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1.23(토요일)
북경여행 둘째날입니다.
오늘 주요 일정은 고궁관람입니다.
어제 오후부터 저녁까지 고것 조금 걸었다고..
오늘은 오른쪽 다리에 이상증세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마비가 오기 시작하면서 걷는 것이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지금껏 아무리 다녀도 이런일이 없었는데 나이는 속일수가 없나봅니다.
그러다가 괜찮아 지겠거니 하고는 무시해봅니다.
우선 천안문 광장으로 갑니다.
천안문광장에서 가장 중요한 볼거리는 국기 게양식과 하강식이지만 그것은 공식일정보다는 개별 일정으로 넘겼습니다.
동행자 일부는 오늘 새벽 게양식에 갔다 왔답니다. 저는 그닥..
천안문 광장은 만리장성, 고궁과 함께 베이징을 대표하는 주요 상징물로서 그 자체로서도 중요성을 갖기도 하지만
우리같은 관광객들에게는 우선 고궁에 입장하기 위한 관문으로서 의미가 더 큰 듯 합니다.
천안문은 명대의 영락제15년(1417년)에 고궁의 정문으로 세워졌었고, 당시에는 승천문(承天門)이라고 하였다가
한때 화재로 소실된 후 청대 1651년에 개축되면서 천안문이라 부르게 되었단다
남들 다 찍는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배경으로 한 인증샷하나도 제대로 못찍고
인파에 밀려서 일단 안으로 드러갑니다.
천안문을 들어왔지만
공식적인 자금성의 정문은 오문(午門)입니다.
오문은 1420년에 처음 지어졌으나 화재로 여러차례 소실되었다가 현재의 것은 1647년 청의 순치제에 의해 재건된 건물이랍니다
오문은 음양오행설에 따라 북쭉의 음기를 막기 위해 정남향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높이가 무려 38m, 두께 36m랍니다.세계에서 가장 큰 성문이라는군요
아마 오문 입구에서 고궁박물관 입장권을 구입하지 싶습니다. 벌써 기억이 어슴프레합니다
여기서 잠깐~
고궁 박물관의 역사에 대해서 개략하고 지나갈까요
고궁은 명, 청대 궁궐로 옛 명칭은 '쯔진청'이며, 1420년에 최초 건립되었다.
전세계에 현존하는 목조 건축물중 그 규모가 가장 크며 가장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곳이다.
1924년 청대 마지막 황제 푸이가 고궁으로부터 축출당한 후, 1925년 고궁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고궁 박물관은 고대 건축물, 궁정 역사유적, 역대 예술품 등을 중심으로 전시하는 대형 종합 박물관이다.
대충 이런 안내문을 읽고는 태화문으로 향합니다.
오문을 통과하면 5개의 다리가 나옵니다. 금수교(金水橋)랍니다.
분명 5개의 다리는 어떤 의미가 있겠지요 당연~
5개 다리는 유교경전인 중용이 말하는 다섯가지 기본적인 덕 즉, 인, 의, 예, 지. 신을 상징한답니다.
아마도 청대에는 유교적 윤리가 강조되던 시기여서 억지로 갖다붙인건 아닐것입니다.
태화문(太和門)은 원래 1420년 명의 영락제 18년에 지어 봉천문으로 부르다가 1535년에 황극문 등으로 개명했다가
청대에 들어와서 1645년에 다시 한번 더 태화문으로 개명하였답니다.
1888년 청의 광서제가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하여 태화문으로 한번 더 개명하였답니다.
'하늘같이 크게 융합한다'는 의미의 태화문은 청나라 황실의 만주족이 한족과 잘 융합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랍니다.
실제로 소수민족인 만주족(청)이 한족(명)의 터전인 북경에서 오랜시간 왕조를 끌고 올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한족과의 융합정책 때문이라죠~
태화문은 9칸 넓이, 4칸 폭에 1,300제곱미터의 면적을 가진..고궁내에서 가장 큰 문이랍니다.
명대에는 황제가 이곳에서 아침 조례를 했다고 하는군요~
태화문에서 바라본 태화전의 모습입니다.
태화전은 명나라때 황제가 조정이나 국가의 의례를 행하는 주요 행사를 치러던 곳이랍니다.
즉, 황제 즉위, 화태자의 탄생축하, 결혼, 왕후 책봉, 조서반포 등의 의식이 모두 저곳에서 거행되었답니다.
그래서 태화전의 건축양식은 다른 건물들에 비해서 특히 장엄하고 숭고한 느낌을 줍니다.
3단의 하얀 대리석 기단위에 건축물을 올리고,
기단에는 총 1488개의 기둥과 기단아래로 1142개의 용머리 배수구를 만들어서 웅장한 느낌을 더해줍니다.
청대에는 가장높은 권위를 상징하는 건물은 모두 3단 대리석 테라스를 기단으로 올려서 그 위에다 건물을 지었던 것 같습니다.
천단공원에서 보았던 기년전, 원구전이 그러하더니, 태화전이 그러하군요~
기와는 역시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황금색 유리기와를 얹어서 더욱 화려한 느낌을 줍니다.
기단위 태화전 바로 앞으로는 왕궁의 해시계와 다양한 동물상들이 놓여 있습니다.
장수를 기리는 학과 거북, 그리고 화재예방을 위한 물항아리, 그 시대 곡식을 계량하던 됫박등이 있습니다.
이 대형 물항아리는 유독 화재가 많았던 목조건물에 화재가 날때를 대비한 것이겠지요~
휘리릭 훓어보고는 중화전으로 고고~합니다.
중화전 앞에서는 건축물보다는 민속화관을 머리에 이고 있는 어린 숙녀의 아름다움에 빠져 건물은 본체만체 건너뜁니다.
큼직한 눈망울에 자기 얼굴만한 모란꽃을 머리에 이고 있는 어린 숙녀의 모습이 똘망똘망 아름답습니다.
저 화관은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대문화유물 즉 만주족 유물인것인지
아니면 절대다수민족인 한족의 유물인지가 궁금합니다. 모란꽃은 한족이 좋아하는 꽃이었던 거 같은데..
그렇다면 한족의 문화일까요?
아니 아니, 서태후가 이와 유사한 장식물을 머리에 얹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청대문화가 맞을것 같기도 하군요~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의상 '차빠오'라고 하나요? 그것은 어느 민족의상양식인가요?
청대 즉, 만주족의 의상양식아닌가요? 근데, 사진에 나와있는 청대사람들 의상과는 다소 달라보입니다. 멍미~?
궁전 한쪽 한산한 곳에서는 전통의상을 대여해서 사진을 찍어주는 곳도 있는데
많은 젊은 여성들이 이런 의상을 입고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차빠오와는 확실히 다릅니다.
어느민족의상인가요~~~~?
보화전으로 바로 뛰어 넘습니다.
1420년 명의 영락제의 의해 최초로 지워졌고, 황제의 즉위식을 거행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답니다.
그러나, 청대 건륭제 때인 1789년 이후로는 황제가 집전하는 과거 시험인 전시를 치르는 시험장으로 사용된 건물이랍니다.
태화전이나 보화전이나 특별하게 건물의 차이점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또 대충~
보화전 내부는 기둥이 많이 없답니다. 이는 과거보는 사람들이 기둥뒤에서 컨닝을 많이 해서 아예 기둥을 없애버린 것이라는데..
기능이 그랬다면 일리는 있어보입니다.
사실,
보화전의 보물은 다른 곳에 있답니다. 이 '운룡대석조'
길이 17m, 폭 3m, 두께 1.7m, 무게 200톤의 대리석 조각물.
이는 용이 여의주를 쫓아 구름 사이로 승천하는 모양을 새긴 조각인데, 이것이 하나의 자연석에 새겨진 것이랍니다.
첫조각은 명대초기에 이루어졌지만, 청의 건륭제 26년 (1761년)에 구패턴은 밀어버리고 새 패턴으로 새로이 조각을 했다는군요
문제는 저 어마어마한 무게의 대리석을 원산지(베이징의 서쪽 근교 퐝산)에서 이곳까지 어떻게 움직여 왔느냐는 것인데
이곳까지 옮겨오기 위해서 겨울까지 기다려서, 길 위에 도랑을 파고 물을 부어 얼린 후 밀어서 운반을 해 왔다고 하네요~
황제의 영광을 위하여 못할일이 없었던 그 시절의 이런 잔인한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감동을 받아야 할까 고민하며 물러납니다.
시대를 초월하여 불쌍한 평민들입니다.ㅠㅠ
하지만 곧바로 마음을 바꾸어 다시 단순한 관광객으로 돌아갑니다.
당시의 화려하고 정교했던 장식기법들도 살펴보기도 하고..
청대 군사자료실에서 본 사진인데..
청대 황제중 제일 오래살았다던 건륭제 아닐까요~?
자, 여기까지가 외조(外朝)였습니다.
이후부터는 내정(內廷)에 해당합니다.
외조는 국가적인 행사나 의식이 치러지는 공간이었다면, 내정은 황제가 정무를 처리하고 황후나 궁녀들과 일상생활을 하던 곳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내정에는 건청궁, 교태전, 곤령궁 등이 속하고. 또한 동쪽의 동륙궁과 서쪽의 서륙궁이 포함됩니다.
동륙궁에는 왕실의 유물이 전시된 진보관을 비롯해 주로 후궁들의 거처가 있으며
서류궁에는 서태후의 침실이었더 저수궁을 비롯해 서태후와 관련된 장소와 건륭제의 서재로 사용된 양심전이 있습니다.
저는 이제 본청 건물들은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충 살펴보고
서태후가 기거했다는 서륙궁으로 얼를 가보고 싶습니다.
우선, 건청문을 지나서 건충궁을 들여다보지만 앞에서 보아왔던 다른 건축물과 별반 다를 바 없어서 건성건성 보고는 교태전(交泰殿)으로 넘어갑니다.
건청궁은 황제의 침실 겸 집무실이어서 내부 양식이 외조건물들과 비슷했지만
교태전은 황후와 관려된 장소라 조금 다를까 싶어 발걸음을 잠시 멈추어 봅니다.
사람들도 그 앞에서 엄청 멈추었습니다.
교태전은 명나라때는 황후의 침실로 사용되었고, 청나라 때는 황후의 공식업무와 옥새를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라네요.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은 교태전을 이름만 봐도 황후와 관련된 장소라고 단언한 것임입니다만
교태전의 의미는 사실상 '하늘과 땅의 통합'이라는 뜻이랍니다.
그러니 교태전이라 해서 반드시 황후와 관련되어야 할 궁전은 아니지만
아뭏든 실제로는 황후가 주로 사용했다 하는군요.
황후는 이곳에서 누에치기와 비단짜기 등을 선보여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어쩌구 저쩌구..
내부에는 별 볼 거 없습니다.
이곳 '곤녕궁(坤寧宮)이야말로 정말 황후와 직쩝 관련된 곳입니다.
명대(1368-1644)에는 황후의 침실로, 청나라(1616-1911) 때는 궁중의 제례의식을 치르던 곳이라는데..
명의 말년 1644년 이자성의 난때 농민군이 궁으로 밀려들어오자 이곳에 머물던 황후가 목을 메 자살한 곳이기도 합니다.
왕은 신무문 바깥 경산에서 목을 메어서 자살하고, 황후는 이곳에서 목을 메었군요~
그 이후 청나라 순치제때(1655년), 만주족 양식으로 재건축하였다는군요.
그때, 동쪽의 동난각은 황제와 황후가 초례후 3일을 보내던 곳이라는데..개방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 초야를 치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저렇게 머리를 처박고
마치 초야 치르는 신혼방 구경하듯이 하고 있습니다.
곤녕궁 뒷문쪽으로 돌아나오니 어화원과 연결되는 노랑색과 초록색의 유리기와 행랑이 아름답습니다.
중국의 정원은 역사는 오래 되었어도..
아름답다는 느낌을 잘 받지 못합니다.
어화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무들이나 전시물들의 관리와 배치가 다소 무질서해보입니다.
그래도 의무적으로 한바퀴 대충 돌아줍니다.
천안문에서 여기까지 계속 직진이었습니다.
이제
어화원 서쪽을 맴돌아서
우리에게 서태후로 알려져 있는 자희 태후의 침실과 개인식당이 있는 서륙궁으로 갈겁니다.
여기서 잠깐 쉬어서 가겠습니다.
'남 나라 > 13-11 베이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지막 날 만리장성 오르기 (0) | 2014.04.13 |
---|---|
'청'이라는 대 제국을 한 입에 말아먹은 서태후 '자희'의 흔적을 따라 (0) | 2014.04.10 |
베이징의 첫날 밤 (0) | 2013.12.31 |
하늘의 신을 모시는 제단이 있는 곳, 천단공원(天壇公園) (0) | 2013.12.30 |
2박 3일 북경 도깨비 투어 (0) | 2013.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