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라 /가락국 기행

가락국 여인 '여의 낭자'의 슬픈 사랑이야기와 '가야왕국 추정지'

노코미스 2011. 11. 14. 23:53

 

2011. 11. 14 월요일 날씨:맑음

 

김해에 도움줄 일이 있어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길을 잘 못 들었던 곳이 마침 봉황대 유적지 입구였다.

에구~, 일부러 올려해도 시간내기 어려운데, 이것도 인연이다. 자빠진 김에 쉬어간다고..

여기까지 들어온 김에 유적지나 한바퀴 돌고 가자..하고는 올라간다.

 

 

 봉황대 유적지는 봉황대를 중심으로 하여 둘레길을 조성하여 주민들이 산책하기 좋도록 길을 조성해 놓았지만,

난 산책보다는 유적지가 우선이다. 

 

계단 입구에서 올려다 본 봉황대이다.

 

조그만 야산 구릉지인 이 봉황대가 3~6세기 가야국의 중심지였다.

현재, 봉황대 서쪽 아래쪽에 가야시대의 가옥이 복원되어 있다.

 

 

 

 나는 '미니 가야촌'보다는 봉황대 유적지를 보고 싶었다.

 

 

 

 잘 닦여진 산책길을 따라 정상쪽으로 올라가본다.

 

 

가을색으로 물든 산책길은 인적조차 드물어 여유마나 있다면 고즈녁한 가을분위기를 느끼기에는 더 없이 좋건만..

 

 

 

 언덕 꼭대기에는 서산으로 넘어가는 석양빛을 받은 하얀 억새풀이 발광(發光)을 하고 있다.

 

 

 

 산책로에서 고원으로 올라가니 넓은 터에 커다른 화강암 표지석이 하나 서 있다. '가락국 천제단'

최근에 조성된 것 같기도 한데, 언제 어떤 연유에서 조성된 것인지에 대한 기록물이 전혀 없습니다.

 

지금이야 없어도 그만이지만,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은, 우리가 가야의 역사를 찾지 못해 애먹듯이, 그들 역시 역사적 추측만 하고 있으리라..

 

 

 

 그 앞에서 지극 정성을 모아 합장을 하는 한 아주머니의 모습이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

 

개인사적 소원이라기보다는 아마도 이 땅의 조상과 역사의 안위에 기도하는 멋진 아주머니가 아닐까 생각하여 한 컷 도찰해 봅니다.

 

 

 

 

 세죽 몇 가닥으로 둘러싸인 장정 키 2배정도 되는 입석이 서 있다.

예사로 보면 예사로운 바위이다.

 

 

 

그러나 그 뒤편으로 돌아가보면 이 바윗돌에 얽힌 사연이 있음을 알게 된다.

 

설명인즉슨, 이 바위이름은 '황세 바위'이다.

황세는 가락국의 9대 임금 겸지왕때의 인물로 황정승댁의 아들이다.

서기 495년에, 황정승과 친구사이인 출정승은 각기 아들을 낳으면 의형제를,

아들과 딸을 낳으면 서로 결혼시키기로 약속하였으나, 황정승의 집안이 몰락하자 출정승은 딸인 '여의'를 아들이라고 속였다.

 

의형제를 맺은 황세와 출여의는 어릴때부터 같이 자랐는데, 어느날 황세가 출여의에게 오줌멀리누기 시합을 제의하자

출여의는 삼대줄기를 이용하여 위기를 넘겼는데, 이 시합을 한 곳이 바로 '황세바위 꼭대기'이다.

 

여의가 자라면서 점점 여인의 모습을 띠게 되자 이를 수상히 여긴 황세가 거북내(지금의 해반천)에서 멱을 감자고 제안을 하자

여의는 할 수 없이 자신이 여자임을 밝히고 둘은 결혼을 약속하였다.

 

그 후, 신라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황세가 왕의 명을 받아 유민공주와 결혼을 하게 되고 여의낭자는 황세장군을 그리워하다

24살 꽃다운 나이에 순절을 하고 만다. 그 해, 황세 또한 여의낭자를 그리워하다 병을 얻어 여의낭자를 따라 죽었으며,

유민 공주는 유민산(지금의 임호산)으로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얽혀 있는 바위이다.

 

이 전설을 상세히 쓰는 이유는

지금부터 보여주는 봉황대 주변의 많은 유적지가 황세를 그리워하다 죽은 시대의 순정녀 '여의낭자'와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전설의 주인공 '여의'는 현재 이 지역의 지역명인 '회현동'의 유래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소홀히 다룰수가 없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날 '황새바위'를 볼 때까지만 하여도 여의 낭자라는 전설의 인물에 이렇게 빠져들 줄은 나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황세 바위'를 본 후에는 아무생각없이 다음 코스로 '가야촌'을 잡았습니다

이 모랭이만 돌면 바로 아래에 가야시대의 수혈주거형식, 고상가옥 모형들이 복원된 '미니 가야촌'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가야촌으로 내려가기 직전 모랭이가 끝나는 지점에 저런 누각이 하나 있군요

그리고 그 입구에 '여의각'이라는 입간판이 눈에 뜨입니다.

 

 

 

여의각?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그래요~ 조금전 '황세바위'에서 황세와 오줌 시합을 했다던 그녀..

 

그리고는 유민공주와 결혼한 그를 잊지못하여 다른 사람에게 출가하라는 부모의 령까지 거역해가며 혼자 살다가 꽃다운 나이에

생명를 꺾여버린.. '출씨 가문의 여의 낭자' 그녀이다

 

은근히 끌립니다. 서서 입간판의 내용을 정독합니다.

 

사당 설립의 변을 보면,

'여의 낭자의 정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1973년에 회현동 주민들의 힘으로 사당을 건립하였으며, 매년 단오절에 추모제를 지낸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당으로 올라가 봅니다.

 참 아담하고 소담스럽다.

 

그런데,

회현동 주민들은 1500여년이라는 오랜 시간전에 한 남자에게 자신의 아까운 생명을 바친 '어찌보면 어리석은' 어린 여인에게  

왜 이같은 정성을 다하는 것일까..? 

 

도대체 그녀는 누구이며 어떤 여인인가요..?

 

 

 

알고 봤더니,

 봉황대와 여의각 주변으로 곳곳에 그녀와 관련된 유적지가 남아있습니다.

 

그 중, 제일먼저 눈에 뜨인 것이 '여이재'표시석입니다.

 

'여의각' 마당 왼편에 봉황대로 오르는 좁은 대나무길 입구에 이런 조그만 표지석이 있습니다.

'호현' 이라 쓰여있습니다. 그리고 옆에 '여이재'라고 쓰여있고.

즉, 이 고개마루 이름입니다

 

아마도 그녀는 이 누각 바로 아래 마을에 살았을 것입니다.

이 언덕아래 마을이 구야국 시대에는 성중리(성의 중앙에 있는 마을) 불리웠던 가야의 서울터였다네요

그러다가, 여의낭자가 죽으면서 고개이름을 '회현'이라 부르다가 후세에 내려와 마을이름까지도 '회현동'이 되었군요

하긴, 나중에 알게 된 '왕궁터'도 이 회현동에 있습니다.

 

아뭏든,  이 고개는 황세와 여의낭자가 함께 오르내리던 그냥 일반 고개였고

여의 낭자가 죽은 해(518년)부터 그녀를 기리면서 '여의각'앞의 고개를 '여이재'라고 불렀지 싶습니다.

 

 

이 여의재가 회현동이 되는 과정은 이러하군요

여의 고개(如意峴)--> 여우고개 즉 호현(狐峴)-->회현(會峴)으로..

 

그러니, 회현동 주민들에게 '여의 낭자'는 특별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매년 음력 1월 3일에는 여의각에서 동제를 지내고 단오날에는 위령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봉황대 유적지는 이전에도 와 본적도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을 무심치 않고 살폈었고, 황세바위도 확인을 했었지만

그저 작은 바위하나에 이름붙이기 위한 작은 에피소드인줄 알았지 이런 슬픈 전설이 있는줄은 몰랐었습니다..

특히 '여의 낭자'와 관련해서는..

 

'여의각' 에서는 아직도 '여의 낭자'의 존재에 대해서 '그녀가 누군데..?'하는 정도의 인식??

그 정도에서 '여의 낭자'는 잊어버리고 봉황대를 오릅니다.

 

정상에 올라가봤자 별거 없습니다. 바위더미 몇개 나동그러져 있고..

단지, 사방으로 김해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는 점에서는 좋은 전망대 역할을 합니다

 

 

 

 돌멩이들 사이에서 이런 속이 파인 주춧돌 비슷한 것이 있는데..

아마도 한 때는 이곳에도 누각이나 사당이나 어떤 건물이 있지 않았을까..하는 근거없는 생각을 해 보며..

하릴 없이 주변을 어설렁거려 보기도하고..

 

그러다가 혹시 타임머신이라도 발견하면 가야인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하는 기대감으로.

 

 

 

 역시, 아는만큼 보인다..?가 아니고, 보고자 하는만큼 보인다~

 

거친 돌산에 뿌리를 내리느라 각질이 거칠어진 나무 둥지 아래에

어른 팔 한 뼘 정도 되는 펑퍼짐한 바위하나가 누워있고, 그 위에 왠 낙서 비슷한 것이 그려져 있어서 보니

'가라대(伽羅臺)'라는 글귀가 쓰여져 있습니다.

 

언제, 누가 쓴 것일까..?

오늘날 현대인들이 고대 가야국을 그리워하며 새긴것일까..?

 

이곳에 올라오면 모든 사람들이 가야국을 그리는 모양입니다. 아마도..

 

명쾌하게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조우들을 뒤로하고는

마삭줄들이 엉겨붙어있는 바위뒷편 으슥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봅니다.

 

혹시 아나요..?

그동안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던 어떤 유적지를 발견하게 될지..

 

 

 

 앗싸~ 유레카!! 입니다. 그 보세요.. 보고자 하니 자꾸 보입니다.

딱 보니 오랜 세월의 흔적이 보이고..

 

바위 뒤편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보이지 않는 곳에 서 있는 조그만 표지석..'사색대'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다른 글자들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귀한 장소인건 맞을 거라~ 일단 인증샷부터 조심시럽게 한 장 찍고 봅니다.

 

그리고는 주변을 둘러보니 바로 아래쪽에는 약 2m정도의 낭떠러지이고..

 

지금 앞을 가로막고 있는 대나무숲만 없다면 건너편으로 분산성이 바로 바라다보이는 아주 전망 좋은 위치이고

그리고 바로 아래쪽으로 여의각이 앉아있습니다.

 

그렇다하더라도, 도대체 이것은 무슨 연유로 이곳에 숨겨져 있다는 것인가..요?

 

 

 

 '사색대' 바위위에서 억지로 나 있는 조그만 대나무 숲속길이 하나 나 있다.

약간은 으슥해 보여서 여성들이 갈만한 길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나야 뭐..ㅠㅠ 

 

어쨋건, 바위에서 한 자쯤 뜀박질해서 오솔길로 슬그머니 내려가봅니다.

 

내려가니 또 조그만 표지석이 하나 만납니다.

이 주변에 뭔가 숨겨져 있는 것이 많습니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는 또 '독서대'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고는 '서기 510년'이라고..

'출랑자 공부한 곳으로 학문이 대성한다'라고 쓰여있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이것이 무슨 뜻인지 나는 전혀 모릅니다.

 

이 입석 뒤쪽에는 성인 2~3명은 충분히 앉을 수 있는 큰 반석이 하나 놓여있습니다.

이 곳에서 여의 낭자가 공부를 한 모양입니다.

 

나중에 얻게 된 리플렛에 보니,

'여의 낭자 영정'이 그냥 단순히 어여쁜 여인이 아닙니다.

 

 

 

손에는 책을 들고 머리에는 벼슬한 남성들이 쓰는 관대를 쓰고 있습니다.

학문이 높았던 모양입니다. 이래저래 특별한 인물이었던 모양입니다

허긴, 어렸을 때부터 남자로 키워져 왔으니 학문에도 일가견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표지석에는 학문으로 대성한다' 되어 있으나

그녀에 대한 정보가 그 이상은 나오지 않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그녀에 대해서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시 내려오면서 뒤돌아서서 한 컷을 더 찍어봅니다.

 

그 때는 뭣도 모른 채 그냥 찍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인포센터에서 받은 자료를 검토해보니

길 끄트머리에 보이는 넓은 바위 즉, 사색대에서 내가 타고 내려온 저 바위가 '하늘문'바위이군요.

 

즉, 여의낭자가 순절한 곳으로서

바위 가운데 문처럼 가로로 틈이 나 있는데 여의낭자가 그 돌문으로 들어가서 하늘로

올라갔다는군요~

다행입니다. 모든 미련 훌훌 털어버리고..훨훨 날아갈 수 있어서~

 

주변에 남아있는 유적지들을 잘 살펴보면 '여의 낭자'는 잃어버린 사랑에 눈물콧물 짤고 메달렸던 단지 어리석은 한 여인이 아니라

부모의 의지와 국가적 권력에 의해 자신의 사랑을 희생당했지만, 그러면서도 시대적 관습에 꺾이지 않고

죽음으로 사랑을 지킨 주도적이고 의지로운 여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그 실연의 아픔이 너무나 큰 지라 현세에서 짊어지고 나가기 힘들어 죽음을 선택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선택에 한을 남기지는 않았습니다.

 한이 너무 많아 꽃으로 피어나는 그런 연약한 여인이 아니라, 바위문을 통하여 하늘로 오르는 당당한 하늘 여인이었습니다.

 

 

 

 대나무숲 좁은 오솔길 끝에 나오니 다시 '여의각'이 나옵니다. 

 

즉, 제가 서 있는 이 위치는 앞에서 보았던 여의각 오른쪽 귀퉁이에 있었던 '여의재'표지석이 있던 위치입니다.

여의낭자는 이 '여의재'를 통하여 '하늘문'을 딛고는 '봉황대'로 올라가서 '황세바위'에서 놀기도 하고

'사색대'에서 먼 산을 바라보며 사색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조용한 '독서대'에서 학문을 하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황세와 행복했던 시절에는 '여의좌'에서 서로 함께 행복을 꿈꾸기도 했었다는데..

그 '여의좌'는 발견하질 못했군요..다음에 한번 더 찾아가야 할 핑계거리가 생겼습니다.

 

 

 

그런 슬픈 이야기를 가진 여인이기에  위령제가 필요하기도 하겠네요~

'여의 낭자 위령탑'입니다.

 

 

 

내려오는 길에 차밭에 차꽃 한송이가 정갈하게 피어있습니다.

 

 

 

햇살은 넘어가고..이건 또 무슨 꽃인지..??

 

 

 

이렇게 우연히 내 눈으로 들어온 여러가지 지표들을 찍고 노느라 2시간여가 훌쩍 넘어버렸군요~

 

아무리 시간을 들여서 찍어왔어도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모르면 또 다시 나의 사진 폴더에 쳐박혀

앞으로 영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수도 있었겠죠~

 

그러나 당행히도 오는 길에 인포센터가 보여서 들렀더니 이런 귀한 자료를 주네요~

귀하다고 해서, 나한테만 주는 건 아니고..

누구에게나 주지만 오늘 나한테는 유독 귀한 자료가 되었다는 말씀이죠~

즉, 내가 오늘 본 내용들이 정리가 쫙 되는 군요..

 

오늘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를 발견했습니다.

여러분도 다음에 봉황대에 갈 일이 있으시면 주의깊게 한번 살펴보세요.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런 그렇고..

 

그렇게 해서 유적지 탐방을 끝내고, 돌아서서 나올려고 하는데

이 자료에서 또 나의 눈길을 잡아 끄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유적지 출입구 옆에

'추정왕궁터'

 

가야국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 왕~ 궁금해집니다.

어차피 지금은 집에갈 시간도 어중간, 학교 들어갈 시간도 어중간합니다.

에라~ 모르겠다. 오늘 하루 가야국에 바칩니다.

 

 인포센터 아가씨에게 위치를 물어서 다시 차머리를 왔던 곳으로 돌립니다.

위치가 좀 전에 내가 보고왔던 봉황대 바로 아래쪽이군요~

난 보지를 못했는데..

 

지도를 들고 주변을 살피니 동네 주차장 뒤편으로 왕궁터로 추정되는 공터가 보입니다.

주변은 철조망으로 출입을 막고 있어서 철망 사이로 추적을 할 뿐입니다.

갑자기 봉황대를 주변으로 가야국이 펼쳐지는 듯한 느낌이 몰려옵니다.

 

 

 

생각보다 크게 넓지는 않은 공터 중간에 돌무덤과 거대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터를 지키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에서도 수로왕이 검소하고 소박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농사짓는 일에 힘쓰라고 

건물을 짓는데 애쓰지 않았다고 기록하니..왕궁이라 해서 다른 왕조처럼 거대하거나 화려하진 않았을 거라고 짐작해봅니다.

 

 

 

 좀 더 줌~을 해 봅니다.

은행나무 치고는 잔가지가 많은 편입니다.

생각보다 둥지가 클 수도 있겠습니다. 언제부터 뿌리를 내렸던 것인지..??

 

이곳도 근간까지는 사람들이 살던 땅이었다는데..시에서 아마도 매입을 했나봅니다. 

 

 

 

 도로변으로 나와서 앞면에 촛점을 맞추어 본다. '가락국 시조OO'라는 글귀가 보일듯 말듯..

 

 

'가락국 O조 왕궁터?' 그 옆에' 행정 허선생유적?' 아마도 후대에 허씨 가문이 살았던 터인 모양입니다.

 

 

 

조만간에  이 주변이 번화했던 가야국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모양입니다.

 

그동안 김해주변에 살면서도 

늘 가야의 그늘만 보고 살았던 것 같았는데..

오늘에야 가야의 머리카락이라도 몇 올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이 살았던 실제 터전 '왕궁터'와 그 땅에서 숨쉬며 살았던 '여의낭자와 황세장군'이야기는

하늘에서 떨어진 '김수로왕'과 고향도 어딘지 정확히 모르는 '허황옥 왕후'의 신화같은 이야기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허허로움을 채워줍니다.

 

이 가을, 잘못 든 길에서 대어 하나 건졌습니다.

 

 

P.S: '봉황대 출낭자'전설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분은 아래책을 참고하세요

김종간(1998), 김해의 설화. 김해시: 김해 문화원

이홍숙(2008). 김해의 지명전설. 김해시: 김해 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