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나라 /11-05 중국산동

공묘, 공부, 공림에서 공자를 배우다.

노코미스 2011. 6. 13. 23:05

 

공묘는 역대왕조가 공자의 제사를 지내기 이하여 지은 사당이요,

공부는 공자의 혈족직계 장손들이 연연세세 거주하였던 관저이다.

 

※공자(기원전 551년-기원전 479년): 이름은 구이고 자가 중니였으며,

춘추전국시대의 노나라인 추읍 창평향(지금의 산둥성 취푸 동남쪽의 니산부근)에서 태어나서 유가사상을 집대성한 학문의 성인

 

 

 

공자묘는 곡부(曲阜))고성의 중심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공자가 죽은 그 이듬해(기원전 478년)부터

 당시 노의 왕이었었던 애공(魯 哀公)이 공자가 거주했던 초가삼칸 옛저택에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사당의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영성문'은 공묘로 들어가는 대문이다.

 

 

공묘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몇개의 문을 들어가야 하는데..

문마다 위쪽으로 문방이 붙어있다. 대화원기, 금성옥진 등등..  모두가 공자와 공자의 학문을 찬양하는 뜻이라는데..

무슨 뜻인지는...???

 

 

처음 공자가 거주했던 3칸 초가로부터 출발한 사당은

역대통치자들이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공자의 유가사상을 봉건사회의 정통사상으로 숭배하게되면서 공묘의 규모도 점차 커지게 된다.

 

역대 군주들의 끊임없는 재건과 증축을 거쳐 현재는 정원만도 9개나 되고 남쪽으로부터 북쪽까지 길이가 약 2km이며 부지면적이 21.8헥타르나 되는

거대규모의 사당이 되었다. 그 역사가 유구하고 규모가 거대하며 기세등등하다는 점에서 북경의 고궁과 하북성덕의 피서산장과 더불어

 중국의 3대 고건축군체로 분류한다고..

 

공묘내에는 측백나무와 향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서 들어서면 냄새가 좋다.

측백과 향나무를 많이 심은 이유는 그들의 향이 죽어서 천년, 살아서 천년을 간다는 이유때문이란다.

즉, 공자의 향이 년년세세 그렇게 오래가기를 기원하는 것이리라.

 

 

 

 이 공묘내에는 한위로부터 송, 원, 명, 청대를 거쳐서 공자와 유가를 찬양하는 비석이 2,200여개가 남아있다고 하는데

모두 글자체가 아름답고 내용이 아름답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묘내의 석각들은 하나도 성한 것이 없다는데..

모두가 위에서 보는 비석처럼 부서지거나 깨어지거나 해서 덧대거나 회칠한 것들이 많다.

이유는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1966년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봉건사회 잔재에 대한 홍위병들의 만행의 결과란다.

 

중국 공산당은 자신들이 파괴하고 내몰았던 공자와 공자의 사상에 대해서

최근에 재조명을 하게 되고

다시 그것을 복원하여 국가수입을 올리는데 활용하고 있으니..참, 역사의 아이러니를 본다.

 

 

 

이런 석각 중 어떤 것은 이렇게 거북이나 동물들이 업고 있는데..

그들이 업고 있는 것은 모두 황제가 세운 비석이란다.

지금 이 비석을 업고 있는 거북이 이름이 '비시'라고 하는데 용의 8번째 아들이라해서 일명 '용팔이'라고..

 

 

 

 

이 비석들 뒤쪽으로

역대황제가 하사한 서적을 전문적으로 보존하는 규문각과

공자의 일생의 사적을 기재한 석각 '성적도'를 전문적으로 보존하는 성적전이 있지만

시간에 쫓기는 페키지여행자는 그런것을 다 챙기기는 어렵다. 그래서 패스하고는 열심히 가이드의 뒤를 따르기 바쁘다.

그래도 '아들 낳는 나무'한번 쓰다듬어 주고.'.대성문'을 넘는다.

 

 

 

대성문은

맹자가 '공자의 사상과 학술은 집대성이다'라고 한 말에서 따온 말이란다.

대성문은 과거에는 다만 공자의 제사를 지낼때에야만이 열 수 있다고 했는데..

요즘에는 매일 열려있다. 그렇다면 매일이 제사인가..?

그럴수도 있겠다. 매일 수많은 참배객이 몰려들어서 향불을 피워대니 매일이 제사아닌가..

어쩜 공자님도 1년에 한번 열리는 제사보다 매일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와서 들여다봐주는 것이 덜 심심하실 거이라..

 

 

 

 

 대성문을 지나면 공자가 학문을 강연했던 '행단(杏壇)을 지난다.

 

정자는 금나라(1115-1234년)때 최초 건축하였으며, 명나라 융경삼년(1569년)에 새로 건축하였다고 한다.

 

'행단' 두 글자는 금나라의 저명한 학자이자 대학사인 당회영이란 사람이 쓴 것이라고 하는데..

 

 

행단위쪽으로 공묘의 주체건축이자, 역대로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장소인 '대성전'이 나온다.

 

대성전은 동서의 넓이가 45.78m이고, 남북의 길이가 24.89m, 높이가 24.80m이다.

겹처마지붕이며 등마루가 아홉개이고 들보에는 조각이 되어 있고, 용마루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어 그 모습이 웅장하여 중국의 주요 건축물 중의 하나라고 한다.

특히, 대전 앞의 10개의 돌기둥에는 세겨진 화려한 용부조는 고대 석조예술의 걸작이라 한다.

 

 

 

청대 웅정황제가 친필로 썼다고 하는 '대성전'금편액 아래로 젊은 청년이 학업성취를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

 

 

내부를 들여다보면 중앙의 감실에 공자의 소상이 모셔져 있다.

 

말로는 공자의 위상이 학문에 있어서는 황제에 버금간다고 말하고 있으면서, 그의 소상에 앉은 먼지를 보면

그들이 말하는 만큼 그를 소중하게 모시는 건지..알 수가 없다.

 

 

 

역대 연성공들이 행정을 보았던 관아..라고 들었던 거 같은데..???

 

공자의 46대 자손인 공종원이 송나라때 인종으로부터 '연성공(衍省公)에 책봉된 이후

역대왕조들은 공자의 모든 직계후손에게 '연성공'의 지위를 부여하고 이 지역을 다스릴 권한을 주었다.  

이 곳은 그들이 행정을 다스리던 일종의 관공서와 같은 곳이다.

 

 

공묘에서 성벽을 끼고 돌아나와서 공부로 향한다.

 

 

거리의 마차, 성벽 등운 옛날 노국시절의 분위기가 이랬을까..하는 느낌을 준다

 

 

저 성벽을 끼고 어디론가 따라 갔더니 '성부(聖府), 성스러운 관청'라는 현판이 걸린 孔府로 들어간다.

공부는 '연성공'으로 불렸던 공자의 역대 혈족직계 장손들이 세대로 거주하면서 정무를 처리했던 관아와 서저가 결합된 대규모의 관저이다.

특히, 공부의 전체 건축군의 규모가 얼마나 방대한지 '천하 제일가'라는 존칭을 가지고 있단다.

 

공자가 살아생전에 초가 3칸 자리에 여러번의 개축을 거친 뒤

청대에는 이르러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는데, 방만해도 463개인데다 부지면적이 16헥타르에 이른다고 하니

중국에서 공씨 가문의 권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케 한다.

 

 

 

공부의 중문을 통과하고 있다. 중문위에 '聖人之門'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중문을 들어서니 중광문(重光門)이 정원 한가운데 서 있다.

이 중광문은 공부의 중문과 정청사이에 있으며, 황제가 오거나 연선공이 결혼을 할 때만 문이 열린단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이 왔을 때도 이 문이 열렸었단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이 왔을 때는 열리지 않았다는데..그것은 왜일까..??

그것은 그가 대통령 취임하기 전, 대통령 당선자 자격으로 왔기 때문이란다. 너무 성급하게 왔었나보다..ㅎㅎ

 

내재문을 들어서면 연성공이 살던 안가가 나온다.

내재문은 공씨외의 외간 남자는 절대 들어갈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안채 대문서쪽 담벼락 한쪽 귀퉁이에 보면 물을 흘려보내는 돌로 만들어진 석류(石流)가 있는데,

그것은 짐꾼들이 물을 길어와서 바로 안채로 들어가지 못하므로

'석류'에 쏟아부으면 안채의 늪에 흘러들어 안채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내외가 아주 철저하였던 모양이다.

 

공부와 안채를 돌아본 소감에 의하면

공자의 직계후손들은 단지 공자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역대 왕조로부터 수많은 은혜를 향유하며 이곳 공부에서 풍족한 생활을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왕조가 멸망하고 마지막 77대 연성공인 '공덕성'이 장개석을 따라 대만으로 떠남으로서 연성공의 공부에서 생활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대만으로 들어간 77대 연성공은 그 곳 대만에서 또 다른 혜택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하니..

공자의 가피가 후손들에게 대대손손..

정말 죽어서 천년, 살아서 천년이라할 만큼 대대손손 이어지고 있는듯 하다

 

 

 

역대황실로부터 은혜를 입으며 자손을 번성시킨 공자가족의 후손은 지금까지 82대까지 이어지고 있고 인구로만도 400만명에 달하는

지구상에서 연속기간이 제일 길며 인구수가 제일많은 가문중 하나란다.

그 중에서 공자의 후손이 제일 많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 이 곳 곡부이다. 곡부에 200,000만명의 공씨가 산다나..

저 좌판에 앉아있는 사람의 20%가 공씨란다. 

 

 

공부 안내가 끝난 다음 다시 전동차로 공림으로 향한다.

공자 후손들의 가족묘지인 공림(孔林)은 걸어서 가면 공자묘까지만 갈수 있고

1인당 20위안을 지불하고 전동차로 움직이면 공림을 한바퀴 다 돌아준단다.

전동차로 돌기로 한다.

학생들은 아주 신이 났다. 공림을 잘 볼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아이들처럼 전동차를 탈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신이 났다ㅎㅎ

 

주요 포인트에서 가이드가 설명을 해 주었지만

카메라 밧데리가 아웃되고 하루종일 너무 피곤해서 이제 내용은 들어오질 않는다.

 

단지, 바람이 시원할 뿐이다.

 

 

전하는바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공씨들은 약 650여년전 원나라때 사자를 따라 고려를 방문하여 고려에 거주하였던 공자의 56대손의 후손으로 본다.

650여년의 세월이 흘러 지금 우리나라 공씨들은 약 58만여명에 도달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