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넬리 (2011)
Farinelli the Castrato
8.8
언제나 정보력이 떨어지는 나는 아주 사소하고 소심한 동기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이번 영화역시 주인공역을 맡은 배우가 이전에 인상적으로 봤던 '글루미 선데이'에서 젊은 요절 작곡가 역으로 나왔던
스테파노 디오니시라는 아주 사소한 사실 때문에 선택하게 되었다. 더 궁금했던 것은, 그 이후 좀 더 최근에 본 영화 '비발디'에서
비발디 역할을 했던 노배우 역시 이 배우였다. 호기심이 가중된다.
이 배우는 음악 전문 배우인가..?
어째 더 재미있을 거 같다는 느낌..그래서 더욱 더 이 영화가 땡겼다고나 할까..
내가 본 순서로는 글루미 선데이-> 비발디-> 파리넬리이지만
그가 연기한 순서는 파리넬리->글루미 선데이->비발디이다. 약 10연년간에 걸친 흐름이다.
그래서 그런지, 파리넬리에서 보여주는 양성적이고 풋풋한 미모를 비발디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 간극을 찾기 위하여 더더욱 파리넬리를 보고 싶었다. 순전히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글루미선데이에서의 후줄근한 젊은 작곡가의 모습도 비발디에서의 병약한 중년의 모습같은 것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울 뿐 아니라 오히려 싱싱한 젊음이 펄떡펄떡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한 청년을 본다.
보니, 20대 중반에 한창 테스토스테론이 왕성할 때 찍은 영화이다.
보는내내 눈과 귀가 즐겁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파리넬리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화려한 무대의상,
게다가 실제로도 그랬다는, 거세된 카스트라토의 양성적 아름다움까지..
영화는 1705년에서 1782년까지 전설적으로 살다간 실존인물 카스트라토 '까를로 브로스키'의 삶을 각색한 영화이다.
실제로는 어떻게 거세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하지만, 영화에서는 8살 위의 형이 자신의 음악을 완성시켜 줄 악기로 사용하기 위하여
어린 동생을 거세한 비운의 가수로 그려져 있다.
음악적 재능이 그다지 뛰어나지 못한 형 리카르도는 이미 어릴 때부터 동생의 목소리가 얼마나 고귀한지
그리고 자신의 곡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방법은 동생의 목소리를 통하는 방법 뿐이란 걸 알고는 자신에게 맡겨진
어린동생의 운명을 바꾸어버린다.
이후로 둘은 하나가 되어서
형은 동생의 목소리에 맞는 곡을 쓰고, 동생은 형의 곡을 재해석하여 경이로운 목소리로 완성시켜주는 관계를 넘어서
사랑까지도 공유하는 묘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시작은 동생이하고 마지막 씨앗은 형이 뿌리는..
마지막 그의 연인 알렉산드라의 몸에 잉태된 아이도 형과의 합작품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사실인지 알 수는 없다. 어쨋든 실제의 삶에서도 조카가 그를 마지막까지 돌봐줬다고 하니..
영화는 상당히 자극적인 소재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지만 실제 그의 삶이 극적이긴 했지만 그렇게 자극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실제 파리넬리는 그의 천부적이고 치유적인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은 32살까지였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오히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필립 5세의 시종역할을 하면서 정치와 외교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더 큰 역량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그의 전반적인 삶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였다고 볼 수도 있겠는데..
그럼에도 이 영화는 그의 노래부르는 시기에만 촛점을 맞추다 보니
후반의 이야기를 억지스럽게 급마무리해간다는 아쉬움이 든다. 그래서 그런건지 뒤로 갈수록 힘이 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수로서의 전성기모습을 재연하는 동안 들을 수 있었던 현란한 바이브레이션과 아름다운 선율들은 대단한 선물이었다.
영화속에서도 여성관객들은 그의 소리에 심장이 멎고 졸도를 하기도 한다.
그의 목소리는 좋은 마에스트로가 없으면 소용이 없는 음악적 도구에 불과하다고 악평을 한 헨델마저도
자신의 곡 '울게 하소서'를 부를 땐 숨쉬기를 힘들어할 만큼 그의 소리는 그 자체로서 아름다울뿐 아니라 숭고한 부분이 있었다.
인기로 치자면
현대 대중 음악사에서 빛나는 엘비스 프레슬리나 마이클 잭슨에 비견되거나 그 이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자신의 공연장에서 책을 보고 있는 왕녀의 독서까지도 멈추게 하고
자신이 상당히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그녀가 끝내는 이성을 내려놓고 그에게 사랑을 구걸하게까지 하였으니까..
그런 대단한 마력을 가진 그였지만,
어쨋거나 그는 혼자서는 씨를 뿌리지 못하는 카스트라토였을뿐이고, 사랑의 마지막 마무리는 결국 형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비운의 가수였다.
자신의 일부가 되어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고 자신을 돌봐주는 형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늘 공유하던 그가
이 저주받은 운명이 형에 의하여 계획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눈치채면서 부르게 되는 헨델의 '울게하소서'는
마치 자신의 운명을 노래하는 것 같아 더욱 처연하였다.
결연하고도 차분한 표정으로 노래하는 슬픈 카스트로트의 하얀 분바른 얼굴과
어린소년의 아랫도리에서 올라오는 빨간 피빛이 오버랩는 장면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한숨이 '하~'하고 흘러나오게 한다
실제 당대 사람들의 머리속에도 그에 대한 이미지는 이렇게 아름답고 강한 임펙트를 가진 모습으로 오랫동안 기억되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 무대를 끝으로 더 이상 대중 공연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소모하지않고 스페인 왕 한 사람만을 위한 가수가 되기로 하였으니까..
Lascia ch'io pianga La durasorte
E che sospiri La liberta.
E che sospiri E che sospiri La liberta.
Lascia ch'io pianga La durasorte
E che sospiri La liberta.
울게 버려주 슬픈 운명에
나 한 숨 짓네 자유 위해
나 한 숨짓네, 나 한숨 짓네 자유 위해
울게 버려주 슬픈 운명에
나 한 숨 짓네 자유 위해
Il duol infranga Queste ritorte
De' miei martiri Sol per pieta,si
De' miei martiri Sol per pieta
끊어 주소서 고통의 끈을
나의 형벌을, 다만 자비로
나의 형벌을 다만 자비로
Lascia ch'io pianga La durasorte
E che sospiri La liberta.
E che sospiri E che sospiri La liberta.
Lascia ch'io pianga La durasorte
E che sospiri La liberta.
울게 버려주 슬픈 운명에
나 한 숨 짓네 자유 위해
나 한 숨짓네, 나 한숨 짓네 자유 위해
울게 버려주 슬픈 운명에
나 한 숨 짓네 자유 위해
'파르넬리'로 불리는 까를로 브로스키 (1705~1782)
파르넬리는 당시대에 가장 유명한 가수였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어쩌면 전 시대를 망라하여 가장 훌륭한 가수 중 한명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카스트라토 가수라는 직업이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성과 유명세는 아직까지도 지속될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파르넬리는 자신이 살아생전에 유사신화적인 이런 상황을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된 주요 이유는 그의 양성적인 아름다움도 분명히 작용했겠지만
그것보다는 그의 독보적인 목소리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파르넬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매우 능수능란하게 활용하였을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폭넓은 옥타브, 정제된 인토네이션뿐만 아니라 그의 경쾌한 발성 등을 칭찬하였다. 그의 성량의 폭은 3개반 옥타브를 오르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떤 기록에는 그가 한번의 호흡에 250여개 노트를 발성했고, 한 노트에 1분이상 호흡이 유지되기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시대의 유명한 음악사가 카를스 부르네이는 말하길 '파리넬리는 그렇게 오랜시간 그의 노트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불가능하다고 믿었었다. 그들은 그가 어떤 특별한 악기를 숨겨두고 있어서 그것으로 소리를 내고 있고 다른 숨구멍으로 호흡을 한다고 믿었었다고 말한다. 파리넬리는 자신의 타고난 비상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너무 폭넓은 성역을 보이지 않아도 되는 간결한 작곡을 선택하는 쪽으로 일찌기 방향을 틀기로 결정하고는 좀더 차분하고 순수한 악보를 선호하였다고 한다
파르넬리의 특별한 운명도 그의 리젠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시대의 다른 카스트라토들이 그랬듯이 거성 파르넬리(Farinelli)는 최절정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던 32살이라는 약관의 나이에 무대에서 내려와 오로지 스페인의 왕 필립 5세 개인만을 위하여 노래하기로 결정한다.
카를스 부르네이에 따르면, "파리넬리가 도착하자, 이자벨 왕비는 왕의 방에 부속되어 있는 접견실에서 일부러 콘서트를 개최하였고, 그곳에서 이 가수는 가의 가장 매혹적인 노래 중 하나를 불렀다. 필립이 처음으로 놀라움을 드러내었고, 그리고 감동받았다. 두번째 만남에서는 칭찬과 찬사로 그를 이끌면서 이 가수를 그의 방에 들어오도록 하였다. 왕은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재능에 충분한 보상이 될 수 있을지..그리고는 보장했다. 자신이 그를 거부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파리넬리는 간청했다. 자신이 왕의 옷을 입히고 면도를 도와주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왕이 병에 걸린 이후로부터 가수는 그를 치료하는 책임까지 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필립 5세(1700~1746)와 페르디난도 6세(1746-59)의 재위 기간동안 20여년 이상 지속되었던 파리넬리의 괄목할만한 스페인 경력이 시작되었다. 다른 많은 카스트로 가수들이 대중들의 눈앞에서 인기가 추락하는 반면에, 파리넬리는 한창 인기가 있을 때 일찌기 대중 무대에서 은퇴했기 때문에 대중들의 이미지속에는 그가 아직도 성공한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중요해 보인다. 게다가, 그는 타고난 재능외에도 미적 아름다움과 지혜, 그리고 겸손까지 겸비했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 모든 자질 때문에 그는 종종 '신성한 파르넬리(the Divine Farinelli)'라고 불리워지기도 했단다.
어린 신동
카를로 브로스키는 1705년 나폴리 앙드레아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고 있다. 그에게는 한 명의 형이 있었는데 평생 그를 위하여 작곡을 해었던 8살 손위의 라카르도가
그이다. 대부분의 카스트라티들이 하층민들이었던것과는 달리, 파르넬리는 하급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살바토레는 1706년에서 1709년사이에 Maretea와 Cisternino의 가브너였다. 7-8살 즈음에 어디선가 거세를 당한 카를로는 그 당시 카스트랄티들의 유명한 스승, 오늘날로 치면 유명한 음악 지도자 중 한사람이었을 포포라의 제자가 되었다. 나폴리에서 음악 수업을 받는 동안 카를로는 Farina 형제의 신동이 되었다. 이 사실을 인지시키기 위하여 그는 그 당시의 관례에 따라 '파리넬리'라는 이름을 채택하였다.그가 대중앞에 최초로 선 무대는 그가 15살이던 1720년, Torella왕자궁에서였다. 그 때 파리넬리는 시인 Metastase가 쓴 가사에 그의 스승 포포라가 작곡을 한 오페라 '천사와 Medoro'에서 한 역할을 맡았다. 이 때 파리넬리는 Metastase를 만나게 되었고 그들은 이후로 절친한 사이가 되었고 1782년 그가 죽을 때까지 관계가 지속되었다
유럽의 스타
파리넬리가 처음으로 유명해진 곳은 이태리이다. 그는 나폴리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고, 그런다음 로마와 볼로냐로 확장해나갔다. 베니스에서의 첫 공연은 1728년 그 유명한 산죠바니 그리소토모 극장에서였다. 23살의 가수는 대단한 환대를 받았다. 그 이후로 유럽투어가 이루어지면서 '왕의 가수(Singer of Kings)'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파리넬리는 유럽의 모든 주요 황실에서 공연을 하였고 심지어는 프랑스의 루이 15세를 위하여 왕비의 방에서 노래를 불러달라는 요청까지 받았다. 그러고나면 그는, 다이아몬드로 양각한 왕의 초상화와 500리브르의 공연피와 같은 극진하고 차별화된 대접을 받곤 하였다.
파리넬리가 포포라의 극장에서 공연을 했을 때, 그는 영국의 극장가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간주되었다. 그는 사실상 한 시즌 공연피로 1,500리브르라는 어마어마한 공연료를 제안받기도 하였고, 돈 많은 숭배자들로부터 수많은 선물을 받기도 하였다. 잉글랜드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들은 당시 헨델이 운영하던 Covent Garden Opera House와 포포라가 운영하던 the Nobles 극장간의 어마어마한 경쟁이 파리넬리로 하여금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도록 하였고 그로 인하여 파리넬리가 스페인왕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태리로의 귀향
필립왕은 1737년 파리넬리의 자신을 위한 첫 오디션에 완전히 감동을 먹었고, 그 때 젊은 가수는 자신의 나머지 생을 왕에게 바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32살의 나이에 자신의 화려한 가수생활에 막을 내리는 한편, 중요하고 영향력있는 왕의 측근으로서의 캐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그는 외국인 사절단을 접대하고, 마드리드 오페라단을 재조직하기도 하고, 왕실 채플에서 음악 지도를 하기도 하고, 마드리드의 예술적 삶에 자극을 주기도 하는 등 수없이 다른 방법으로 왕의 개인 카운셀로 역할을 하였다. 1750년에 그는 기사 작위를 받았고, 훗날 작가들이 짐작컨데, 그의 영향력은 그의 음악적 역량을 뛰어넘어 국내정치와 외교영역까지 확장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그러다가 1759년 가을 페르디난드 6세가 죽고 샤를 3세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파리넬리는 상당한 연금을 배당받는 동시에 스페인을 떠나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는 이태리로 돌아와서 볼로냐에 정착을 하여 그곳에서 영적 수련과 음악에 헌신하면서 그리고 모짜르트나 글룩, 황제 요셉 2세 등과 같은 걸출한 손님들을 접대하면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파리넬리의 관대함은 당대사람들에게 상당히 인상적이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그는 도움을 필요로하는 스페인 가족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콘서트를 조직할 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하였고, 그곳에서 난 수입은 고아원으로 보내기도 했단다. 그가 죽기 직전, 그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평생 그를 돌봐준 그의 조카와 그의 하인들에게 모두 증여하였다고 한다. 그는 1782년에 사망하여 그의 요청에 의해 볼로냐의 한 언덕에 묻혔지만, 그의 무덤은 오늘날에는 더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폴레옹의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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