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르체스코 성(Castello Sforzesco)은 밀라노에서 그냥 '까스텔로(Castello)'로 통한다.
이 성은 내가 이전에 독일에서 봐 오던 성과는 다소 다른 점이 있다.
즉, 독일의 성들이 대체로 한적한 시골 외곽이나 한 도시를 모두 전망할 수 있는 산꼭대기에
요새처럼 자리잡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이 성은 도시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castello는 castle을 대신하는 단어이지만, 이태리에서는 르네상스시대부터 castle대신에 '펠리스'에 해당하는
'팔라초(palazzo)'를 짓기 시작한다.
이 팔라초의 특징이 중세의 성처럼 시골한적한 곳이 아닌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제 군주들도 도시생활을 하게 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밀라노의 스포르체스코 성도 마찬가지로
중세의 육중한 성채 모양을 하고는 있지만 실제는 시내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두오모에서 전철을 이용하고자 할 때는 빨간 메트로 1호선으로 3구간을 가면 되지만,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에서는 살살 걸어오니 금방 닿는 곳에 위치해 있다
캐슬 정문 입구 분수대..
분수대앞에서 바라보는 정문게이트..'필라레테 타워Filarete Tower'
육중하다. 위압적이다. 매우 남성적이다.
이 탑은 1878년 1월 9일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 왕국의 2대 국왕으로 즉위한 왕 '움베르토 1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탑으로
1906년에 다시 재건되었단다.
최초에 이 성은 1368년, 당시의 군주였던 그리고 밀라노 대성당의 건설을 추진했던
'갈레아초 비스콘티(Galelazzo Visconti)'의 명에 의하여 건축되었고..
이후 여러 군주들을 거쳐서 1450년경 비스콘티 가문의 장군이었다가 비스콘티 가문의 영지를 상속받아
이 지역을 통치했었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Francesco Sforza)'에 의해 거의 허물어져가던 성터는
다시 증축되고 르네상스 풍으로 아름답게 꾸며졌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 필라레테에 의해서...
이어서 루도비코 마리아 스포르차(Ludovico Maria Sforza) 일명 '루도비코 일 모로'가 밀라노를 통치하면서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설계자 브라만테를 기용하는 한편,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밀라노로 초청하여
상하수도 설계, 도시계획, 축제 준비, 무대장식 등 갖가지 부분에서 그의 도움과 조언을 얻어서 성을 재건하였다.
사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림보다는 개인적으로 국토계획 및 도시계획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몰라도 밀라노에서 루도비코 일 모로를 위해서 일을 하기도 했지만,
체사레 보르자가 한창 신생국가를 만들어가던 시기에는
그를 위하여 한 1년동안 로마냐 공국의 국토계획에 몰두한 적도 있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루드비코 일 모로는 당시 수많은 도시국가중심의 이탈리아에서 5대 강국중 하나로서
강력한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언제나 정국은 불안정하였다고 볼 수 있다.
루드비코 일 모로 자신역시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작은 아들 잔 갈리아초의 섭정으로서
조카로부터 언젠가는 왕의 자리를 빼앗고자 하고 있었으니..
언제어디서 대내외적으로 적의 침략을 받을 지 알 수 없었으니 팔라초는 당연히
외부 적의 침입이나 공격을 전망하거나 방어할 수 있도록 그리고 피신할 수 있도록 설계되고
구축되어야 했을 것이다.
루드비코 일 모로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게 되면
이 성이 이렇게 견고하고 위압적일 수 밖에 없었겠다는 점에 이해가 된다.
이탈리아의 역사가 구이차르디니는 1494년을 '비참한 시대의 첫해'라 명명했는데
이 해는 근대 이탈리아의 시작으로보는 프랑스군의 이탈리아 침입이 시작되는 해이고
이로 인하여 이탈리아에는 '체사레 보르자'라고 하는 냉혹한 군주가 나타나기도하고
더불어 이탈리아국내는 한 10년간 쑥대밭이 된다.
그런데,
프랑스왕의 이 침략이 '루드비코 일 모로'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루드비코 일 모로는 잔 갈레아초 공작의 섭정으로서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왕이 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았던 것은 밀라노 민심보다는
오히려 나폴리왕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조카 잔 갈레오초 공작의 부인이 나폴리 왕의 공주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나폴리가 일 모로의 그런 음모를 그대로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일 모로는 프랑스왕 샤를 8세를 이용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생각은, 한때 샤를마뉴대제가 나폴리를 지배했었던 적이 있었다는 이유로
나폴리 왕의 왕위계승권이 앙주가의 자손인 자신에게 있다고 우기고 있고,
그런 프랑스를 앞세워 나폴리 왕국 정복에 이용하게 되면
자신의 야심을 성공시키기에는 더없이 좋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그의 불손한 생각이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1492년 피렌체의 '로렌초 데 메디치'가 죽기전까지는 그의 중재로 인하여 이탈리아 내에서의 평화가
지켜져 왔으나 그가 죽자 스포르차는 그의 사악한 생각의 불씨를 키우기 시작한다.
때마침 1494년 1월 25일 노련한 정치가로 알려져있던 나폴리 왕 페란테가 죽게 되자
나폴리왕 계승문제를 시비로 걸고 나오면서 프랑스는 이탈리아로 침략해 들어올 구실을 만들고
영토통과에 대한 승인과 병력, 자재 공출을 요구하게 되는데
밀라노의 루드비코 일 모로는 이에 적극적으로 협력한다.
마치 근세 일본이 청을 칠려고 하니 한반도 너희들 영토통과를 승인해라 하여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은 것과 같은 원리이다.
이 일이
결국은 전 이탈리아를 파멸시키는 근원이 된다.
아뭏든 이태리의 춘추전국시대에 지어진 건물이니 성이 견고해야 할 수 밖에 없었다.
최초에 조성되었던 스포르체스코 성의 배치도이다. 6각형 별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는 아름다운 성이다.
현재 이 성은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모두 4개인가 5개인가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의 큰 광장을 지나 중문을 지나서 있는 가운데 건물이 피나코덱이다.
중문을 지나 오른쪽 건물이 박물관 입구이다.
전시되어 있는 유명작품들을 게시하고 있다.
이 박물관을 입장하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내야한다지만,
내가 가는 날은 이유를 모르겠으나 무료입장을 시켜준다
이 박물관에서 내가 반드시 봐야할 것은
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의 피에타'와 빈센초 포파의 검은 얼굴의 '아기예수와 성모'그림,
그리고 아세(Asse)방에 그려진 다빈치의 천정벽화 '나무와 숲'이다.
생각보다 많은 작품들을 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암굴의 성모>모작인지 습작인지..
..
많은 방을 지나고 제일 마지막 방에 모셔져 있는 노대가의 작품 '론다니니의 피에타' 를 끝으로
미술관순례도 끝낸다.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마지막으로 보고 나오면 이 '공작의 뜰'로 나온다.
너무나 뜨거운 여름이라 그런지 정원의 꽃들이 맥을 못추고 다 시들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의 미모를 감출 수 없는 아름다운 중년 여인의 얼굴처럼 여전히 그 구조는 아름답다.
다시한번 견고한 성채에 위압감을 느낀다.
그러나 오늘날 관광객들은 과거의 역사와는 상관없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해자를 건넌다.
저기 저 중간에 걸쳐져 있는 다리를 건너서 성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뒷 정원에서 바라보는 스포르체스코 성의 웅장한 뒷모습..
옛날 해자에는 지금은 잔디가 무성하고..
스포르체스코 까스텔로는 밀라노에 가기전의 나에게는 전혀 인식이 없었던 곳이었지만,
우연히 들러게 된 곳이었던만큼 만족감은 더 컸다고나 할까..
한시절 밀라노를 호령했던 가문에 대한 이해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빈센쵸 포파의 여러작품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작품 '론다니니의 피에타'등
중세 밀라노를 대표하는 많은 성화와 유물들을 볼 수 있어서
뜻밖의 수확을 얻을 수 있었던 코스였다.
밀라노에 들러는 여행자들에게 반드시 들러보길 추천하고 싶은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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