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고
오직 한결같이 정밀했네
길 가던 나그네는 길을 사양하고
농사꾼은 밭 갈기를 양보해
사방이 모두 편안해지고
모든 백성이 태평성태를 맞았네
이윽고 풀잎의 이슬이 마르는 것처럼
장수하던 나이를 보전치 못해
천지의 기운이 변해지고
조야가 모두 슬퍼했네
그 발자취 금과 같았고
그 명성 옥 소리처럼 떨쳤네
-삼국유사, 가락국기-
그전부터 한번 보고자 마음먹고 있었던 딸냄 남자친구
오늘 함께 오라해서 밥도 좀 해먹이고 이야기도 좀 나눠보고자 했는데..
밥을 해먹일 시간은 나질 않고 바깥에서 사 먹이고
남는 시간 집에가서 뒹구는 것보다는 주변 바람이라도 쐬어주자 해서 나선 길..
멀리는 갈 형편이 안되고 주변에서 그나마 갈 만한 곳을 생각해보니 젊은 친구들 역사의식도 일깨워 줄 겸 '수로왕릉'가자니 거부하지 않는다.
사실은 내가 그동안 가고자 마음먹었으나 시간이 나오질 않아 차일피일 미루어왔던 곳을 핑계김에 해결하고자 한 것이로다.
그래도 아이들도 좋다하니 혼자보다 훨~ 든든하고 좋다.
서문 출구 옆으로 보니 '사적 제 73호 수로왕릉 '표지비가 서 있는데..
아마도 곁에 형태도 알아보지 못하게 마모된 입석이 원래 표지석이 아닌가 싶다.
왕릉이라해서 봉분만 땡그러니 있으려니 했더니 그게 아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과련 건물과 부대시설들이 꽤 많고 그 부지도 제법 넓다.
동문 입구로 들어가니 오른편으로 목을 숨긴 거북이와 왼편의 목을 내민 거북이상이 입구를 지키고 있다.
아마도 '구지가'의 내용을 표상한 것이리라
거북이를 지나니 3칸 2층 누각으로 된 '가락루'가 맞이해 주고..
가락루를 지나니 '납릉정문'안쪽으로 수로왕릉이 위치해 있다.
수로왕릉은 서기 42년 김해 분산자락 구지봉에서 탄강하여 가락국을 세운 수로왕의 묘역으로서 납릉(納陵)이라고도 불린다.
그 규모는 지름 22m, 높이 6m의 원형봉토분으로 능비, 상석, 문무인석, 마양호석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납릉정문'에는 파사석탑과 유사한 흰 석탑을 사이에 두고 인도에서 흔히 보이는 쌍어모양이 새겨져 있어 수로왕비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연상케 한다(안내문 참고)
최근 가락사에 관심을 가지면서 나 역시 가락국의 쌍어문양에 관심이 많아졌다. 특히, 김병모 교수의 '인도에서 가야까지 허황후 루트'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중국 사천성 여행을 하면서 김교수의 논리가 지나치게 비약적인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특히, 쌍어문은 인도지방에서 흔한 문양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티벳불교의 상징이라고 보는 것이 옳은 것 같다.
사천성의 티벳 장족 거주지에 가니 일상적으로 쌍어문양이 분포되어 있고, 티벳불교사찰지붕에 쌍어가 머리를 처박고 있는 것은 예사롭게 볼 수 있었다.
쌍어문이 인도의 상징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티벳불교의 상징이라고 보는 것이 옳은 듯하고,
그렇게 봤을 때 허황후의 루트에 대한 김병모교수의 가설은 완벽하게 수용되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그 대안으로 흥미있는 또 다른 가설은 소설가 강평원씨가 제안하는 중국 고산 소수민족 중 하나인 '아리족 출신의 허황후'이다.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서기 199년 수로왕이 158세로 돌아가자 대궐의 동북쪽 평지에 빈궁을 짓고 장사지낸 뒤,
주위 300보의 땅을 수로왕묘로 정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수로왕릉이 평지에 설정되어 있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안내문 참조)
조선 선조 13년(1580년) 영남 관찰사 허엽이 왕릉을 크게 수축하여 상석, 석단, 능묘 등을 갖추었고 인조 25년(1647) 능비를 세웠으며, 고종 15년(1878)에는
숭선전의 호를 내리고 능묘를 개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입구 안내문에 설명되어 있으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수로왕묘는 스스로 영검을 보여 자신을 보호해왔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 말기에 충지 잡간이란 자가 있었는데, 금관성을 쳐서 뺏은 뒤 성주장군이 되자 그 부하 영규 아간이란 자가 장군의 위세를 빌려 묘의 제향을
빼앗아 제사를 참람히 하더니 단오날에 사당에 제사지내던 중, 사당의 대들보가 까닭없이 부러져 영규가 깔려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두번째 영검은, "도적들이 사당안에 금과 옥이 많이 있다하여 와서는 그것을 훔쳐 가려고 하였다. 처음에 도적이 오자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화살에 살을 먹인
용사 한 사람이 사당으로부터 나와 화살을 사면으로 빗발처럼 쏘아서 일고여덟명을 맞추어 죽이니 도적들이 달아났다. 며칠 후에 다시 오니 이번에는 큰 구렁이가
나타나더니 길이는 서른 자가 넘고 눈빛은 번개같았다. 사당곁에서 여덟아홉명을 물어 죽이니, 겨우 죽음을 면한 자들도 모두 엎어지면서 달아났다. 그러므로 능원의
안팎에는 틀림없이 신물이 보호하고 있음을 알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영험이 사실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쨋거나 오늘날에 와서는 수로왕릉이 오랜세월을 지나오면서도 잘 보존되어 온 것은 영원히 우리의 역사속에서 사라질뻔한 가야 역사를 재현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고...
민족적 자부심의 관점에서도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기도 한 듯하다.
그래서,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원저자(고려시대 금관주 지사에게 딸린 이름없는 문인의 글을 일연이 인용함)도 수로왕릉의 영험함을 적을 때 스스로 매우
감격스러워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건안 4년 기묘(199년)에 처음 사당을 세운 다음부터, 지금 왕이 즉위한지 31년 되는 대강 2년 병진(1076년)에 이르기까지, 무릇 878년이 지났다. 그러나 쌓아
올린 아름다운 흙이 무너지지 않았고, 그 때심은 아름다운 나무도 말라죽지 않았다. 게다가 그 안에 벌려 놓은 수많은 옥 조각들 또한 부서지지 않았다. 당나라 사람
충신 신체부는 이런 말을 하였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어찌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고, 무너지지 않은 무덤이 있겠는가" 그러나 가락국이 예날에 망한 것으로 보아
체부의 말이 맞지만, 수로왕의 사당이 허물어지지 않은 것을 본다면 체부의 말도 믿지 못하겠다 』
경내에는 숭선전, 숭안전, 안향각, 신도비각 등이 배치되어 그 업적과 혼백을 기리고 있다.
신도비각 옆으로 '연화대석'이 놓여있다.
원래 가락 사찰 '호계사'터에 있던 것을 1910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라는 기록을 달고 있다.
"윗부분의 형체와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일제때 없어졌다"
납릉도 일제 때 한번 도굴이 되었다는 기록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는데..이노므시키들
가락 사찰 '호계사 '터에 있었던 유적 '연화대석'은 수로왕릉에, 다른 하나인 '파사석탑'은 수로왕비릉에 이적되어 있다.
릉역을 벗어나서 왼쪽으로 돌아나오니 담벼락을 끼고 릉 뒷편으로 아담한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공원 내에 조그만 상수대겸 분수가 마련되어 있고, 쌍어문양으로 가야국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물은 식수부적합용이라 '음용불가'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가을 색깔이 짙은 유적공원에서 역사공부도 하고, 데이트도 하고..
수로왕릉에서 수로왕비릉은 조금 떨어져 있어서 당일날 찾지 못하고 이후에 다른 일로 시간을 내어 찾게 되었다.
수로왕비릉은 사적 제 74호로 지정되어있으며, 분산에서 구지봉으로 내려오는 구릉에 위치하며, 동쪽 100m지점에는 구산동 고분군이 있다.
경내에는 숭보재, 외삼문,홍살문 등의 건물이 있으며, 능을 바라보고 오른쪽에는 파사석탑이 있다.
조선시대 1446년에 수로왕릉과 함께 정화되었고, 능비와 상석은 1647년에 설치되었다고 안내문에 기록되어 있는데, 최초로 언제 어떻게 조성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어떤 문헌에서도 없다는 점에서 매우 애매한 구석이 있는 묘역이라는 관점도 있다.
원형봉분의 규모는 16~18m, 높이 5m정도이고 봉분을 두르는 호석은 없는 형태이다.
능 주변에는 네모나게 돌담을 둘렀으며, 앞으로는 낮은 단의 축대가 있다. 능비에는 '가락국 수로왕비 보주태후 허씨릉'이라 새겨져 있다.
능 바로 아래쪽으로 '파사석탑'이 있다.
'파사석탑'에서 파사(婆娑)는 한자뜻으로 해석하면 답이 나오질 않는다. 가야지역사학자인 허 명철 선생에 의하면 이는 인도어로 '진리가 존재하는'
의 뜻을 가진 단어란다. 불교가 '진리를 깨우치는 종교'라고 본다면 이탑은 결국 깨우침의 탑 즉, 불탑 이겠군요.
파사탑은 곧 인도식의 불탑이란 의미인가요~
아뭏든,
파사석탑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수로왕비 허황옥이 서기 48년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올 때 파도를 잠재우기 위하여 싣고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원 모습은 기이한 사면의 5층 석탑형태라고 기술하고 있어서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을거라
생각된다. 현재는 탑의 부재 5층만 남아있는데, 구전에 의하면 이 탑이 바람을 잠재우는 영험이 있다하여(진풍탑이라고도 함) 뱃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한조각 한조각 뜯어가다보니 이렇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이 탑에서 특징은 부재의 재료가 된 돌의 성질인데, 이 돌은 붉은 빛 도는 돌에 희미한 무늬같은 것이 남아있는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돌로써 닭벼슬의 피를 떨구면 굳지 않는 기이한 돌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지역 사학자들이 실험을 통하여 증명하였다.
'파사석탑'은 김해시 호계사에 있었던 것을 1873년에 절이 폐사되자 김해부사 정현석이 수로왕비역으로 옮겼으며,
이를 영구보존하기 위하여 1993년 5월에 다시 이 자리로 옮기고 '파사각'을 세워 보호를 하고 있다(안내문 참고)
'호계사'는 호랑이가 나오는 계곡에 지어진 절이라는 의미인데, 그 위치가 궁금하여 인포센터 직원한테 물었더니 현재 '김해향교'있는 자리 주변이라는
말을 듣고는 마침 그 곳이 수로왕비능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는지라 찾아가 봤더니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혹,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구전으로라도 들은 것이 있을까 싶어 나이지긋해 보이는 남자분에게 물어도 전혀 처음 듣는다는 듯이 쳐다본다.
"그런 절은 처음 들어본다. 우리동네에는 그런 절이 없다"라고 단정하여 말씀하신다. 이미 모두에게 잊혀진 절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비록 하나 줄이라도 역사의 한 줄기 속에 있는 사찰은 표지석 정도라도 세워서 흔적이라도 남겼으면 하는 아쉬움을
우리나라 문화재 관리담당자들에게 남겨본다.
왕비릉에 왼편으로 길게 언덕위로 길이 나 있다. 길이 끝나는 부분에 또 다른 샛문이 하나 있고..
그 아래쪽에는 공공근로하는 아주머니들이 묘역을 단장하느라 열심이고..
그래서 그런지 왕릉보다는 단장이 잘 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묘역도 여성과 남성의 차이가 있는가..
팻말을 보니 '구지봉 가는 길'이다.
'구지봉'은 서기 42년 가야국 건국시조 수로왕이 탄강한 성지로서 사적 429호로 지정되어 있다. 구릉의 모양이 거북이 머리를 닮았다해서
'구수봉' 또는 '구봉' 으로도 불린단다. 서기 42년 당시 이 지역을 다스렸던 구(9)간과 백성들이 이 구지봉에 모여서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자 하늘에서
보라색줄에 메달린 황금상자가 내려왔으며 상자에서 나온 6황금알을 깨고 태어난 분들이 6가야의 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이 전설은 구지봉이 가야 500년 역사의 출발지인 동시에 고대 문학의 주요 서사시인 '구지가'가 탄생한 곳임을 알려준다.
수로는 이곳에서 태어난 알 중에서 가장 먼저 태어났다는 뜻으로 얻어진 이름이며, 그는 태어난지 10여일만에 장성하여 가야국을 세웠으며
김해김씨의 시조가 되었다(안내문 참고)
구지봉 가는 길의 단풍은 예쁘건만..
너무 이른 아침인가.. 색감이 나오질 않는다. 물론 폰카란 이유도 있겠지만,,
꼭대기에 다다르니 넓직한 공터가 나온다. 아마도 이곳에서 가야의 9간과 백성들이 구지가를 부르며 수로왕을 영접했던 곳이리라.
龜何龜何(구하구하) 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수기현야) 머리를 내어라
若不現也(약불현야) 내어 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번작이킥야) 구워서 먹으리.
근래에 쓰여진 가야사 관련서적을 보면 이 위치에 '천강육란석조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질 않고, 왠 거대 입석이 하나 서 있을 뿐이다.
옆을 보니 아래와 같은 알림판이 하나 서 있다
일반조형물은 사적지에 설치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전문가의 의견을 반영하여 2002~2003년에 시행된 '가야역사 문화환경 정비사업'시
수로왕릉 연못 인근으로 옮겼다는 이야기..
입석 남쪽 아래쪽으로 몇 발자국 내려가니 지석묘같은 넙적바위 하나가 보호를 받고 있고,
주변에는 요즘 수능을 끝낸 인근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유적지 방문을 왔는지 진을 치고 있다.
그 틈을 파고 들어가서 아래위를 훓어보니 '구지봉석'이라는 글귀가 보이고, 옆에 세워져 있는 안내문을 읽어보니 정식 명칭은 '구지봉 고인돌'이란다
역시 지석묘가 맞군요~
일반적으로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무덤형태이지만, 이 고인돌은 아직 정식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정확한 축조시기를 알 수가 없고..
그러나, 주변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의 마을유적 사례로 보아 기원전 4~5세기경 이 지역을 다스렸던 추장의 무덤 정도로 보인다고 추정한답니다.
구지봉 고인돌의 상석에 쓰여진 '구지봉석'이라는 글씨는 조선시대 명필인 한석봉이 썼다고 전해집니다.
알고봐서 그런가요~ 필체 좋습니다.
구지봉석 아래 전망대에서 남쪽으로 바라보니 가야국의 중심지였던 '봉황대'와 그 오른편으로 '임호산(유민산)이 우뚝 솟아있고~
내려오는 길에 눈에 띄고 신기해서 찍어봅니다. 언덕위 나무둥걸 옆에 하나씩 굴러다니는 돌멩이인데..
인위적으로 깎았을까~?
수로왕의 란생전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구지봉 산책길 은행나무 가지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수로왕비릉 경내 모습입니다.
아주 깔끔하게 단장이 되어 있습니다.
구지봉에서 내려올 때는 산책길을 타고 바로 밖으로 나왔습니다.
출구로 나와서 올려다보니 수로왕릉과 구지봉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가 보이는 군요
왼편이 구지봉, 오른쪽이 수로왕비릉, 그리고 왕비릉은 분산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 그대로 구산동의 작은 산봉오리인 구지봉이 거북의 머리 부분이고, 수로왕비능이 있는 평탄한 지역이 거북의 몸체역할을 하는 지형입니다.
그런데, 일제가 고의로 거북이 몸체와 머리 부분을 잘라서 도로를 내어버린 거지요. 머리와 몸통이 잘라진 거북은 아무것도 아닌게 됩니다.
가야의 건국 기반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지요~망알노므 시키들..
다시 머리부분과 몸체부분을 이을 수 있는 고육지책으로 고안한 방법이
지금 보이는 것처럼 도로위에 육교같은 다리를 얹어서 산책로로 연결하는 방법이었다는군요~ 흠..
하튼 일본느므시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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