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라 /영남 기행

산청군 단성면 '목화 시배유지'와 문익점 선생 생가터

노코미스 2011. 8. 10. 12:16

 

 2011.08. 06. 토요일  날씨: 무지 덥다.

 

 

빨리 끝나기만을 학수고대하던 보수교육도 끝나고 더 이상 시간에 메일 일도 없어졌고, 마땅히 할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예년같으면 벌써 보따리 싸서 먼 여행길에 올랐을터인데,

올해는 그것조차 미적미적하다보니 준비도 못하고..그냥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나의 유전인자는 어떻게 된 것인지, 뭔가를 동시에 하나이상을 하지 못하는 무능력인자이다.

딸내미 오고 부터는 이상하게 내 시간을 제대로 활용할 수가 없다. 그렇다 해서 그 아이를 위해서 딱히 해주는 일도 없는데..

 

후~..

그렇다해서 그 아이가 현재 집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여전히 난 혼자서 이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물론 새주부터는 또 할일이 기다리고 있긴 하지만, 보수교육 끝나자마자 또 연구실에서 책냄새를 맡고 있기는 싫다.

해서, 무조건 주말 아침 차를 몰아 나서고 본다.

마음이 끌리는 쪽으로 가다보니 진주쪽으로 향하고 있다. 문산휴게소에서 간단한 요기를 한 후 관광정보센터에 들런다.

지도상에 '문익점 면화전시관' 및 '목화시배유지'가 눈에 들어온다. 거리도 가깝고 됐다. 저곳이 오늘의 목적지이다.

 

문익점 선생은 나의 직계선조인데도 불구하고 그 분에 대해서 한번도 제대로 알려고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오늘은 나의 뿌리 공부하는 날로 하자.. 

 

 

먼저 남해 고속도로에서 진주 인터체인지를 지나고 바로 대통고속도로를 탄 후 바로 단성 Exit로 빠진다. 톨게이트에서 빠져나오면 작은 사거리가 나오는데

그곳서 우회전하여 500m정도만 움직이면 '배양마을'과 그 인근에 '목화시배유지'가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문익점 선생 공적기념비'가 우뚝 솟아있는 앞뜰이 나오는데, 이 자리가 원래 '목화시배유지'였다고 한다.

 

 

 

다시 고개를 좌로 돌리면 깔끔하게 정리된 9칸짜리 기와건물이 번듯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 건물이 '문익점 면화전시관' 이다.

 

'시배유지'로 들어오는데는 무료로 들어올 수 있지만 '면화전시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인 입장료 천원을 부담하여야 한다.

들어가면 목화씨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과정과 가지고 온 목화씨를 배양해서 솜을 타서 의복산업에 기여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체계적인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이 곳의 자료에 의하면

'삼우당 문익점 선생은 1364년 원 조정의 억류에서 풀려나 귀국하면서 당시 외부 유출이 엄격하였던 목화종자를 위험을 무릎쓰고 붓뚜껑속에 숨겨오게

된다. 그가 가져온 10여개의 목화씨앗은 공향인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 처음으로 심었다. 10개 중 장인 장천익이 심은 다섯개 중에서 오직 한 개만이 싹이

터서 배양에 성공하였고 그 후 직포기기의 고안과 보급으로 목면은 전국에 널리 전파되어 의류혁신과 국가발전에 큰 획을 그엇다'

 

그리고

'그의 장인 정천익은 '취자거(取子車)'라는 씨아와 '소사거(소絲車)'라 불리는 물레를 처음으로 만들어 길쌈을 더욱 편리하게 하였다'

 

 

 

목화에서 목면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그 과정을 잘 모르는 젊은 세대들을 위하여 자료실에는 그 과정을 밀납모형을 통해서 상세하게 재현하고 있다.

 

목화솜에서 무명천이 되기까지의 과정

 

① 씨아기 작업: 목화를 수확하여 건조한 솜을 씨아에 넣어 씨앗을 제거하는 작업을 한다. 

② 솜타기 작업: 씨앗을 뺀 솜을 대나무를 휘어서 활처럼 만든 무명활로 타는데, 이 과정에 의해 솜을 구름처럼 뭉게뭉게 부풀게 만든다.

③ 고치말기 작업: 수수깡이나 참대를 가운데에 끼우고는 솜을 손으로 비비면서 길고 둥글게 말아 빼면 고치모양이 된다.

이 과정은 솜에서 실을 뽑아내기 위하여 짧은 섬유질을 서로 얽히게 만드는 과정이다.

④ 실잣기(또는 물레질): 솜을 둥글게 말은 고치솜에서 실을 뽑아낸다. 떡가래처럼 길게 말은 고치솜을 손가락에 끼우고,

처음에는 끝부분의 솜을 인위적으로 꼬아 조금 뽑아내어 물레가락에 걸어 고정시킨다음 한 손으로 물레를 돌리면 가락이 회전하면서

꼬임이 주어져서 고치의 솜이 실로 이어져서 길게 감기게 된다.

⑤ 무명날기 작업: 가락에서 실을 만들었으면, 배매기 또는 무명매기를 하기 위하여 날실이 될 실들을 바디샷 수에 맞추어 길이가 일정하게 모으는 작업을 한다

⑥ 무명매기(또는 베매기): 베짜기를 할 때 실의 강도를 높이고 엉킴을 방지하기 위하여 날실에 풀을 먹이는 작업

⑦ 베짜기: 우리의 할머니들은 낮에는 밭일 들일을 하고 밤이되면 호롱불 아래에서 한많은 '베틀노래'를 부르며 옷감을 짜곤하였다.

 

불과 4~50여년전만 하더라도 시골마을에는 저녁먹고나면 집집마다 베틀 돌아가는 소리와 더불어 밤이 깊어 갔었는데

오늘날에는 이런 모든 과정을 기계에 의존하게 되었으니 감히 '여성해방'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자료를 보며 격세지감을 느끼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곱게 물들인 무명으로 지어놓은 생활한복과 생활용품 전시장이 눈앞에 있다.

모른채하고는 나와버린다.

 

관심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내가 입기에는 불편하다. 언제 풀먹이고 다림질해서 입겠냐고..

 

 

전시관에서 나와서 왼쪽 옆에 또 다른 오래된 기와 건물이 한 채 있다. 건물앞에 입간판에 '부민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부민각(富民閣)은 삼우당 문익점 할아버지가 70세인 1400년 2월 8일 본가에서 돌아가시자 정종은 할아버지의 공과 덕이 지극히 크고 높음을 기리어

예장(禮葬)할 것을 명하였다.

 

이어 태종도 참지의정부사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에 추증하고 강성군(江城君)에 봉했으며, 시호를 충선공(忠宣公)이라 하고 부조묘를 세우라 명하였다.

 

세종대왕 또한 선왕들의 뜻을 이어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을 추증하고 부민후(富民候)를 추봉하였다. 뜻은 '백성을 부유하게 한다'는 뜻인가..?

어쨋거나 이 의의를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7간 집을 짓고 부민각이라 이름하였다.

 

 

 

4~5째간에 충선공 문익점 할아버지(1329~1400)의 영정그림이 붙어있다. 생전 처음보는 모습이다.

언제적 누가 그린 그림인지 알 수가 없다.

 

방명록에 후손 이름하나 남기고 봉헌함에 약간의 금액을 보태고 큰절 두번 올리고는 늦은 인사에 용서를 구하고는 돌아 나온다.

직계 후손조차 관심 없는 선조를 누가 길이 길이 기억하고 기리겠는가..? 새삼 부끄러운 점이 많다.

 

 

 

부민각 옆에 조성해 놓은 목화밭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도중에 자그만 비각 하나를 만난다. '삼우당 효자비'

삼우당 선생은 나라에 충신일뿐만 아니라 부모에 효자이기까지 하셨나보다.

 

그리고 걱정도 참 많으신 분이었던 거 같다. 세가지 걱정거리 즉, 나라걱정, 부모걱정, 유교의 도리가 땅에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3가지 걱정 때문에 '삼우당'이라는 호도 직접 지으셨다는데..  할배요~ 진짜 쩐다~~^^;;

 

 

 

삼우당 할아버지의 효심은 당시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왜구도 인정을 하여 

이 마을만큼은 그냥 지나쳤다고 하니..

 

그로 인하여 한 때는 이 마을을 '효자리'라 불렀다 한다.

 

 

 

비각 옆으로 오늘날 조성해 놓은 조그만 목화밭이 있다. 원래 시배지는 전시관 입구 사적비 서있는 자리라 한다.

 

삼우당 할아버지가 원나라에서 붓뚜껑에 숨겨서 조심조심 가지고 들어온 목화씨 10개, 그 중 하나가 싹이터서 그해 가을에 씨앗 100개 수확,

씨앗을 가지고 들어온 지 3년만에 이 마을은 향리 전체가 온통 하얀 목화밭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시배지였던 이 마을에서도 어느 누구도 개인적으로 목화를 심는 사람은 없다. 여기 전시관 한 모퉁이에 몇 평남짓한 자리에

꽃을 피우고 있을 뿐이다. 목화도 이제 잊혀져가는 농작물 중 하나인지 모르겠다.

 

 

 

한창 꽃을 피우고, 꽃이 떨어진 자리에는 '다래'라고 하는 열매가 열리고 있었다.

 

꽃은 흰색 또는 분홍색을 띄고 있고, 그 모양새는 후덕하니 시원하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실핏줄 같은 잎맥이 하늘하늘 비칠만큼 연하게 생긴 꽃잎을 가진 아름다운 꽃이다

 

 

 

장마가 끝난 성하의 높푸른 하늘을 향하고 있는 목화꽃.

 

 

 

꽃이 떨어진 마디마디에 다래가 열려있다.

 

이것보다 조금 어린 열매를 반으로 쪼개어 보면 아직 솜이 되지 않은 섬유질이 있는데 그것은 단물이 남아있어서

별다른 먹거리가 없었던 시골아이들에게는 아주 달콤한 과자구실을 하곤 했는데..

 

 

 

어린날을 추억하며 열매하나를 따서 속에 있는 하얀 섬유질을 입에 넣고 꼭꼭 씹어보았더니..

옛맛이 아니다. 너무 큰 열매를 골랐나봐~

 

 

 

이 열매가 한 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견디고 나서 9월이 되면

저 파랗게 생긴 열매꼭지들이 쩍쩍 입을 벌리고 그 꼭지속에 숨어있던 섬유질들이 하얀 눈꽃처럼 피어나기 시작한다.

 

저 하얀 열매를 '목화'라 한다.

목화송이가 하얗게 피어나는 계절이 되면 목화밭은 하얀 눈이 내린 것처럼 지금보다 훨씬 낭만적이다.

 

 

목화 학습장을 둘러보고는 '시배지 투어'를 바로 끝내기에는 뭔가 찝찝함이 있어서

다시 전시관으로 들어가서 '삼우당 할아버지의 생가'는 없는지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배양마을'안에 '생가터'가 남아있단다.

 

처음에 나는 할아버지의 생가터가 '시배지' 근처이거나 아니면 다른 지역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내 생각과는 달리 '배양마을'내에 '생가터'가 있단다. 그런데 왜 그렇게 '생가'에 대한 정보가 보이지 않은지 물었더니.. 

"아직 생가가 복원이 되지 않아서 이정표도 없고, 관련자료에도 아무런 정보를 넣지 못하고" 있단다.

...후손으로서 많은 아쉬움을 느낀다.

 

 

 

길을 물어서 물어서 간신히 생가터근처까지 찾아왔다.

할아버지의 생가터는 전시관 바로 뒤쪽으로 해서, 마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여느 시골마을처럼 배양마을 역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사람이 살지 않는 집들이 많아서 주변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

할아버지의 생가터 역시 어느 비어있는 집의 뒷담을 끼고 좁은 길로 들어가니 자그마한 공터가 나온다.  

 

 

 

생가터는 그닥 넓지는 않지만, 청정한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깨끗한 기분이 든다.

그 가운데, '삼우당 문익점 선생 생가 유지'라는 입석이 생가터를 확인해 준다.

 

 

 

생가터 끄터머리에 보기만 해도 벌써 수령이 오래되어보이는 거대한 은행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마을 입구에서 마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이곳까지 찾아오는데는 여긴가 저긴가 많이 헷갈리게 되는데, 이 때 이 은행 나무가 이정표가 된다.

멀리서 봐도 보일만큼 대단한 거목이다.

 

삼우당 할아버지께서 직접 심으셨다 하니, 거의 수령이 700년이 넘었다.

그럼에도 가지하나 손상되지 않고 그 잎이 매우 무성하다

 

 

 

그 자리에 서니 배양 마을이 한 눈안에 다 들어오는 자리이다.

이 곳에 '생가'를 복원하게 되면 좋은 문화 콘텐츠가 될 수 있을텐데 왜 이렇게 버려두고 있는지..아쉬움이 크다.

 

들은 즉슨,

이 땅은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주인이 수도 없이 바뀌어 왔고, 현재는 타씨 성을 가진 사람의 소유가 되어 있단다.

해서, 그가 좋은 의도로 양해를 해 주지 않는 이상 이 땅에다 생가를 복원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란다.

 

... 앞집도 그렇고, 이 땅도 그렇고..

어차피 주인이 직접 살지도 않고 방치되어 있는 땅..

왠만하면 적절한 수준에서 협상이 가능하지 않을까..싶은데, 정작 땅을 가진 사람은 아쉬울것이 없나보다..

 

이래저래 무능한 후손으로서 씁쓸함만 남긴채 등을 돌려 마을을 벗어난다.  

마을을 나와서는 바로 신안면에 있는 '도천서원'으로 향한다.

 

 

 

배양마을에서 단성교를 건너서 바로 좌회전하여 3번국도를 타고 2~3분만 더 가면 오른편으로 '문익점 신도비'와 '도천서원'안내표지판이 나타난다.

표지판을 보고 국도에서 벗어나 임도로 들어가면 바로 입구에 '문익점 신도비'를 모셔둔 신도비각(神道碑閣)이 서있다.

 

이 신도비각은 삼우당 할아버지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1847년에 경기도 강화도 수중석을 벌석하여 장장 천리길을 운반하여 세운 것이었는데,

어느 야인의 실화로 소실되었다가 1940년 경상남도 보조로 현 장소에 이건되었단다.

 

 

 

신도비각에서 백마산 기슭으로 3-400m만 들어가면 '도천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도천서원(道川書院)'은 1461년 세종대왕 7년에 사액되어 삼우당의 제사를 지내왔다. 그러다가 중간에 대원군시절에서 훼절됨에 따라 향사를 올릴곳이 없게

되자 향교에다 흥학당을 세워 매년 향례를 올리기도 하였단다. 그러다가 1891년 고종 28년에 정사를 건립할 것을 사림이 발의하여 본손들의 협조로 '노산정

사'를 건립하여 향례를 올렸으나 공간의 협소함으로 인해 1978년 사림과 본손이 발의하여 정사뒤에 '도천서원'을 복설하여 삼우당할아버지의 신실을 따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즉, 도천서원은 삼우당 할아버지의 향례를 지내는 신실이 모셔져 있는 곳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도천서원' 편액아래에 서 보니 백마산자락의 산등성이가 편안하게 눈안으로 들어온다.

 

 

 처마아래 도색도 선명하고, 그 새김도 나름 정교해서 나쁘진 않다. 오후햇살이 담장너머로 넘어가고 있다. 쓸쓸함이 밀려온다.

 

 

 

서원을 내려와서 우측으로 돌아가니 건물한채가 더 있다. 봤더니 '신안사재(新安思齋)'..? 이건 또 뭐지..?

설명서를 보니 할아버지의 묘각이란다. 1561년 명종대왕 16년에 전국자손이 합심하여 중건하고 그 후 수차 보수하다가 1941년에 중건된 건물이다.

 

나는 모르고 있었지만 후손들이 선조의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나름 많은 일들을 하고 있었나보다.

그런데 그런 노력들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힘을 많이 잃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럼에도 나는 할 말이 없는 사람이긴 하다. 지금까지 선조의 위업을 기리는데 힘하나 보탠것 없는건 두말할 것 없고

할아버지의 생애나 위업에 대해서조차 너무 무심했기 때문에..

오늘 하루는 스스로 선조에게 사죄하는 날로 잡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