었고, 일족은 모두 루터 정통파의 경건한 신자였다.

파이트의 장남 요하네스(1580경~1625)는 J.S Bach의 증조부에 해당되며, 베히마르의 거리 악사로서 그 이름은 이웃 고장에까지 전해 졌다.

그 장남 요한(1604~1673)은 바흐 가문 최초의 작곡가로서 알려져 있고, 현존하는 3곡의 작품은 30년 전쟁시대의 생활감정을 생생하게 반영시키고 있다.

요한의 동생 크리스토프(1613~1661)가 J.S Bach의 조부로서, 에르푸르트와 아른시타트에서 악사로 활약했으며, 그 동생인 하인리히(1615~1692)는 비범한 음악가로서 1곡의 칸타타가 현존하고 있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이전의 최대의 바흐로 호칭되는 인물이 이 하인리히의 장남 요한 크리스토프(1642~1703)이다. 그는 아이제나하의 교회 오르가니스트로서 활약했으며, 작곡가로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동생 미하엘(1648~1694)도 형에 못지 않은 음악가였으며, 그의 막내딸 마리아 바르바라는 훗날 세바스티안의 첫 아내가 된다.

세바스티안의 조부 크리스토프는 세 아들이 있었다. 장남 게오르크 크리스토프(1642~97)는 바흐 집안에서 처음으로 칸토르(교회 합창장)라는 높은 지위에 올랐다.

그 동생 요한 크리스토프(1645~93)와 요한 암브로지우스(1645~95)는 일란성 쌍생아로서 전자는 아른시타트의, 후자는 아이제나하의 악사가 되었다. 이 암브로지우스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사람이 바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이다.

 

바흐의 생애 : 학습시대

아이제나하의 성게오르크교회의 옛 문서에는 1685년 3월23일에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가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가 태어난 날은 3월21일 이었다고 하나 확증은 없다.

바흐의 어린시절에 관해서는 상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음악적 분위기의 가족에 둘러싸여 일찍부터 음악적 재능을 나타냈음을 상상할 수 있겠다.
부친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우고, 부친의 사촌형인 요한 크리스토프가 연주하는 오르간에 귀를 기울이며 자랐다.
7세인 1692년이나 혹은 그 이듬해에 성게오르크교회의 부속 라틴어 학교에 입학했는데,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성가 대원으로서 일했다.

1694년에는 잇달아 양친을 잃고, 맏형 요한 크리스토프(1671~1721)를 따라 오르도르프로 이주한다.
이 형은 바로크시대의 대 작곡가 요한 파헬벨의 제자로서, 세바스티안도 형을 통해 파헬벨의 양식을 배워, 그 영향은 훗날 작품에 드러난다. 이 형은 또한 프로베르거, 케를, 북스테후데, 뵘 등의 작품 사보를 많이 소장하고 있어, 어린 세바스티안은 남몰래 그것들을 필사하여 공부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오르도르프의 학교에서 라틴어와 루터 정통파 신학을 배운 것도 장래의 바흐에게 있어서 중요한 일이었다.

이 시기의 작품에는 클라비어를 위한 푸가와 오르간 코랄이 있으며, 백부 요한 크리스토프와 파헬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형의 가족이 늘어나자 자활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바흐는 1700년 봄에 북독일의 Hansa동맹 가입 도시 뤼네부르크로 옮겼으며, 그곳 고등하교에 급비생으로서 입학했다.
여기서 그는 북독일 학파의 다채로운 음악을 접했고, 역시 이곳 교회 오르가니스트였던 대가 게오르크 뵘도 개인적으로 알게 되었다.
또한 1701년에는 함부르크를 방문, 북독일 오르간악파의 노대가 라인켄의 음악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이웃 고장인 쩰레의 궁정악단 연주를 듣고 프랑스악파의 양식을 알게 되었다는 점도 바흐의 성장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뤼네부르크 시대의 작품에는 게오르크 뵘의 영향이 반영된 오르간 코랄변주곡이나 프랑스양식에 의한 클라비어의 모음곡 등이 있다.

 


바흐의 생애 : 아른시타트 뮐하우젠시대(1703 ~ 1708)

 

아마도 1702년에 뤼네부르크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바흐는 곧 음악가로서 자활을 해야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그 해 8월에 튀링겐 지방의 장게르하우젠 이라는 소도시의 오르가니스트를 지원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사정에서인지 실현되지 못했으며, 1703년 4월에 바흐는 바이마르의 궁정악단에 바이올리니스트로 취직했다. 겨우 3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이곳에서 바이올린 연주의 경험을 쌓았으며, 독일 바이올린의 대가 베스트호프 - Johann Paul von Westhoff(1656~1705)를 알게되어, 독일 바이올린 악파의 다성적 연주법을 배울 수 있었다. 이것은 훗날에 작곡한 무반주 바이올린곡의 기초가 되고 있다.
그러나, 바흐가 원했던 것은 한낱 궁정악사가 아니라, 집안 가족의 거의 모두가 차지했던 교회 오르가니스트의 지위였던 것 같다. 그의 이 희망은 성취되어, 1703년8월 아른시타트의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취임한다.

이 고장은 세바스티안의 조부인 크리스토프 이후 바흐 일족과는 관계가 깊었으며, 세바스티안이 취직했던 <신교회>(현재의<바흐교회>)에서는 새로이 만들어진 성능이 좋은 오르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고장의 당국자들도 바흐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겨우 18세인 그에게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높은 급료를 주기도 했다.

오르가니스트로서 일하는 한편, 성가대를 훈련시키는 것도 그의 의무였으나, 혈기왕성한 그는 젊은 대원들과 충돌하여, 어떤 때는 대원중의 한 사람과 거리의 난투극을 벌인 일도 있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1705년 10월에 바흐는 1개월의 휴가를 얻어 북 독일의 소도시 뤼베크를 방문하여, 당시 최대의 음악가의 한 사람이었던 븍스테후데의 연주를 들었다. 그의 장려한 오르간곡이나 칸타타에 완전히 매료되어, 아른시타트로 돌아온 것은 4개월 가까이나 지나서였다. 시의 성직회의에서는 그의 무책임을 엄격하게 견책했으며, 오르간 코랄의 연주에 별로 들어보지 못하던 악구를 많이 혼입시켰다는 점과, 성가대의 훈련을 게을리 했다는 점도 곁들여 바흐를 비난했다.

이 시대는 바흐가 오르간 연주와 작곡의 기초를 굳혀, 서서히 자기 양식을 형성하고 있던 시대로서, 전주곡과 푸가, 혹은 토카타와 푸가에 북스테후데의 영향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유명한 BWV565 <토카타와 푸가 d단조 - Toccata and Fugue in d minor>도 그 가운데의 하나이다.
클라비어 작품으로는 1704년에 쓰여진 BWV 992 <카프리치오<사랑하는 형의 여행에 즈음하여> B플랫장조 - Capriccio in Sopra la lontananza del suo fratello dilettissimo in Bb Major >가 유명하다.

아른시타트의 성직회의와 충돌한 바흐는 1707년6월에 중부독일의 소도시 뮐하우젠에서 새로운 직장을 구했다. 성블라지우스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서 당시의 유명한 음악가 알레의 후임이었다.

그해 10월에 이미 아른시타트에서 사귀었던 육촌 누이동생인 바르바라와 결혼했다. 훗날 이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일곱 자녀 가운데에서 장남인 빌헬름 프리데만과 차남 칼 필립 엠마누엘은 특히 뛰어난 음악가로 성장했다.

뮐하우젠에서의 바흐는 오르가니스트로 활약하면서 교회칸타타의 작곡에도 힘을 기울여, 1708년2월 市의 참사회원 취임식을 위해 BWV71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도다 - Gott ist mein König>를 작곡했다. 북독일악파의 양식에 의한 이 장려한 작품은 바흐의 생전에 인쇄, 출판된 단 하나의 교회칸타타이다.
또한 BWV131 <주여,깊은 심연에서 당신을 부르나이다 - Aus der Tiefen rufe ich, Herr, zu dir(1707)>와 <애도행사 - Actus tragicus>의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제106번 <하나님의 세상은 최상의 세상이로다 - Gottes Zeit ist die allerbeste Zeit(1707)>도 이 시대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그런데 당시의 뮐하우젠은 다분히 교리주의에 빠져있던 루터 정통파와 개인의 종교감정을 소중히 여기는 경건주의와의 싸움에 휩쓸리고 있었다.
바흐 집안은 대대로 루터 정통파에 속했었으나, 바흐 자신은 경건파에로 마음이 끌려 그 영향은 그의 작품에도 잘 반영되어 나타난다.

 


바흐의 생애 : 바이마르시대(1708 ~ 1717)

 

1708년 7월에 바흐는 바이마르에 새로운 직장을 얻었다. 학교를 졸업한 직후에 그가 처음으로 취직했던 추억의 고장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한낱 악사로서가 아니라 궁정 오르가니스트이며, 그 봉급은 뮐하우젠시대의 2배 가까이나 되었다.

오르가니스트로서의 명성은 높아갔고, 그 작품은 모두가 원숙미를 보이고 있었다. 예배당의 오르간은 바흐 자신의 계획에 따라 개조되었으며, 이 악기에서 그의 오르간곡 태반이 탄생되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흐의 바이마르시대를 그의 <오르간곡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오르간 연주와 작곡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훗날의 바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으로, 여기서 그가 비발디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협주곡을 익히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바이마르의 궁정은 엄격한 루터 정통파의 종교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당시 독일의 다른 대개의 궁정과 마찬가지로 음악상의 선진국인 이탈리아에의 문호를 열어서, 궁정악단에서는 이탈리아의 협주곡이 자주 연주되고 있었다. 중부 독일과 북 독일의 음악속에서 자란 바흐로서는 그것은 매우 새로운 세계였을 것이다. 그는 그 신선한 매력에 사로잡혀 비발디나, 그 양식에 의한 협주곡을 오르간이나 쳄발로를 위해 편곡도 하며 연구했다. 그 성과는 바이마르후기 오르간곡에 라틴적 명쾌성이 혼입되어 나타나며, 이어 쾨텐시대에 수많은 협주곡을 낳게 한다.

이 시대의 생활은 잦은 여행도 많았다. 마이닝겐, 카셀, 드레스덴, 라이프찌히 외에도 1713년에는 헨델의 탄생지로 유명한 할레까지 갔던 이유는 성모교회의 오르가니스트를 희망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그의 오르간 연주와 칸타타곡에 감탄한 할레 사람들은 기꺼이 바흐를 맞이하려고 했으나, 봉급문제로 바흐와 의견이 맞지 않아 끝내 이 취직은 실현되지 못하고 만다.

바흐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바이마르의 영주는 그의 봉급을 올려주었고, 1714년3월에 그를 궁정악단의 콘서트 마스터로 임명했다. 이로써 매월 1곡의 칸타타를 작곡하여 연주하는 일이 바흐의 새로운 직무가 되었으며, 1714년 이후의 바흐의 활동은 칸타타에만 집중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뛰어난 종교시인 노이마스터와 프랑크의 가사에 의한 BWV61 <자, 오라 이교도의 구세주여 - Nun komm, der Heiden Heiland>, 제31번 <하늘은 웃고 땅은 환호하도다 - Der Himmel lacht! die Erde jubilieret>, BWV161 <오라, 그대 달콤한 죽음이여 - Komm, du süße Todesstunde >등의 명작이 태어났다.

바이마르의 바흐는 다섯 아이의 아버지로서 가정도 평안하였던 것 같으며, 교우관계도 원만했었던 것 같다. 1708년부터 4년 동안 아이제나하에서 악사장의 지위에 있던 유명한 작곡가 텔레만과 친교를 맺었는데, 그는 바흐의 차남 엠마누엘의 이름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특히 친했던 사람은 같은 바이마르지역에 있었던 뛰어난 작곡가겸 이론가였던 요한 고트프리트 발터였다.

이 시기에는 바흐의 명성을 흠모하여 모인 제자도 많았으며, 바흐의 생활은 아무런 불만이 없는 듯 보였으나, 이윽고 이곳과 이별할 때가 다가온다. 그 까닭은 영주와 그의 조카사이에 권력다툼이 일어나 양쪽에 다 친했던 바흐는 그 사이에 끼어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고, 1716년말에 궁정악장이 죽었을 때 그 후임자로서의 직위를 원했던 바흐의 기대가 어긋났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후 그는 칸타타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바흐는 사임 의지가 굳어져있었지만 영주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영주는 끝까지 사의를 고집하는 바흐를 설득하다가 1717년11월6일부터 12월2일까지 명령불복종 죄목으로 구류처분을 내려보내기까지 하였으나 결국 바흐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단념하고 말았다.

 


바흐의 생애 : 쾨텐시대(1717 ~ 1723)

 

1717년8월에 바흐는 코텐의 궁정악장으로 임명되었으나 바이마르의 사표가 수리되지 않아 실제로 쾨텐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그해 연말이었다.

궁정악장은 당시의 음악가로서는 가장 좋은 지위였는데, 쾨텐의 궁정악단에는 비올라 감바의 명수 크리스티안 아벨이나 수석 바이올린 주자 요셉 시퍼스 - Josef Spiess같은 뛰어난 음악가가 있었으며, 모두 17명의 단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바흐 자신도 비올라를 담당하여 즐겨 이에 참가했으며, 아마츄어의 범주를 넘어선 음악가였던 젊은 영주 레오포르트도 자주 감바와 쳄발로를 연주했다.

바흐의 주요한 직무는 이궁정악단을 위해 합주곡을 쓰고 영주의 방에서 열리는 연주를 위해 실내악 곡을 작곡하는 일이었다. 바흐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여 이례적인 높은 봉급으로 대우했던 영주 밑에서 바흐의 창작의욕은 한층 높아졌던 것 같다.

세속적인 기악곡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수십곡의 세속합주곡이 작곡되었다고 추정되지만 아쉽게도 그 대부분이 없어지고 말았다. 다만 3개의 바이올린협주곡, 6곡의 브란덴부르크협주곡, 무반주 바이올린소나타와 파르티타, 무반주첼로를 위한 모음곡 등 빼어난 곡들이 남아서 분실된 다른 작품들의 면모를 추측할 수 있을 따름이다. 곡 대부분은 이 시대의 풍요한 환경과 즐거운 생활을 반영하듯 밝고 즐거운 기분으로 가득차 있다.

바흐는 일찍부터 헨델의 작품을 알고 그를 높이 평가했는데, 그 헨델이 런던에서 돌아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1719년10월에 헨델의 고향인 할레에 갔으나 헨델이 그곳을 떠난 뒤였으므로 결국은 이 두 거장은 평생 서로 만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말았다.

이듬해인 1720년에는 영주를 수행하여 뵈멘의 피서지인 카를르스버트에 가있는 동안에 13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 바르바라가 갑작스런 병으로 세상을 떠난 사건이 발생한다. 그 마음의 상처로부터 삶의 전환을 꾀하려함인지, 그 해 10월에 바흐는 함부르크의 교회 오르가니트를 지원한다. 학습시대 때 바흐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던 연로한 대가 라인켄의 앞에서 바흐는 오르간의 즉흥 연주솜씨를 보였고, 그 연주의 훌륭함에 감탄한 함부르크의 성직회의는 즉석에서 바흐의 채용을 내정한다. 하지만 이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약간의 돈을 기부해야하는 관습이 있었던 관계로, 결국은 바흐보다 유복했던 평범한 음악가가 그 지위에 올랐으며, 바흐는 쾨텐에 계속 머무르게 된다.

나이 35세였던 1721년12월에 바흐는 새아내를 맞이한다. 그녀는 재능있는 소프라노 막달레나로서, 바흐 나이보다 16세 아래였다. 이 막달레나가 바흐의 작품을 사보, 정서한 것도 많은데, 그 필적이 바흐의 것으로 착각될 만큼 흡사하다.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자녀는 그 수가 무려 13명이나 되었는데, 특히 막내 요한 크리스티안은 유명한 음악가가 되었다.

1722년과 1725년에 바흐는 젊은 아내의 애정에 보답하기 위하여 2권으로 엮은 <안나 막달레나 바흐를 위한 클라비어 소곡집 - Clavier-Büchlein for Anna Magadalena Bach>을 쓴다. 이 곡집에는 <프랑스 모음곡 - French Suits>의 대부분과 사랑스러운 아리아들이 포함되어 있다.

쾨텐시대의 바흐의 생활중에는 교육활동도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많은 제자 가운데에서도 특히 풍부한 재능을 나타내었던 이가 바로 장남 프리데만으로서, 1720년1월부터 그를 위해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를 위한 클라비어 소곡집 - Clavier-Büchlein for Wilhelm Friedemann Bach>이 작곡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에는 2성 및 3성의 <인벤션 - Inventions>의 대부분과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 Das Wohltemperierte Clavier(The Well-Tempered Clavier Book)>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러한 걸작이 원래 교육적인 목적을 띄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인벤션>은 1723년에, <평균율클라비어곡집> 제1권은 1722년에 체계적인 곡집의 형태로 완성되었으며, <프랑스모음곡>과 <영국모음곡 - English Suits>은 쾨텐시대에 정리되었다.
협주곡이나 실내악곡과 더불어 이 시대에 바흐는 클라비어 곡을 많이 작곡하고 있는데, 1719년3월 쾨텐 궁정이 베를린에서 성능 좋은 쳄발로를 구입하였던 것으로 보아 BWV1050 <브란덴부르크협주곡 제5번 D장조 - Brandenburg Concerto No. 5 in D Major>과 BWV903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 d단조 - Chromatic fantasia and Fugue in d minor>등은 이 악기에 자극받아 작곡된 곡으로 추정된다.

쾨텐궁정은 칼맹파이었기 때문에 교회음악을 별로 소중히 여기지 않았으나 그래도 영주의 탄생일과 새해에는 1곡씩 칸타타가 연주되었다. 그 작곡도 바흐의 직무였으므로 상당히 많은 수의 작품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거의 유실되었고 현재 남은 것은 3곡의 세속칸타타 뿐이다.
그 가운데에서 <결혼칸타타 - Wedding Cantata>로 알려진 BWV202 <이제 사라져라, 슬픔의 그림자여 - Weichet nur, betrübte Schatten>가 유명하다.

훗날의 편지에서 '쾨텐에서 일생을 마칠 작정이었다'고 술회할 정도로 바흐의 생활은 충만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년 후에 바흐는 이 고장을 떠나 라이프찌히의 교회 음악가가 된다. 그 이유는 '교회음악에의 내적 요구'라고 전해지나 바흐 자신은 훗날 자신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고 있다.   1)영주가 결혼해서 음악에 대한 열정이 식었다는 것
  2)아들이 대학교육을 희망했다는 것(쾨텐에는 대학이 없었음.)
  3)라이프찌히의 경제적 조건이 좋았다는 것
그러나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아 결심을 3개월이나 연장했다' 라고.

 


바흐의 생애 : 라이프찌히시대(1723~1750)

 

1722년6월에 라이프찌히의 성토마스교회 칸토르로 있었던 유명한 작곡가 요한 쿠나우가 죽었으므로 시참사회는 그 후임을 찾고 있었다. 당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던 텔레만이나 그라우프너가 후보 물방에 올랐으나 두 사람은 모두 사양했다. 市 참사회는 '가장 우수한 인물을 얻을 수 없으므로 중류급의 음악가로 참아야 한다.'고 말하며 마지막으로 바흐를 선택했다.
바로 그 몇 개월 전에 바흐는 라이프찌히 시의 의뢰로 BWV245 <요한 수난곡 - St John Passion(1723)>을 작곡했으나 당시 사람들의 평가로는 바흐보다는 텔레만이나 그라우프너를 높이 평가 했다.

1723년2월 바흐는 채용시험을 받고 칸타타 BWV22 <예수께서 사도들을 끌어 당기셨도다 - Jesus nahm zu sich die Zwölfe>를 연주했다.
5월 중순에 취임이 최종적으로 결정되어 바흐는 성토마스교회의 칸토르가 되었고 사망하기까지 27년 동안 그 지위에 있었다.
칸토르는 정확하게 말한다면 교회 부속학교의 음악교사였으나 그 직무는 음악교육에만 머물지 않고 그 도시의 교회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할 책임자이기도 하였다. 성토마스와 성니콜라이의 2대 교회에서는 일요일마다 교회 칸타타가 연주되었고, 성 금요일에는 대규모의 수난곡이 연주되었다. 따라서 바흐의 생활은 다망하였으며, 1723~1729년 사이에 140곡 이상의 교회 칸타타를 비롯하여 BWV244 <마태수난곡 - St Matthew Passion(1729)>, BWV243 <마니피카트- Magnificat in D Major (원형 BWV243a는 1723)>등을 작곡하였다.

이 라이프찌히시대 초기의 칸타타 들에는 BWV56 <나 기꺼이 십자가를 지겠노라 - Ich will den Kreuzstab gerne tragen(1726)>, BWV78 <예수여, 내 영혼을 - Jesu, der du meine Seele(1724)>, BWV80 <우리의 하나님은 견고한 성벽이로다 - Ein feste Burg ist unser Gott(1727~1731)>를 비롯한 수많은 걸작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많은 작품은 결코 혜택받은 환경에서 나온 작품들은 아니었다. 우선 바흐는 라이프찌히 전체 시의 음악 책임자인 반면 상사는 시참사회, 성직회의, 대학당국 등 세 분야에 각각 따로 있어서 이 3자가 자주 반목하고 충돌할 때마다 바흐의 활동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또한 라이프찌히의 봉급도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적었고, 합창단의 능력은 떨어지며 규율도 갖추어지지 않은 환경이었다. 게다가 바흐의 완고한 성격은 자주 상사와의 충돌을 초래했다. 이러한 악조건은 바흐의 교회 음악일에 대한 정열을 차차 잃게 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보이는 것으로 1730년 전후부터 교회음악의 작곡이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다.

1730년8월에 시참사회는 바흐의 직무태만을 비난하여 감봉처분을 결정하고, 바흐가 市 참사회에 제출한 교회음악의 개선안은 완전히 무시당했다. 그해 10월에 바흐는 젊었을 때의 친구인 에르트만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따한 처지를 호소하며 다른 고장에의 취직을 부탁했다. 이 편지는 <에르트만 서간(書簡)>이라고 불리며 바흐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나 바흐의 희망은 실현을 보지 못했으며 그는 다른 방면에서 현 상태의 타결을 모색했다.
하나는 1729년부터 1742년까지 대학생 연주단체인 <콜레기움 무지쿰 - Collegium musicum>의 지휘를 맡아 이 악단을 위해 많은 세속 칸타타와 클라비어협주곡을 작곡했다.이 곡들은 대학의 행사때에 연주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주 금요일 저녁에 거리의 커피숍에서도 연주되었다. 유명한 BWV211 <가만히 입다물고,말하지 말아요 "커피 칸타타" - Schweigt stille, plaudert nicht "Coffee Cantata(1734~1735)">도 커피숍을 위해 쓰여진 곡중의 하나이다.
바흐가 눈길을 돌린 또 하나는 드레스덴에 있는 작센선거후의 궁정작곡가의 칭호를 받고, 그 위력으로 상사위 압력을 배제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드레스덴은 당시의 대음악도시로서, 바흐도 자주 그곳을 방문하여 유행작가 하세의 오페라를 듣거나 교회에서 오르간의 연주를 보여주곤 하였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작센후에의 충성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즉, 1733년7월에는 BWV232 <미사 b단조(미사통상문) - Mass in b minor>의 첫 부분을 장식하는 키리에와 글로리아를 헌정한 일 말고도 후나 후비의 탄생축하나 즉위 기념행사 등을 위하여 수많은 칸타타를 작곡했다. 이러한 노력의 보람으로 1736년 바흐에게 <폴란드왕 작센선거후의 궁정작곡가>라는 칭호가 부여되었다. 라이프찌히의 당국자들에게 이러한 일들이 효과가 있었는지 이후 바흐에 대한 노골적인 방해는 줄어들었으나 교회음악에 대한 바흐의 정열은 다시금 타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교회칸타타를 작곡해야할 직무에 있으면서도 그의 작품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1734년에 쓴 대작 BWV248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 Christmas Oratorio>도 순수 창작곡이 아니고 대부분이 이전에 쓴 곡들의 패러디였다.

18세기 중엽은 음악분야에서도 크게 양식이 바뀌기 시작한 때였다. 인간의 이성을 믿고, 자연감정을 추구한 계몽사상은 음악관에도 영향을 미치고, 사람들의 매력은 복잡한 대위법 적인 음악으로부터 단순 명쾌한 호모포니로, 그리고 교회음악도 보편적인 양식에서 주관적인 감정표현을 구하는 <다감(多感)양식>으로 급속히 옮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조류 속에서 바흐의 음악은 옛 양식의 대표로 간주되어 1737년과 이듬해의 두 차례에 걸쳐 함부르크의 젊은 평론가 요한 아돌프 샤이베의 통렬한 비판을 받았다. 그는 바흐의 이루 말할 수 없는 뛰어난 오르간 연주 기교나 대위법의 수준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바흐의 작품은 '너무 기교적이며, 자연스러움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난했다.

교회음악에 전념한 1723년부터 1729년까지를 라이프찌히 제1기로 본다면, 이에 계속되는 제2기는 콜레기움 무지쿰 용의 기악곡이나 세속칸타타에 의해 대표되나, 대략 1736년 무렵부터 바흐의 창작활동은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하여 라이프찌히 제3기라고 할 수 있는 시대에 들어간다. 이 시대의 현저한 경향은 이전에 쓴 곡들을 개정하거나 몇가지 작품을 곡집의 형태로 정리하거나 또는 그것들을 출판하는 일이었다.

1726년 이후부터 한 곡씩 세상에 내놓았던 6곡의 파르티타(BWV825~Bwv830)를 한데 묶어 1731년에 <클라비어 연습곡집 제1부 - Clavierübung Book I>로 출판하였고, 1735년에 BVW971 <이탈리아협주곡 F장조- Italian Concerto in F Major>와 BWV831 <파르티타(프랑스풍의 서곡) b단조 - Partita(Overture in the French Style) in b minor>를 포함하는 제2부가, 1739년에는 BWV552, BWV669~689, BWV802~805의 <오르간 미사>라고 불리는 제3부가, 그리고 1742년에는 BWV988 <골드베르크변주곡(아리아와 30개의 변주) G장조 - Goldberg Variations>이 제4부로서 출판되었다. 그리고 비록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BWV870~893의 <평균율클라비어곡집 제2부>도 여러 시기에 걸쳐 작곡된 곡을 1744년에 정리한 것이며, 이밖에도 오르간 코랄의 개정도 많았다.

1747년에 바흐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왕의 쳄발로 주자로 근무하던 2남 엠마누엘의 중개로 5월에 포츠담의 유명한 이 계몽군주의 궁정을 방문한다.
왕은 바흐를 환영하고, 바흐도 왕이 제출한 주제를 바탕으로 하여 즉흥연주를 들려주었다. 이를 동기로 태어난 곡이 BWV1079 <음악의 헌정 - Musical Offering(Musikalisches Opfer)>이다. 그리고 그 해 6월에 이론가 미쯜러 - Lorenz Christoph Mizler(1711~1778)가 창립한 <음악학협회 - Societät der musikalischen Wissenschaften>에 가입했는데, 그때 오르간용의 카논풍 변주곡 BWV769 <높은 하늘에서 나는 왔도다 - Einige canonische Veränderungen uber das Weihnachtslied in C Major>를 작곡, 출판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1748년부터 1749년 초에 걸쳐 마지막 대작 BWV1080 <푸가의 기법>을 작곡하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이 상의 3곡은 고도의 대위법 기교를 구사한 난곡으로, 얼핏 생각하면 반시대적이라고도 판단되는 이 경향은 바흐의 만년을 특징짓고 있다.

바흐의 자필로 보아 보면 1746년경부터는 만년 특유의 노쇠함을 짐작할 수 있으며, 시력 또한 쇠퇴하고 있었던 것 같다. 특히 1749년5월의 뇌일혈 발작과 함께 그의 시력은 급속하게 감퇴되어 그 뒤로 직접 곡을 쓰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으로 보인다. <푸가의 기법>이 중단되고 미완성인 채로 남겨진 것이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750년3월 말부터 4월에 걸쳐 두 차례의 눈 수술을 받았으나 성공하지 못하여 끝내 바흐는 시력을 잃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이 때 사용하던 약들도 오히려 몸을 쇠약하게 만든 것 같다. 제자 알트니콜 - Johan Christoph Altnikol(1720~1759)과 그의 아내인 바흐의 딸이 바흐의 위급함을 듣고 임지인 나움부르크에서 왔다.
7월18일 무렵에 한때 시력을 회복하였으나 다시 뇌일혈 발작을 일으켜 10일 후인 1750년7월28일에 바흐는 사랑하는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시간은 오후 8시45분이었다고 한다.
유해는 7월31일 성요한교회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바흐의 간단한 연보

 

1685(0세) 3월21일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남.

1693(8세) 아이제나흐의 라틴어 학교에 입학함.

1694(9세) 모친 엘리자베트 사망. 부친 요한 암브로지우스는 발라라 마르가레타 코일과 재혼함.

1695(10세) 부친 사망. 올도르프로 이주함.

1700(15세) 올도르프의 학교를 그만두고 친구인 에르트만과 뤼네부르크로 가서 성가대 대원이 됨.

1702(17세) 뤼네부르크의 성 미카엘 학교를 졸업함.

1703(18세) 작센=바이마르 공국의 요한 에른스트의 궁정악사가 됨. 8월에 아른슈타트의 신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취임함.

1704(19세) 형 요한 야콥이 스웨덴왕 카알12세의 근위대 오보에 주자로 가게 됨. ≪카프리치오≫ BWV993을 작곡함.

1705(20세) 10월경에 뤼벡을 여행하면서 『저녁음악』이라는 음악회에서 북스테후데의 연주를 들음.

1706(21세) 성직자 회의에 소환되어 휴가기간의 무단연장과 예정에 없던 오르간 연주, 그리고 성가대를 지도하는 업무를 불이행한 것에 대해서 비난을 받음.

1707(22세) 뮐하우젠 성 브라지우스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채용됨.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함.

1708(23세) 2월에 칸타타 BWV71 초연. 작센=바이마르공인 빌헬름 아우구스트의 궁정 오르가니스트 겸 궁정악사로 채용이 결정됨.

1710(25세)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 출생

1712(27세) 바흐의 제안으로 바이마르 궁정의 오르간이 보수됨.

1714(29세) 바이마르 궁정악단의 악사장으로 임명됨. 다수의 칸타타를 작곡함. 아들 칼 필립 에마누엘 출생

1715(30세) ≪영국모음곡≫을 작곡. 다수의 칸타타를 작곡함.

1716(31세) 4월에 할레교회의 오르간을 검사. 7월에는 에어프르트교회의 오르간을 감정. 다수의 칸타타를 작곡함.

1717(32세) 인하르트=쾨텐후작 레오폴드의 궁정악장에 임명됨.

1718(33세) 칼스버트로 여행함.

1719(34세) 할레를 방문하여 헨델을 만나려고 했지만 실패함.

1720(35세)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의 정사악보를 작성.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 사망.

1721(36세)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브란덴부르크 변방의 백작 루드비히에게 헌정. 안나 막달레나 비르케와 재혼함.

1722(37세)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1권을 완성. 라이프찌히의 토마스 칸토르에 응모함.

1723(38세) 라이프찌히에서 토마스 칸토르의 채용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함. 라이프찌히로 이주. 다수의 칸타타를 작곡함.

1724(39세) ≪요한 수난곡≫(제1고)을 초연. 다수의 칸타타를 작곡함.

1725(40세) 9월에 드레스덴을 방문하여 소피아교회의 질버만 오르간을 사용하여 연주회를 개최함. 다수의 칸타타를 작곡함.

1726(41세) ≪파르티타≫ BWV825를 안하르트=쾨텐후작의 아들 에마누엘 루드비히에게 헌정. 다수의 칸타타를 작곡함.

1727(42세) ≪마태수난곡≫ 초연(?)

1728(43세) ≪파르티타≫ BWV828 출판. 성직자회의와 대립이 심각해짐.

1729(44세) 콜레기움 무지쿰의 지휘자로 취임. 6월에 할레 체류중 헨델을 라이프찌히로 초대하려는 계획이 무산됨.

1730(45세) ≪파르티타≫ BWV829 출판. 라이프찌히 시참사회가 바흐의 직무태만을 비난하고 감봉처분을 결정함.

1731(46세) ≪클라비어 연습곡집≫ 제1권 출판. 9월에 드레스덴의 성 소피아교회에서 연주회를 개최함.

1732(47세) 아들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출생

1733(48세) 바흐의 노력으로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이 드레스덴의 성 소피아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취임함.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2세에게 ≪b단조 미사≫의 키리에와 글로리아를 헌정함.

1734(49세)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초연

1735(50세) ≪클라비어 연습곡집≫ 제2권 출판. 아들 요한 크리스티안 출생

1736(51세) 토마스 합창단과 의견 대립. 작센 선제후의 궁정작곡가로 임명됨.

1737(52세) 콜레기움 무지쿰의 지휘를 사임함.

1738(53세) 아들 칼 필립 에마누엘이 프리이센의 황태자 프리드리히의 쳄발로 연주자로 채용됨.

1739(54세) ≪클라비어 연습곡집≫ 제3권 출판. 콜레기움 무지쿰의 지휘를 재개함.

1741(56세) 베를린으로 여행함.

1742(57세) ≪클라비어 연습곡집≫ 제4권(골드베르크 변주곡)이 출판됨.

1746(61세) 빌헬름 프리데만이 드레스덴을 떠나 할레의 성모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취임함.

1747(62세) ≪음악의 헌정≫ 작곡. 포츠담에서 프리드리히2세의 궁정을 방문함.

1749(64세) ≪푸가의 기법≫ 작곡. 라이프찌히 시참사회에서는 바흐의 후임으로 G.할러에게 토마스 칸토르의 취직시험을 행함.

1750(65세) 3월에 의사 J.라이러에 의한 눈수술. 7월28일에 세상을 떠남. 성요한 교회의 묘지에 안장됨. G.할러가 토마스 칸토르의 후임으로 결정되어 취임함.

*** 자료출처 : 도서출판 음악세계 - 작곡가별 명곡해설 라이브러리(4) 바흐 ***

 

 

* 출처 : GREAT J S BA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