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05. 25. 수요일 날씨: 말금
다음날 아침,
가뿐한 마음으로 5시30분에 일어나 6시 30분에 아침먹고 7시 30분에 출발한다. 후~
제나라의 땅 치박시 임기구를 떠나기전에 강태공사당을 들렀다가기로 한다.
사당이라 해서
이름없는 강변에 조그만 영정사진 하나 걸어놓은 제실정도로 생각했는데
들어가는 입구가 또 어마어마하다.
첫번째 관문을 들어서니 주차장이 있고..
주차장에서 하차를 하곤 두번째 관문을 지난다.
두번째 관문은 석조문이다.
게이트 위쪽 글은 '강태공사'인 것으로 짐작되는데,
옆의 문주에 새겨진 글자들은..그냥 통과~
사당으로 들어가는 3번째 관문이다.
3번째 관문을 통과하니 중국본토영화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안가의 모습이 나타난다.
마당과 마당을 연결하는 동그란 연결문이 나타나고..
신록의 대나무잎이 분위기를 청정하게 해주고..
용의 나라답게 용이 그려진 벽화도..
빨간칠의 목조 회랑위에는 단순한 단청이 아닌 '화조'그림으로 장식을 하고 있고..
회랑을 통과하니 진짜 사당이 나타난다.
사당앞 큰 화로에는 벌써부터 대형 향이 타고 있고..
문지방을 넘어서니 강태공의 영정대신 조상이 안치되어 있고, 그 앞에 공덕함이 있어서
이 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이 공덕함에 시주를 하고 향을 피워서 그 공덕을 칭송하는 참배의 절을 올려야 한다.
강태공의 이미지는 허연 수염에 기골이 장대하고 눈빛히 형형한 신선분위기가 나는 도인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 이미지는 조상보다는 그림에서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남들이 하니 나도 얼떨결에 따라하긴 했지만
지나고 생각하니 남의 나라 건국시조한테 우리가 왜 시주를 하고 참배를 했는지..
좀 의아하다..^o^
그러나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당에 들어서면
사당을 지키고 있는 관리인들(아마도 제사장 같은 사람들인 거 같다)이 있어서 시주를 하고 참배를 하도록 시키니
안할 수가 없었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날 우리그룹이 얼마나 많은 시주를 했는지..
그들이 흐뭇해하면서
특별히 대형 향에 불을 붙여서 참배를 할 수 있는 영광스런 기회를 한번 더 주었다.
우리 최도사님께서 행사를 대행하셨다.
아마도 우리의 여행길이 안전하게 끝날수 있기를 기도했으리라 생각한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기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를 포함한 우리 일행 거의가 다
강태공을 하릴없는 낚시군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강태공이 단순한 낚시군이 아닌 고대 춘추시대 제나라의 건국시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차에 탄 조선인 가이드의 중국역사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하여
앞차 식구들과는 달리 우리차를 탄 일행들은 강태공의 히스토리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듣질 못한다.
결국, 혼자서 그의 스토리를 찾아내는 수 밖에 없다.
보니, 사당내의 사방벽에 강태공과 제나라 건국에 관련된 도록인듯한 벽화가 그려져 있길래
몇 컷 찍어 왔더니 그것이 바로 그들의 역사이다.
강태공(姜太公, 본명 강상(姜尙) , 기원전 1211-1072) 은 태공망(太公望)의 속칭.
주나라 초기의 정치가이며 병략가 이며 성은 강(姜), 자는 자아(子牙), 호는 비웅(飛熊), 중국 강소성(江蘇省)의 동해인이고,
학문이 매우 깊었다고 한다.
염제신농 씨의 51대 후손으로
그의 선조들은 한때 우임금을 도와 홍수를 다스림에 큰 공로를 세웠다하여 여(呂)땅을 분봉받아 여씨성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래서 여상(呂尙) 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는 중국 역사상 명참모들 중 최고의 화려한 혈통과 최고의 학벌을 가졌지만
어려운 초년운에 의하여 최하층 생활을 하다가 팔순이 되어서야 출세길에 오르게 된 비범한 인물이다.
명문가 출신으로서 강태공은
젊은 시절 상(은) 주왕(紂王)에 대한 환상을 품고 주왕에게 자신의 재능을 펼쳐 보일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주왕은 왕비 달기와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리고 충신들을 멀리했다.
이런 상황때문에 강태공은 주왕을 떠나 자신의 고향 동해연안과 중원일대를 떠도는 생활을 하게 된다.
은둔생활과 떠돌이 생활을 하는 동안 그의 생활은 매우 곤궁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먼저 극진(棘津:현재 허베이(河北) 옌진(延津) 동북부 지역)에서 잡일을 하다 후에 상도 조가(朝歌)로 향한다.
후에 다시 맹진(孟津)일대에서 소를 잡는 백정일과 음료 파는 일을 했다고도 한다.
그러다가 주문왕을 만나기 직전에는 위수(渭水)의 강가로 집을 옮겨
주의 인접지역인 반계(磻溪)라는 곳에서 매일 바늘도 없는 낚시대를 바다에 드리우고 낚시를 한다고 앉아 있었다는데,
이는 강태공이 의도적으로 주 정권에 접근하기 위해 그 주변을 돌며 적당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무렵 주문왕은 천제가 나타나 현인을 보내 줄 것을 약속하는 꿈을 꾸고 사방으로 현인을 찾고 있었다.
현인이 잘 찾아지지 않자 점을 쳐 보았더니 위수 근처로 사냥을 나가면 현인을 찾을 것이라는 점괘를 얻었다
마침내 그는 위수로 행차하여 반계에서 강태공을 만나게 되고 수레에 태워 대궐로 데려오게 된다.
이 때 강태공의 나이가 여든 살이었다고 한다.
어쨋거나
주문왕이 강태공을 스승으로 모시고자
강태공이 탄 마차를 친히 8백보나 끌었고 그로 인해 강태공이 주의 8백년 역사를 보호했다는 설화가 내려오기도 한다.
강태공은 주문왕의 재상이 되어 우선 주의 내실을 굳건히 다지고, 주문왕을 도와 암암리에 상(은)을 멸할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주문왕이 죽은 후 태자였던 주무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그는 강태공과 문왕이 제정해 놓은 책략대로 일을 진행시켜 마침내 상의 멸망이라는 건국의 대업을 완성하게 된다.
주무왕이 상(은)을 친 후 제후를 봉하는 형식으로 지역을 분할해 다스리면서 체제를 공고히 했는데
주공을 노(魯)에, 태공을 제(濟)에 봉했다.
뿐만 아니라,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 무왕, 성왕(成王), 강왕(康王) 4대에 걸쳐 태사(太師)를 지냈으며 딸은 주무왕의 황후가 되었다,
강태공의 제나라는 주문무왕의 스승이자 장인이며 천하의 스승국의 위치로 군림하여
2대 왕좌를 큰아들 강급(姜及)에게 물려주었고 강급은 제정공(齊丁公)이라고 불렸다.
강태공을 이어 제나라가 가장 흥한 시기는 제 환공 강소백(姜小白)시기로 강소백은 춘추시대 첫번째 패자가 되기도 하여 강태공의 얼을 이었다.
제나라 최전성기에는 사방 5000리를 이룩한 대국으로 성장하기도 하면서,
太公으로부터 20대 강공(康公)까지 800여년간 왕위를 이어갔다..는 이야기이다.
강태공은 서원전(西元前)1072년에 139세의 나이로 신선계에 들었고, 의관을 서주(西周)호경(鎬京)에다 안장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은 강태공의 덕을 생각하여 이곳 임기에 따로 강태공 의관총(衣冠塚)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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