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1. 삼일절
'신선을 초대한다'는 의미의 초선대(招仙臺)는 『동국여지승람과 『김해김씨왕세계』에서 등장하는 장소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가락국의 2대왕인 거등왕이 칠점산의 선인을 초대하여
이곳에서 가야금과 바둑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단다.
그리고 왕이 앉은 연꽃무늬 자리와 바둑판 자국이 남아있다고 하나 지금은 그런 흔적을 찾을수는 없다.
그리고 『김해김씨왕세계』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선견이라는 이름의 왕자가 신녀와 더불어 구름을 타고 떠나자, 거등왕이 강가 돌섬의 바위에 올라가 왕자를 그리워하는 그림을 새겼다.
전하기를 이 바위가 왕의 초선대이다. "
오늘날 재야 사학자들은 이 문장을 한일고대사의 수수께끼를 푸는 중요한 실마리로 본다.
그래서 궁금하다. 당시에는 강가의 돌섬이라고 했던 그 곳, '초선대'
네비를 길잡이로 하여 찾아온 초선대는 그야말로 그냥 하나의 야트마한 돌무더기 야산에 불과하다.
입구에 초선대 금선사라고 하는 사찰도 있지만, 이 사찰은 훗날 세워진 것으로 보이고..
오히려 주인공은 사찰 뒤면으로 펼쳐져 있는 거대한 돌무더기이다.
산이라 하기에는 보잘것 없고, 그냥 돌무더기 야산이다.
가락시절에는 이 주변이 물이라 하였다. 물위에 떠있는 바위섬 같은 거..
이 곳에서 거등왕은 '선견'이라는 왕자와 신선을 초대해서 한가로이
바둑도 두고 거문고도 타고..
그러던 어느날, 선견왕자가 신녀와 함께 물길을 따라 어딘가로 떠났다. 그를 그리워하며
거등왕은 이 바위섬에 올라 떠난 선견을 그리워했다는 그 초선대이다.
언제부터 육지속의 섬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한동안은 동네 당산역할을 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주변에 풍기는 영적 기운도 예사롭지 않다.
지금은 주변으로 산책로도 조성하고
꼭대기에는 정자도 만들어 주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여기서 내려다보니, 김해의 주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14호 국도방면~
초선대 마을 방향~
안동 방향~
거등왕은 선견을 떠나 보낸 후 초선대에 올라 그를 그리며 그림을 그렸다하였는데
그가 그렸다던 그 그림이 이 그림일까..?
초선대 입구에는 3cm두께의 얕은 실선으로 새겨진 거대 암벽 마애불(암벽높이 5.1m, 몸체높이 4.3m)이 있다(경남도 유형문화재 제 78호)
이를두고 어떤 사람은 거등왕의 초상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허황옥과 같이 온 장유화상의초상이라 하기도 하지만..
정작 양식으로 볼때는 고려시대 거불 양식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가락국의 신화와는 무관한 내용인듯하고
오히려 불교적인 작품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고, 형상적으로 봤을때 '아미타 여래상'으로 추정하는 입장에 공감이 간다.
아미타 여래는 서방의 극락정토에 머물면서 극락세계를 다스리는 부처이다.
초선대의 출입은 한칸정도크기의 작은 문으로 통과하도록 되어 있다.
내가 뜬금없이 이 초선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 곳이 한일고대사를 푸는 실마리역할을 하는 곳이라는 기록때문이었다.
재야 사학자들은
『김해김씨왕세계』에 언급되어 있는 '신녀(神女)'가 바로 수로왕의 두 공주 중 하나인 묘견공주(妙見公主)일 것이며,
그녀가 곧 일본의 최초 고대국가인 야마타이국의 첫 여왕 히미코(卑彌呼)일거라고 본다는 거다
기록들에 의하면, 히미코는 서기 148년에 태어나 179년에 야마대국의 여왕에 올라 69년간 나라를 다스렸고,
99살이던 247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시기라면 거등왕이 초선대에서 신녀와 함께 선견왕자를 떠나보냈다고 하던
시대와 거의 맞먹는 시기이다.
그리고 중국 사서인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서 기록하고 있는 히미코에 대한 기록을 보면
상황적으로 그녀가 가락국의 묘견공주라고 짐작할 만한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즉, ..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모두 한 여자를 받들어 왕으로 모시니 이름은 비미호이며, 그녀는 귀신의 도를 섬기며
능히 무리를 현혹하였다. 나이가 들어서도 지아비 없이 살았으며 남동생이 옆에서 국사를 도왔다.'
말하자면 히미코그녀가 일본 역사에 나타난시기와 선견이 신녀와 함께 어디론가 떠난 시기가 비슷하다는 점과
히미코 그녀가 결혼도 하지 않은 독신녀로 옆에서 남동생의 도움으로 국사를 운영했다는 기록으로
선견과 함께 떠났던 신녀가 선견의 도움을 받으며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를 건설하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것이다.
그 중, 선견과 함께 떠났다고 한 신녀는 수로왕의 두 딸 중 하나인 묘견공주일 것이고
거등왕이 그리워했던 선견(仙見)이라는 이름의 왕자는
수로왕과 허 황후의 10명의 아들 중 한 명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말하자면 수로왕과 허황후의 12명 아들딸 중 한 명의 아들과 한명의 딸이 곧 일본으로 건너가
고대 일본의 기초를 닦았다는 재야학설의 기초가 되는 곳이 바로 이 초선대이다.
참고로 수로왕과 허황후의 열두 자녀의 흔적은 다음과 같다.
10명의 왕자 중 ..
장자: 가락국 2대 거등왕
둘째: 허황후의 허씨성을 물려받아 진례성의 부족장이 됨
셋째:일본으로 떠난 선견으로 봄
7명: 외삼촌 장유화상의 가르침으로 하동 칠불암에서 부처가 됨
2명의 공주 중..
한 명은 신라 석탈해의 며느리가 됨
나머지 한명은 묘견공주로 짐작되며 야마태국의 히미꼬 여왕으로 추정함
...
비록 정사쪽에서는 한 마디로 터무니없다 일축해버리는 가설이긴 하다지만
그 옛날 사람들의 이름이 오늘날에까지 회자되는 것만으로도 가슴뛰는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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