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아침
황강 둘레길을 따라 함벽루를 찾았다가 덤으로 연호사를 알게 되었었는데..
그제는 지난번 출발점이 아닌
읍으로 들어가는 대로변에 죽죽길 이정표와 더불어 연호사 이정표가 또 있다.
출발지점이 다른 이정표이다.
그래서 둘레길이 아닌 죽죽길로 들어가는 연호사는 어떤 모습일까 해서 이정표를 따라 들어가본다.
대로변에서 연호사 이정표를 따라 죽죽길로 들어서니 왼편으로 대야성 자락이 있고
대야성 북면자락에 아담한 누각이 잘 정돈된 모습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올라가보니 '신라충신 죽죽지비'라는 편액이 붙어있는 비각이다.
죽죽장군은 이미 앞에서 포스팅한 바 있는 것처럼
642년 삼국시대 대야성 성주인 김품석의 부하로서 김품석이 백제에게 항복하자 할 때
애국충정으로 목숨을 바쳐 백제에 항거했었던 군인이었다.
당시 신라여왕이었던 선덕여왕은 죽죽의 이런 충절과 용맹을 전해 듣고는 급찬의 관등을 내리고
살아남은 처자식들은 왕도인 경주로 옮겨와서 살도록 하였다 한다.
그리고 그의 애국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조선 인조 22년(1644년)에 합천군수 조희언이 대야성 북편으로 화강암 비석을 건립하였고
현재, 그 앞을 지나는 길을 '죽죽길'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길을 따라 강변쪽으로 계속 따라가면 연호사 종무소로 이어진다.
연호사는
이 대야성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신라의 원혼들과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랑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와우선사가 설립한 것으로 이미 포스팅하였다.
대야성이 위치한 황우산을 놓고 봤을 때
남쪽 암벽위에 연호사가,
동쪽 기슭으로 죽죽길과 비각이 위치해 있다.
대야성(지금은 황우산)을 두고 둘레길로 빙 둘러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대야성의 흔적을 찾기 위하여 위쪽으로 올라가봤으나
아주 작정하고 올라가지 않으면 지금은 흔적찾기가 쉽지 않은 듯 하다.
기록에 의하면 대야성은
『신라 서부지역의 요새로서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가, 그리고 통일신라 말기에는
신라와 후백제 및 고려가 각축을 벌였던 대표적인 접전지역이었다.
642년(신라 선덕여왕 11)에는 백제의 침공으로 함락되어,
성주인 도독 김품석과 그의 부인(무열왕 김춘추의 딸)이 죽고,
신라인 1천여명이 포로가 된 곳이기도 하고, 또한
통일신라말기인 920년에는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이 여러차례에 걸쳐
이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그 뒤에는 고려가 점령하였다가 다시 후백제에게로
넘어가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던 지역이다. 이 성은 936년에 최종적으로 고려가 차지하였다.
대야성은 강변을 이용해 해발 90m의 취적산 정상 부분에 흙과 돌로 쌓아 올렸으나
지금은 다 허물어지고 약 30m정도의 성벽이 남아있을 뿐이다.』
다시 내려와서 왔던 길로 돌아선다.
꺾일지언정 굽히지 말라는 죽죽의 이미지때문인가..
그 앞으로 나 있는 길도 굽힘없이 죽죽 이어져 있다.
'내 나라 > 영남 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철지난 강주마을, 그래도 좋아~ (0) | 2015.09.25 |
---|---|
의령 솥바위의 전설과 정암철교의 추억 (0) | 2015.08.10 |
합천 8경 중 한 곳, 함벽루의 아침 산책 그리고 연호사 (0) | 2015.08.03 |
주남 연꽃 생태공원 (0) | 2013.07.28 |
진해 벚꽃 엔딩~ (0) | 2013.04.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