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라 /가락국 기행

허황옥 왕후가 무사히 바다를 건너온 것에 감사하기 위해 지은 절 '해은사'

노코미스 2011. 10. 19. 12:41

사진을 찍을 땐 가락 고찰의 특징을 찾고자 하는 일념과 열정으로 가득했었지만,

포스팅을 하면서 점차 가락 고찰의 역사적 픽션에 뭔가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충격으로 힘이 빠져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역사적 사실성이 뭐 그리 중요하랴~

어차피 모든 역사는 신화화되어가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내가 사는 땅에 신화가 있느냐 없느냐이지, 그것이 사실이냐 허구냐는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그리스 로마 신화인들 그것이 사실이라서 우리가 좋아하냐?? 단지  인간의 존재를 설명해주기 때문에..단지 그 이유만으로 우리가 좋아하듯이...

 

내가 사는 이 땅 즉, 가락 땅과 그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것만으로도 가락국의 신화는 가치롭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돌아선다.

 

 

 

'해은사(海恩寺)' 는 '김수로왕 촬영지 전망대'를 지나서 좁은 산길로 꺾어올라가면 이런 이정표가 나온다.

 

차는 김수로왕 촬영지 전망대에도 두어도 좋고,

현재 이 이정표가 보이는 분산성 아래쪽 작은 주차장에 두어도 좋다. 차는 2-3대 정도 댈 수 있는 공간이다.

 

 

 

저 돌계단을 오르니 바로 '분산성' 이정표가 나타난다. '사적 제 66호 분산성(盆山城)'

 

 

 

이정표를 보고는 눈을 돌려보니 산 외곽을 끼고는 돌로 만든 성곽이 제법 넓은 폭으로 쌓여져 있다.

성곽 바깥쪽으로는 작은 산책로가 함께 돌고 있다.

 

 

 

다시 성곽 안으로 들어와서 살펴보니 성곽 안쪽으로도 바깥에서 본 정도의 폭으로 한 겹더 쌓여있다. 성의 폭이 상당히 넓다.

대충 잡아도 성곽의 폭이 2.5m정도는 될 성 싶다. 중돌과 작은 돌로 속을 꽉꽉 채워가며 모서리 각과 표면을 마치 자로 잰듯이

칼로 깎은듯이 반듯한 형태로 쌓아두었다. 대단한 정성이라는 생각을 한다. 

게다가, 이 많은 돌들은 어디서 어떻게..

지게로..?? 

 

 

 

 

이런 형태로 해발 330m 고지의 분산 정상부에 띠를 두르듯이 성을 쌓았다. 이런 축성방식을 테뫼식이라 한다.

 현재는 김해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이쪽 경사면에만 약 900m가량의 성벽이 남아있단다.

 

김해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기록상으로 이 분산성은 고려말에 김해부사 박위가 왜구의 침입에 대비햐 옛 산성을 기초로 하여 돌로 샇았고,

조선말 1871년에 다시 김해부사 정현석이 고쳐 쌓았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성안에는 가야·신라의 토기편들이 출토되고, 분산성이 고대 산성의 주류였던 테뫼식 산성이란 점을 미루어볼 때

그 기원을 신라나 가야시대까지 끌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하는 가능성을 열어두기도 한단다.

 

 

 

 

김해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쪽으로 내려가다가 다시 위쪽으로 거슬로 올라가본다.

올라가니 일부 성곽은 무너져서 흙더미 속에 묻혀버렸고, 일부는 새로 중축하는 과정에 있나보다. 돌멩이의 재질과 색깔이 완전히 다르다.

 

이것이 어디까지 이어져 있나 궁금하여 저기 임시건물이 있는 곳까지 계속 올라가본다.

 

 

 

 

임시가옥앞의 좁은 길을 지나서 빠져나오니 돌무더기 위에 우뚝 서있는 작고 소박한 절이 하나 나타난다.

나무의 자태로 보아 수령이 오래되어 보이고

따라서 절의 역사 역시 만만치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절터 뒷간을 통하여 올라가본다.

 

 

 

올라가보니 조그만 돌담으로 경계를 지은 작은 전각이 하나 나오고..

 

이 전각 앞에

시방법계에 지극히 신령스럽고 정성스러우신 산왕대신이 모셔져 있는 산신각에 대한 설명과

이 위치가 만장대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서 있다.

 

여기서 내려다보니 동김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 산신각 주변에는 남근을 닮은 괴석이 많다. 입구에도 그러하고..

 

 

 

전각 바로 옆에도 있고..

그래서, 이 산신각은 자손번창 소원에 영험이 있는 곳이라고..

 

나중에 대왕각에서 보는 봉돌도 그러하지만..

우리나라 초기불교라 할 수 있는 가야고찰들의 공통된 특성 중 하나는 이 땅의 토속적인 무속신앙과

함께 가고 있다는 점이다.

 

 

 

산신각 뒷편으로 올라가니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파사석탑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세워져 있다.

 

아래쪽에 보니 해은사에 파사석탑 적멸보궁이 세워지게 된 유래가 적혀있다.

이야기는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었던 2600여년 전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야기는 돌고 돌아서 결국

최근에야 초의선사의 법손을 통해서 부처님의 진신사리 3과를 얻어서 이곳 '타고봉'에 재현된 파사석탑에 봉안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김해에 큰 인물이 나와서 천하를 태평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전하고 있다.

기록 불기 2550년(불기 2550년이면 서기로 언제인지..??)

 

 

 

 

타고봉에서 남쪽 방향으로 향하니 넓은 가락 평야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절이 바라보는 방향은 허 왕후가 가락국에 당도하여 수로왕을 기다렸다는 진해 용원 근처로 알려져 있는 '망산도'가 아닐까..혼자 짐작해본다.

그러나, 가야사를 읽어갈수록 그것조차 사실일까하는 의구심이..ㅠㅠ

 

 

 

본당으로 내려가본다.

전체적으로 사찰의 분위기는 상당히 아담하면서 토속적이다.

 

 

 

이 산 역시 바위산인지 사찰 곳곳에 큰 암반들을 끼고 있다.

경내 가장 중심부에 본당 '영산전'이 앉아있다.

 

 

 

부처님도 큰 사찰처럼 압도적으로 크지 않고 아주 아담하다. 그리고 두르고 있는 가사의 색깔이 참 고급스럽다.

주지스님의 취향이 고급스러운지..

 

이런 취향을 가지고 있는 주지스님과 10여년전 문제가 되었던 사찰내 납골당 조성과 찜질방운영 등의 파행과는 연결이 잘 되질 않는다.

허긴 10년 전 이야기이니..당시 스님과 지금 스님은 다른 분이겠지..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거의 보이질 않는데..

 

 

 

 

영산전 옆으로 '대왕전'이 앉아있다.

 

 

 

열린 문으로 살짝 들여다보니, 맞은편 벽면에 두개의 영정이 크게 붙어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가락국 수로왕 영정' 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키가 9척임은 은나라 천을과 같았고, 얼굴이 용안(龍顔)임은 한나라 고조와 같았으며,

눈썹이 팔채(八彩)임은 당나라 요임금과 같았고, 겹눈동자를 가짐은 우나라 순임금과 같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상당히 비슷하게 묘사된 듯..

 

 

 

옆에 '보주태후 허씨 영정'이 있다.

 

가락국에 얽힌 많은 신화가 이 여인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대부분이니

우리가 몰라서는 안되는 대단한 여인이다.

 

신화는 그녀가 어디서 온 여인이냐 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역시,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그녀가 가락국에 도착하여 수로왕과 첫날밤 침전에 들어서 자신을 소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아유타국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許)라고 하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열여섯입니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허왕후가 인도사람이라느니 일부는 중국 사천성 보주지역 사람이라느니 설왕설래가 많은데..

 

인도라고 하는 사람은 그녀가 왔다고 하는 아유타국으로부터 추론한다. 고대 인도에 아유타와 발음이 비슷한 아유디아국이 있었다고..

 

그러나, 일부는 중국 서남지역의 사천성에 가면 허 왕후가 가지고 온 문장 쌍어문을 사용하는 보주지역(현재는 안악현)이 있다고..

그래서 그녀는 중국 사천 지역에서 왔을 것이라는..

 

이말 들으면 이말이 옳고, 저말 들으면 저말도 옳은 것 같은데

비역사적인 사람의 단순한 논리로 생각해보면 양쪽이 모두 옳은게 아닐까..?

그녀는 아유타국 공주도 맞고, 사천성 보주지역에서 온 사람도 맞을 것이라는..

 

왜냐하면

그녀의 이름 허 황옥은 인도식 이름이라기 보다는 중국식 표기법에 가까워보인다. 그러면 그녀는 중국에 터전을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녀 입으로 자신은 아유타국에서 왔다 했으니, 이는 인도의 고대국가로 존재했던 국가가 맞다.

 

그렇다면 둘을 합칠 수 있는 방법은

'아유타국 보주지역 공주이다'가 나의 결론이다.

즉, 당시 인도에 기반을 두고 건설된 아유타 제국의 정치적 세력이나 문화적 세력이

 이웃나라 중국의 서남지역인 사천성까지 확대되었을 수도 있고

그 아유타국의 보주지역 공주가 동남쪽 뱃길을 이용하여 가락국까지 왔다고 한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으로 보이는데..

 

너무 단순 논리인가..

 

어쨋거나 수로왕과 150년을 해로하고 허왕후는 157세에, 수로왕은 158세에 조락하였다고..

 

 

 

수로왕과 보주태후 영정 아래쪽에 이런 몽돌이 하나씩 놓여 있다.

사찰 안내문에 의하면 허왕후가 인도 '망산도(望山島)'에서 가져왔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름이 '봉돌'이라는데..

 

몇 가지 기록물을 읽어보니, 어떤이는 '망산도'를 인도지명으로

어떤이는 허왕후가 바닷길을 건너서 가락국에 처음으로 당도한 지명을 '망산도'로 언급하기도 한다.

이것부터 정리를 하여야 할 것 같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 분명 허왕후가 바닷길을 건너서 처음으로 당도한 곳이 '망산도'라고 기록되어 있다.

만약 이 돌이 '망산도'에서 가져온 것이라면 그것은 인도산이 아닌 한국산이다. 그 망산도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몰라도..

(허긴, 어떤 사람은 아예 망산도가 중국 절강성에 있는 지명이라 하는 사람도 있으니..)

 

어쨋건,

 허왕후가 망산도에 당도하여 김수로왕을 기다리면서 심심해서 주변에 늘려있는 몽돌하나를 줏어왔는데

그것을 사람들은 인도서 가져온 것이라고 착각하고 보물처럼 또는 신주단지처럼 모셔왔던 것이 아닐까.. 망구 혼자 생각이다^^;;

 

어쨋거나 이 돌 역시 남자에게는 재복을 여성에게는 생남의 복을 가져다주는 영험있는 돌이라는데

인도산이면 어떻고 진해산이면 어떠랴..

 

 

 

이 그림은 아마도  

'허왕후가 망산도에 당도해 육지에 올라서 수로왕이 기다리는 궁전으로 가는 도중 높은 언덕에서 쉬면서 자신이 입고 있었던 비단 바지를 벗어서

그것을 폐백삼아 산신에게 바쳤다'는 기록을 표현한 것이리라..

 

 

 

파사석탑과 불상, 비단과 금은보화을 가득 싣고

해동의 얼굴도 모르는 낭군님을 찾아 수만리 바닷길을 건너오는 16세 아릿다운 허황옥과 그의 오라버니 보옥을 그린 벽화도 함께 있다.

 

산신각 뒤 타고봉에 설치된 진신사리석탑이 허왕후가 인도에서 올때 배에 싣고 온 저 파사석탑을 재현한 것이다

 

 파사석탑은 허 왕후가 싣고 왔던 원래 파사석탑은 수로왕과 혼인을 한 후, 왕후의 궁전 동편 호계사에 설치를 하였었는데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전쟁과 풍파에 원형이 파괴되어 있는 것을

분산성을 복원했던 조선말 김해부사 정현석이 주변에 남아있는 파사석을 모아서 허왕후의 능 옆에다 이원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그 원형을 재현한 것은 해은사 석탑이 최초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허 왕후가 바닷길을 무사히 건너온 것에 대해 감사하기 위해 지은 절이 이 해은사(海恩寺)이다.

 

 

 

 

대왕전 앞에 서니 불이문을 통하여 속세랑 연결된다.

 

 

 

불이문을 넘어서 속세에서 바라보는 해은사..입구에 '가락고찰 해은사'

 

가락 고찰은 맞지만 허 왕후 시절에 지은 사찰은 아닐 것이다. 

가락국기에서 사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가락국 8대왕 질지왕이 지은 '왕후사'로 나오기 때문이다.

 

당시에 지어졌건, 후대에 지어졌건 간에

가락국의 잉태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만 보더라도 '해은사'는 흥미로운 절이다. 게다가, 소박하고 아름답다.

시간날 때 한번 들러보시면 역사에 대한 자극을 받게 될 좋은 사찰이다.

 

 

 

 

 

복전함과..

 

 

 

장유화상이라는 설이 있지만..

 

내가 보기엔 용왕님으로 보인다.

 

 

 

고즈녁한 돌담길을 벗어나면..

 

 

 

사뿐히 즈려밟고 가기를 기다리는 숲속의 하얀 오솔길..

 

 

...

 

 

입구의 안내문을 읽어보니,

해은사는 경남 김해시 어방동 964번지 분산성내 정상에 위치한 대한 불교 조계종 제 14교구 범어서 말사로써 전통문화보존지역 사찰이다

지금으로부터 2000여년전 가락국이 건국되고 약 7년 후에 지금의 인도 아유타국에서 허왕후와 장유화상이 불경과 파사석탑을 싣고는 바다를 건너

가락국에 도래하여, 머나먼 바닷길에 숱한 풍랑과 역경을 막아준 바다 용왕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남쪽 황금바다를 굽어보는 이곳 만장대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해은사라 하였다. 그후, 전란과 화재로 몇 차례의 소실과 복원을 거듭해 오다 현재의 주 법당인 영산전은 30여년전 재 중건하였다..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