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라 /제주 기행

그들의 사랑이야기에 누군들 눈물 떨구지 않겠는가, 이중섭 거주지와 미술관, 그리고 거리

노코미스 2012. 12. 9. 21:23

 

2012. 12. 06. 목요일  오전   날씨: 맑음

 

강정마을 해변가를 둘러보고 있으니 하루뒷날 출발한 2차팀들이 리조트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온다.

그들과 합류하여 바로 서귀포 이중섭 거리로 향한다.

 

 

이중섭 거주지 아래쪽 주차장의 회색빛 겨울 돌담에는 아직 마지막 잎새를 떨구지 않은 담쟁이가 엉겨붙어있다.

 

담쟁이를 볼 때마다 도종환의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않는' 그 담쟁이가 생각나지만

난. 그 시를 그닥 좋아하진 않는다.

 

시인은 자신이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그 때 가장 절망스러워보였던 담쟁이가 눈에 들어왔고

묵묵히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를 보면서 희망을 얻었다고 하지만

담쟁이는 시인이 이념의 아이콘으로 지적하기전에도 이미 그 자리에 있었고

그것은 이념이 아닌 존재였다.

 

난, 이념이 아닌 존재자로서의 담쟁이를 사랑할 뿐이다. 그것도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인..

담쟁이에는 이념이 없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주차장에서 이중섭 거주지까지는 검은 현무암의 돌담길로 이어져 있다.

 

 

이 중섭 거주지는 원래 고향이 북한이던 중섭이 1951년 한국전쟁을 맞아 피난와서 1년동안 거주했던 곳이다.

 

물론 이 집을 전체 다 사용했던 것은 아니고..

이 집은 이 마을 반장집이었고, 중섭은 건물 오른쪽에 열려있는 저 공간에서 더부살이를 하였다.

 

 

열려있는 문으로 들어가보니

공간은 성인 두 사람이 간신이 비껴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이로 된 2m 가량의 통로 겸 부엌을 지나니

그 공간이 끝나는 쪽에 1.4평 가량의 작은 방이 있다. 그 방안에 중섭의 사진이 모셔져 있고

누군가가 갔다놓은 꽃다발 하나가 놓여있다.

그리고 벽에는 중섭이 써 붙여놓았다고 하던 '소의 말'이라는 짧은 글이 붙어있다.

소를 무던히도 좋아했던 모양이다.

 

이 작은 공간에서 그는 그의 일본인 아내 남덕과 사랑하는 두 아들 태현, 태성과 함께 기거하며

비록 가난하고 반찬없는 찬 밥에 바닷게를 잡아 삶아 먹으면서 연명했을지라도

그나마 네 가족이 함께 할 수 있었던 몇 안되는 세월 중 한 시절이어서 중섭에게는 매우 행복한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현재 남아있는 중섭의 은박지 그림은

거의 제주도 피난시절 이곳에서 가족과 함께 하던 시간이 모티브이다. 아이, 가족, 게..

 

 

거주지 뒷편으로 중섭 미술관이 있다.

 

 

미술관은 1층과 2층으로 되어 있고,

1층은 중섭의 작품과 함께 일본 친정집으로 돌아가서 중섭을 그리는 남덕의 편지가 진열되어 있고,

2층은 제주도의 신진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전시실 내의 사진찍기는 금지되어 있고,

인증샷에 목마른 사람들을 위한 2층 계단아래에 특별히 포토죤이 마련되어 있다.

중섭의 '소'앞에서 연출샷 하나..

 

 

 

 

 

1층 전시실에는 중섭을 그리워하는 남덕의 안타까운 편지가 진열되어 있는 반면에

2층에는 반대로 일본으로 돌아간 아내 남덕과 아이들을 그리워하는 중섭의 편지 4통이 전시되어 있다.

둘의 사랑이 얼마나 절절한지..

그 그리움에 대한 표현이 얼마나 다정다감하고 솔직한지..

 

남덕은 여자라서 그러하다 하겠지만

남자인 중섭도 수단이 편지뿐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내와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어쩜 저렇게 솔직하게 표현하는지..

그 마음이 읽는이에게까지 전달이 되니

그 안타까운 현실에 남이지만 함께 눈물 흘려주지 않을 수가 없다.

 

턱이 길어서 아고리라는 닉네임을 받았던 중섭,

남덕이 너무 예쁘서 그녀의 발에게조차 아스파라거스 군이라는 애칭을 붙여줬던 그..

 

그들의 가족은 아고리, 남덕군, 아스파라거스 군, 그리고 태현과 태성 이었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아내와 아이들을 아내의 친정인 일본으로 떠나보낸 중섭은 부산, 통영으로 떠돌아다니다가

1956년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받다가 그해 9월 6일 서울 서대문 적십자 병원에서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는 가운데

끝내 혼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단다.

남덕여사는 아직 일본에서 살고 있으며, 한국에 한번씩 다녀간다고 한다.

 

살아서는 궁핍했으나 죽어서는 신화가 된 한 남자, 이 중섭.

1916년 9월 16일 평남 평원군에서 태어나 이 땅에서 불과 40년 살다간 한 남자를 이 중섭 미술관에서 만나고 나왔다.

 

 

 

미술관에서 도로변으로 나오면 바로 '이 중섭 거리'로 이어진다.

이 중섭 거리의 가로등 위에는 평면실사의 중섭작품을 오려 붙여서 시각적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중섭 거주지 근처의 몇 개 공방들은 개성있는 색감과 디스플레이로 관광객의  시선과 발걸음을 붙잡아 메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중섭 거주지 바로 아래 집의 '미루나무'찻집의 페인팅은 마치 프로방스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미루나무 건너편에 위치한 공방'트멍'

제주흙으로 빚는 돈물고 오는 물고기와 토우, 찻잔 그리고 나무 민속품을 제작하는 공방이다.

작품들이 개성있고 여주인도 친절하다.

 

 

 

그 옆에 '중섭공방'

중섭의 작품을 모티브로 하여 소품들을 제작하는 공방이다.

 

부부가 함께 작업하고 판매도 하는데, 가격도 착하고 작품도 개성있다.

 

제주도에서 틀에 박힌 싸구려 선물보다는 이런 공방에서 제작한 작가의 작품 하나씩 사서 선물하게 된다면

받는 사람도 참 행복할 듯하다.

 

 

오래된 낡은 슬라브 가옥에 중섭을 닮아가는 태중이 형이 운영하는 '중섭 식당'도 있고..

 

 

서귀포 올레 재래시장 올라가는 길 입구의 꽃집에는 벌써 크리스마스가 와 있다.

길 입구의 포인세티아가 전체 거리에 환한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 거리에서 볼 것은 딱 요만큼이다.

 

 

서귀포 매일 올레 시장 쪽으로 올라갈수록 제주시의 이중섭 거리 조성 사업의 키치한 방향성에 실망을 금할 수 없게 된다.

 

이 중섭 거리를 제주의 문화 예술의 거리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는 높이 살만하나

그 조성의 방향성이 문화 또는 예술 코드와는 엇나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문화 및 예술은 창의성 또는 독창성의 다른 표현이다.

 

그런데 그들이 조성하는 이 중섭거리에는 창의석 또는 독창성 대신에 획일성이 들어와 있다.

간판 조성작업을 한다는 미명으로 모든 가게의 간판을 하나같이 똑 같이 획일화하면서

각각의 가게들이 갖는 개성이나 창조성 또는 독창성을 모두 말살해 버렸다.

 

이 거리에는 예술이나 문화보다는 획일화된 상업적 전략밖에 보이질 않는다.

오히려 간판 조성 사업을 하지 않았다면 재래시장의 인간적 카오스라도 있지, 지금은 그것도 저것도 아무것도 없다.

어쩔꺼나..

 

제주도 행정당국의 빠른 자각이 필요한 시점이다.

( 이부분은 당일 제주도에서 요구조사차 나온 담당 공무원과 인터뷰한 내용이기도 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주도 공무원들이 바람직한 방향성 모색을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날도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자신들의 정책실행에 대한 의견조사를 하고 있었고

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나도 인터뷰 요청을 받게 되었는데

나의 느낌은 위와 같아서 그대로 말하였고 그들이 해놓은 일에 대해서 칭찬을 해 줄 수가 없었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모쪼록 나의 의견에 귀 기울여 주기를 바랄 뿐이다.

 

 

'이중섭거리 입구'

 

시간이 좀 필요하다.

 

 

 

 

점심은 이 중섭 거리에 있는  '대우정'에서 먹었다.

전복이 푸짐히 들어있는 '전복 영양밥'

그러나, 마아가린이 안습이었다.

 

70년대를 추억하고 싶은 분은 마가린을 넣어드시고..

깔끔한 제주의 맛을 즐기고 싶으시다면 그냥 간장에 비벼드시는 것이 좋을 듯하다.

멋도 모르고 식당이 시키는 메뉴얼대로 했다가 한동안 입안에서 빠다냄새가 사라지지 않아서

그것이 아쉬움이라면 아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