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2월 4일) 히타카쓰항에 내려서 러일 우호의 언덕, 미우다 해변, 킨의 은행나무, 한국전망대, 와타즈미신사,
에보시다케 전망대를 거쳐서 이즈하라마찌까지 내려와
우리나라사람이 운영한다는 호텔 대아에서 하룻밤 잠자리를 신세진다.
새벽에 창문밖으로 얼마나 바람소리가 거센지
바람소리에 잠을 깨어 새벽커튼을 살짝 걷어보니 와~
입실할 때는 밤이어서 잘 몰랐는데
아침에 보니 우리 호텔은 높은 언덕위에 위치해 있어서 전망이 참 좋다.
얼른 옷을 줏어입고는 만남의 광장이라는 이름을 붙인 호텔뒷 정원으로 나가본다.
해안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간신히 버티고 서있는 언덕위 몇그루 앙상한 나무가
실제로는 안스럽기 그지없었으나 사진상으로는 아주 멋진 피사체가 되었다.
해안라인을 제대로 보기 위하여 전망대에 서본다.
7시경 아침바다는 기운은 상쾌하나 색깔은 청명하지 못하다.
특히, 이 날은 비가 올 조짐이 있어서 그런지 더욱 희뿌옇다.
아침을 먹고는 이즈하라 시청근처에 있다는 카네이시 성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운하를 따라올라가니 '이왕조 종가 결혼봉축 기념비'라는 이정표가 보이고
그 옆으로 멋진 전통양식의 성문이 우뚝 솟아있다.
입구에 금석성(카네이시 성)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과거 대마도주 소씨 일가의 거주지였다고..
이 문은 성터로 들어가는 출입문인데
대마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문이라든가?
우리에게 있어서 아픈 역사의 한 단면을 차지하는 공간이다.
성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면 성은 없고
성터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우리는 정원구석구석을 살필 여유도 없이
그저 우리의 목적인 '덕혜옹주결혼 봉축비'만 향해 찾아올라간다.
카메라가 지난 여름 프랑스에서 바닥에 떨어졌던 충격으로 이렇게 가끔 촛점을 잃는다.
봉축비는 성문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성터 한 귀퉁이에 저혼자 쓸쓸하게 서 있다.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
그 옆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적은 석판이 있다.
조선국 제 26대 고종의 왕녀인 덕혜옹주는 1931년 5월 종무지공과 결혼하여 동년 11월에 쓰시마를 방문하였다.
옛 대마도주 종가당주가 조선왕녀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내도하였으므로 열열히 환영을 받았다.
이 비는 두분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하여 대마거주한국인들이 건립하였다.
한편, 청수산성에는 대마도민들이 경축하고 심었던 기념비와 철쭉이 지금도 잘 남아있다.
결혼생활은 많은 고난이 있었으나 딸 정혜를 낳아 서로 신뢰와 애정이 깊었다.
그러나, 양국 관계가 갈등이 심하여 두분은 1955년에 이혼하였으며, 무지공은 1985년에, 덕혜옹주는
1961년 귀국후 1989년에 별세하였다. 이제 역사에 묻혀있던 이 기념비를 재건하여 두분의 힘들었던 생애를
되돌아보면서 양국의 진정한 화해와 영원한 평화를 희망한다"
사실 봉축비는 덕혜옹주 이혼후에 버려졌다가 최근 한국 관광객들이 출입하게 되면서 재건하게 도었다고 한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알면 알수록
일본과 한국의 역사가 참 서글퍼다는 생각이 든다.
돌비석에 새겨진 '양국의 진정한 화해와 영원한 평화를 희망한다'라는 글귀하나로 극복될 역사면 얼마나 좋을까..?
성터에 떨어져 있는 붉은 동백을 보니
정략결혼으로 떨어져 흩어졌을 덕혜옹주의 청춘이 연상되어 더욱 서글펐다.
덕혜옹주는 13세되던 해에 일본의 정략에 의해 대마도주 소 다케유키에게 시집을 오게 되었고
훤칠하게 잘 생긴 소 다케유지는 몇살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인물좋고 예술적 감성이 뛰어났던 순수 대마도 청년이었다는데
이미 애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서로가 이 결혼에 대해 좋았을 명분은 없었던 것 같았다.
게다가 자신이 처해져 있는 여러가지 상황상 낯선 일본땅에서 이래저래 따돌림을 많이 당한 것 같기도 하고
정체성에 혼란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의인지 타의인지는 모르나 오랜동안 정신병원에서 생활하기도 하고..
나라잃은 왕녀의 삶에 어느누구도 관심가져주지 않은 이국에서의 그녀의 삶은 참으로 추웠겠다 싶다.
그래서 해방되고 1955년에는 의미없는 결혼생활을 접게 되고, 1969년에 한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봉축비에서는 덕혜옹주와 무지공과의 관계가 딸 정혜를 낳은 후에 서로 좋아졌고
단지 양국간의 갈등으로 인하여 마치 둘이 이혼을 한 것처럼 설명하고 있으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나라잃은 비운의 공주 덕혜옹주의 일생은 생각보다 기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 역시 상세히는 모르는 일이라 인터넷에서 덕혜옹주의 삶에 대해 몇 가지 알아보았다.
덕혜옹주는 고종이 60세 되던해 후궁 복녕당 양씨와의 사이에서 경술국치(1910) 뒤인 1912년 덕수궁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고종의 고명딸로서 5살때 딸을 위해서 준명
당에 독립유치원을 만들어줄 정도로 아버지의 사랑이 지극했다고 하군요. 총독부는 처음에는 그를 왕공족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것을 꺼려했으나 1917년 총독 데라우
치 마사타케의 명으로 왕공족으로 정식 인정되었습니다. 이름 없이 "복녕당아기(福寧堂阿只)"라고 불리다가 고종 사후인 1921년 5월4 일(양력) 덕혜옹주라는 이름을
받았죠. 고종은 환갑의 나이에 본 아이이고, 장성한 왕자들 사이에서 태어난 옹주를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예뻐하였답니다
얼마나 옹주를 사랑했는지 하루는 유모가 젖을 먹여야 한다며 고종 품에 있는 옹주를 데리고 다른 방으로 가려 하자 고종이 유모를 막으며 "과인이 보는 앞에서 옹주
의 젖을 먹이도록 하라. 옹주가 건강하게 젖을 잘 빠는지 보고싶구나."라고 하여 유모를 당황하게 했지만 고종은 옹주가 건강하게 젖을 잘 빠는 것을 보자 몹시 흐뭇
해 했다고 하네요. 게다가 옹주와 함께 대전에서 잠들며 자장가를 불러준다든지, 옹주가 밥을 먹으면 항상 자신의 수라 옆에 옹주의 상을 따로 받아 같이 먹는다는지
하는 행동은 궁중 사람들의 마음까지 따스하게 했다고 합니다. 1919년, 고종은 한 많고, 비극적인 군주의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눈을 감으면서까지 그는 딸 덕혜를 생
각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지는데요.
고종의 사랑을 받은 덕혜였으나 옹주의 궁궐 안의 생활은 평탄 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이미 고종은 영친왕 이은의 아내로 일본여자 마사코를 며느리로 맞이한 전례가
있어 이번에는 그리 하지 않으리라 마음 단단히 먹고, 옹주의 배필로 민씨 총각으로 점지하고 몰래 일을 수행하려 했지만 이를 알아챈 일본이 재빨리 대마도주와 강
제 혼인을 시켜버렸습니다. 13살의 나이로 영친왕 이은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되고, 그 곳에서 옹주는 조국을 잃어버린 왕녀라
는 비아냥을 받으며 학습을 했죠. 그리고 그녀는 1931년 5월 8일 대마도주인 종무지와 강제 혼인을 하여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결혼을 해서도 여전히 자신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왕녀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고 지냈어요. 그리고 남편인 종무지와의 정략결혼이 좋을리도 없었죠. 종무지는 대대로 대마도에서 살아왔고, 옹주
와 결혼을 하는 조건으로 백작의 직위를 하사받게 되어 많은 과수원과 땅을 상금으로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궁합은 그리 좋지 않았으며 심지어 종무지
는 옹주를 강제로 범하며 딸 마사에(정혜)를 낳게 했답니다. 그러다가 결국 이혼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딸 마시에(정혜)의 출산후 지병. 그리고 어린시절 고국을 떠나
와 향수병으로 인한 우울증등 정신병력을 겪고 있었기에 종무지에게 버림 받았다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그리고 이미 종무지는 애인이 있었다고 하구요. 그는 이혼
하자마자 애인이랑 재혼을 했다고 하는군요~
어쨌든 혼자가 된 덕혜옹주는 혼자 힘으로 딸 마사에를 기르면서 어렵게 살고 있었죠. 그러나 딸 마사에는 어머니가 조선의 왕녀라는 사실을 아주 민감하게 거부 반
응을 하면서 어머니를 반대했었고, 순수한 일본인이 되고싶다고 자주 말을 해 덕혜옹주와 심한 말다툼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사람에 대한 대우가 좋지 못
한 것으로 볼 때 그다지 좋은 사이의 모녀는 아니였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아뭏든, 딸 마사에는 1955년 행방불명이 됐는데 첫번째 가정은 마사에가 등산을 나갔다가
실종이 되었다고 하고, 두번째는 이미 그 전에 히로시마 원폭 투하시 히로시마에 있다가 죽었다고도 합니다.
딸의 죽음과 자신의 고단한 삶에 염증을 느낀 옹주는 정신질환을 겪게 되어 병원에 입원을 하고, 그녀의 곁으로 자주 이방자(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 의민황태
자 이은(李垠)의 비) 여사가 다녀 갔었습니다. 너무도 심각하게 정신질환(우울증)을 겪고 있은 탓에 투신 자살 소동이나 손목을 긋고 생을 마감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
지 않는등 힘든 나날을 보내던중 1962년 1월, 옹주는 결국 그렇게도 오고싶어 했던 고국으로 돌아올수 있게 됩니다.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린 덕혜옹주를 본 모든 사람들은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수 없었다고 합니다. 풀각시처럼 아름답던 소녀의 모습을 기억하고 계신 상태에서
위 사진을 보면 왜 그런지 충분히 이해가 가실테죠. 그녀는 귀국 후 헌종이 사랑하는 경빈 김씨를 위해 지었다는 낙선재로 들어와 국가의 보조금을 받아며 생활했고
71세때(귀국 20년만) 에서야 양덕혜라는 이름의 호적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굴곡진 인생을 살아오던 옹주는 결국 1989년 4월 21일, 78세 때 실어증과 정신병으로 고생
을 하다가 한 많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노년의 덕혜옹주는 정신이 맑게 돌아온 어느날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런 낙서를 남기기도 했답니다. "나는 이구 씨가
보고 싶다 (이은 황태자의 아들), 나는 비전하가 보고 싶어요(이은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나는 낙선재서 살고 싶어요"
덕혜옹주를 간병했던 이방자 여사는 병상의 그녀에게 자주 이런 말을 했답니다. "빨리 깨어나세요. 이대로는 너무나도 일생이 슬퍼요..."
카네이시 성 뒤편 언덕에 위치한 대마역사 자료관으로 올라가니 입구에 '고려문'이라는 팻말이 있다.
비문옆으로 실제 출입문이 있는데, 이는 옛 이즈하라 성문으로 조선통신사 행렬을 맞이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하여
'고려문'이라 명명하였단다. 현재의 문은 태풍으로 인해 훼손된 것을 1989년 다시 복원하였단다.
공식적인 고려문을 통과하지 않고 그 옆으로 난 길로 올라가니 길 모퉁이 정원에 '조선통신사지비'가 세워져 있다.
쓰시마번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의 국교회복을 위해 전력을 다하였고 그 결과 약 200년간(1607년-1811)
12회에 걸쳐 통신사절이 쓰시마를 방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통신사의 방문으로 이루어진 일본과 한국간의 활발한 교류와
우호관계를 21세기 한일 우호의 지향점으로 삼고자 1992년 이 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런 글귀가 과연 그들의 진심일까?
가이드가 안내하는 쪽으로 가니 고려문안쪽 마당 한켠에 '성신지교린'이라는 글씨가 쓰여진 석판이 서 있다.
'우삼방주(아메노모리호슈)선생현창비'라?
일본 최초의 한국어 학습교재인 <교린수지(交隣須知)>의 저자로서 조선어와 중국어에 능통하였던 17세기 일본의 외교관이자 교육자였던
아에노모리 혼슈 선생의 외교정신인 '성신교린(誠信交隣)'을 새긴 비석이다(인터넷 펌)
고려문앞을 지나 돌아나오는 길에 마주보이는 오른편 건물이 '대마 역사 자료관'이지만
우리가이드는 그런 것에는 그닥 관심이 없고..
다만 빨리 일정마치고 면세점엘 가야하니
발걸음이 급하다.
통신사지비 언덕 건너편으로 '카네이시 성문'이 내려다보인다.
도주의 집터답게 명당터에 자리잡았다는 생각이 든다.
..
가이드상~
같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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