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나라 /12-09 프랑스

파리의 첫 여정, 에펠탑과 개선문

노코미스 2012. 9. 28. 15:19

 

8월 30일(목) 오후 날씨:빗줄기 오락가락

 

12시에 파리 북역에 도착한 우리는 파리현지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아마도 파리에서 가장 허접한 식당정도 될 것이야~ 그런 곳으로 안내받아가서

점심식사를 한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맛없는 스파게티는 처음먹어본다.

우리나라에 처음 스파게티가 도입되었을 당시 보급되었던 냉동 스파게티도 그 보다는 맛있었다.

퍼진 면에, 부족한 소스, 그것도 시큼한..

 

자유의 파리, 낭만의 파리에 왔다고 그리도 좋아했건만

그 행복감도 잠깐이고 점심을 먹는동안 앞으로 남은여정동안 이수준의 식사가 계속된다면

아마도 난 프랑스 여행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버릴꺼야~ 할 정도의

절망감을 느낀다.

 

다행히 바게트는 여전히 맛있어서

빵에 샐러드를 끼워서 그것만으로도 배를 빵빵하게 채울 수 있어서 다소 감정이 진정되었다.

 

 

 

점심 식사를 하곤 제일먼저 향하는 곳은 사이요 궁.

사이요 궁은 파리에 오면 누구나 가장 먼저 신고식을 하는 곳이다

물론 목적은 사이요 궁 자체라기 보다는 에펠탑이다.

 

 

 

이곳이 에펠탑의 전신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6년전이나 그 후나 에펠탑은 여전하다.

 

그리고 파리도 여전하다. 그 바람도 그 하늘도 그리고 에펠도..

 

 

 

이렇게 고고하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탑이지만 

정작 가까이에서 보면 흉측스러운 철근구조물일뿐이요, 그런 이유와 더불어 건축당시에는

이 거대한 구조물이 파리 미관을 헤칠것이라는 이유로 파리지엥들의 거친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는 역사가 있다.

 

에펠탑의 역사는 많은 이가 알다시피 1898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 박람회를 개최하면서

이에 적합한 기념물로 선정되면서부터 시작된다.

 

1851년 영국런던에서 근대 최초의 세계박람회가 시작된 이후,

세계박람회는 혁신적인 발명품을 최초로 선보이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고

1898년 제 10회 프랑스 세계박람회도 마찬가지로자신들의 기술강국의 면모를 뽐낼수 있는 상징물이 필요했었다.

 

공모전에 제출된 100여점의 설계안들 중에 당대의 유명한 교량기술자 귀스타브 에펠이 제출한 설계안은

높이 300m의 노출격자형 철근구조물로 경이와 회의를 동시에 받았다고 한다

 

당대의 유명한 작가인 모파상 같은 이는 탑이 완성된 후,

늘 탑에 가서 점심식사를 하였다고 한다. 이유는..

"파리에서 에펠탑을 보이지 않는 유일한 장소는 여기뿐"이기 때문이라나~^^

 

그럴정도로 파리지엥들의 걱정을 한 몸에 받았던 에펠탑이었다.

 

아뭏든 그런저런 걱정과 논란속에서도 에펠탑이 선택되었고,

이후 이 거대 구조물은 매우 적은 노동력과 싼 비용으로 불과 몇 개월만에 완성되었다.

예를 들면, 에펠탑은 아래에서부터 하나하나 쌓아올라간 것이 아니라

부분부분을 제작하여 블럭처럼 한층한층 조립해가는 공법을 적용함으로써

비용과 시간, 그리고 노동력을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었다 한다.

 

그것은 에펠이 풍력등의 하중을 받는 금속아취와 금속 트러스의 성질에 관한 앞선 지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탄생되었지만

이제는 명실공히 파리의 랜드마크가 되어서 사람들은 에펠탑을 보기 위하여 파리로 오게 되었다.

 

넓디넓은 공간속에 우뚝 솟아있는 저 모습

얼마나 경이로운가..

 

 

사요궁에서 빠른시간내에 관광을 마친 후 다시 타워전망대를 오르기 위하여

샹드 마르스(Champs de mars)광장으로 향한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아찔했다. 흘러가는 구름에 탑이 넘어자빠지는 아찔한 착시감을 느낀다.

 

300m라는 높이는 지금도 높지만 당대에는 그 어떤 구조물보다 높았고 그 위용도 대단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오히려 에펠탑자신을 흉내낸 동경의 도꾜타워보다 높지는 않다고 한다.

그럼에도 시각적으로는 도꾜타워보다 훨씬 웅장하고 높아보인다.

 

 

 

탑은 1,2,3층 구조로 되어 엘리베이트로 운행되는데

1층에는 우체국, 시네마, 스낵바와 레스토랑이 있고, 2층에는 기념품점, 스낵바, 레스토랑,

3층에는 귀스타프 에펠의 밀랍인형이 있는 사무실과 전망대가 있다.

 

우리는 최종 3층 전망대로 갈 것이다

그러나 일단, 2층전망대에 내려서 엘리베이트를 갈아타야 한다.

 

 

 

3층 전망대에 오르면 파리시내를 360도 조망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내가 아는 모습들만 눈에 들어온다

 

이 곳은 조금전 우리가 에펠탑 전신을 조망했던 사요궁의 전경이다. 

에펠탑전망대에서 보니 양쪽 날개를 펼치고 비상하는 새의 모습을 하고 있는 사요궁의 모습이 멋지다.

 

사이요 궁 역시 만국박람회를 기념하여 지은 건물이다.

 

구 사요궁은 1867년 만국박람회 때 국제회의기구의 회의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가,

현재 이 건물은 1937년 만국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하여 재건축된 건물이다.  

 

 사이요궁의 두 날개사이에 있는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에펠탑의 전망이 매우 좋다.

좀 전에 우리는 이미 이곳에서 에펠탑의 전신을 감상하고 내려온 것이다

매번 갈 때마다 버스로 이동하니 에펠탑과 궁이 멀리 떨어져 있는 줄 알았는데

위에서 올려다보니 에펠탑에서 사이요 궁까지는 직선으로 길이 연결되어 있다.

 

 

 

센강에는 37개의 다리가 있다고 하는데, 그 중, 사진 중간쯤 동상 4개가 난간 양쪽으로 우뚝 솟아있는 다리가

알렉산드 3세 다리이다. 그 아래쪽이 앵발리드 다리, 그리고 선착장을 사이에 두고  앞쪽의 다리가 르 알마 다리이다

 

르 알마 다리 북쪽 광장 중앙 모서리 가로수들 사이에 보일듯말듯 빨간점이 까페의 차양이다.

내일 저녁이면 우리는 저곳에서 차를 마시며 얼어붙은 온몸을 녹이게 될 것이다.

그리곤 그 아래쪽의 alma-marceau지하철을 타고 우리의 숙소로 들어가게 된다.

 

이제, 파리의 구석구석이 추억이로구나..ㅎㅎ

 

 

 

위쪽 사진의 다리들은 탑을 중심에 두고 오른편으로 보이는 다리라면,

이 사진에 등장하는 다리들은 에펠 왼편으로 보이는 다리들이다.

제일앞쪽으로 보이는 다리가 '비라켕다리(pont de bir-hakeim)'이다. 

 

비라켕다리는 2층복층구조로 되어 있고 1층으로는 인도와 차로가 있고 2층으로는 지하철이 다니는 구조로 되어 있단다.

내가 이 다리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수많은 파리 영화들이 이곳에서 촬영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관심있는 영화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우울한 마론브론드가 등장하는 첫장면의 배경이 이곳이라니..

 

그외 최근의 영화들로는 '아멜리아' '택시' '인셉션'등이 이곳을 찍었다고 한다.

한번더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어떤 느낌으로 오는지..

 

그리고 다리중앙에 돌출되어 있는 부분은 강안에 길게 조성된 인공섬 '백조의 섬(Alles de cygnes)'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단다.

 

그 섬 서쪽 끝부분에 소형 '자유의 여신상'이 서 있다. 뉴욕을 향하고 있단다.

어떤이는 뉴욕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선물받은 것에 대한 인사로 보내온 것이라하기도 하고

어떤이는

19세기 빠리의 작가 바르톨디가 뉴욕에 '자유의 여신상'을 기증하고 나머지 원본을 이곳에 세웠다고 하기도 한다.

 

섬 위쪽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다리가

우리가 여고시절에 그렇게 의미도 모른 채 외고 다니던 '미라보 다리'이다.

 

다른 구절은 다 잊어도 절대 잊혀질 것 같지 않은 구절..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간다..."

 

나의 인생은 어디쯤 흘러가고 있을까..?

 

 

 

에펠탑을 설계하고 시공했던 에펠은 탑 꼭대기에 자신의 조그마한 사무실을 내고는 손님들을 맞이하곤 했단다.

지금 장면은 1889년 9월 10일, 미국의 유명한 물리학자이며 발명가인 토머스 에디슨을 맞이하는 장면이란다.

 

이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에디슨은 자신이 1889년 만국박람회에 제출하였던 그 유명한 축음기를 에펠에게 주었다고 한다.

아마도 에디슨이 손으로 가르키는 저 작은 사각형이 축음기모형인가..?

 

 

 

에펠탑을 본 다음 코스는 당연히 개선문이다.

 

개선문은 샹젤리제 거리 끝 12개의 방사상 대로의 중심부인 샤를 드 골 광장(1753~1970년에는 에투알 광장이라 했음)

한복판에 세워져 있는 전승기념 구조물이다.

 

1806년에 나폴레옹이 오스테를리츠 전쟁승리를 자축하기 위하여 시공을 명하였으나 

여러번의 설계변경과 정치적 이유로 인하여 그가 죽은 후 1836년에야 완공되었다고 한다.

 

개선문 시공을 명령한 이후 나폴레옹은 정치적 몰락을 맞이하게 되고

마지막 유배지인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1821년 5월5일에 사망하게 되므로 살아생전엔 이 곳을 통과하지 못했다.

대신, 1840년 12월 15일에 명예회복되어서야 유해의 상태로 이곳을 통과하게 되었다.

권력의 무상함을 느낀다.

 

 

 

샹제리제 거리로 향하고 있는 개선문

 

 

이 개선문은 로마의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을 본떠 만들었는데, 그 높이와 너비는 2배 크기(50*45m)이고,

프랑수아 뤼드가 전면에 조각으로 장식해놓은

'1792년 용사들의 출정'(일명 라 마르세예즈 La Marseillaise, 오른쪽 사진)이 유명하다.

내용은 1792년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했을 때 의용군의 출정을 나타내고 있다.

 

왼쪽은 코르도의 '빈의 평화'

 

 

개선문의 안쪽 벽에는 각 전투에 참가했던 600여 명의 장군이름이 새겨져 있고,

그 안의 자그마한 미술실에는 개선문의 역사를 말해주는 그림·사진·모형 들이 진열되어 있다.

 

 

 

전망대로 올라가면 앞으로는 콩코르드 광장·루브르 궁이 보이고, 뒤로는 라 데팡스가 보인다.

현재 내가 서 있는 뒤쪽으로 라데팡스구역이 보인다.

샹제리제 거리를 축으로 연결하면 콩코드광장-개선문-라데팡스 지구의 뉴 개선문이 일직선으로 연결된단다.

 

개선문의 바닥에는 무명용사묘가 설치되어 '영원한 불길'이 언제나 타오르고 있다.

내 뒷편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건축물 꼭대기에서 보면 시내가 다 내려 보인다고 하는데,,,시간이 없어서.

 

 

개선문 관광을 마치고 시간이 조금 남아서 샹제리제 거리를 타고 올라가본다.

 

2~300미터 올라가니 우리그룹의 시니어 집단이 오매불망하는

리도쇼의 근거지 Lido극장이 보인다.

 

샹제리제 인 파리,

낙원의 들판 샹제리제~

오~ 샹제리제 오~ 샹제리제~ ♬

 

 

 

기럭지가 장난 아닌 아이도 있고..

 

 

거리의 가판대 모습도 스케치해보고..

 

 

실내 까페에서도 어김없이 바깥으로 향하는 그들의 독특한 문화도 살피고..

 

대도시라는 공간안에 있으면서도 차갑지 아니하고 정겨움이 있는 이런 공간적 분위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공간속에 담겨있는 시간성이 이유일거 같다.

이 샹제리제 거리는 우리나라 대도시의 거리처럼 현대에 조성된 거리가 아니라

이미 1724년경에 조성된 거리란다.

 

즉, 1616년까지는 공터와 시장이 있던 곳이었는데,

앙리 4세의 두번째 부인인 마리 드 메디치(Marie de Meici)가 튈르리 공원을 확장하면서 산책로와 공원이 생기고,

1724년 정도에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 조성되었단다.

 

그러니, 이 거리에는 약 280여년의 시간성 속에 수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스토리가 담겨있으니

따뜻할 수 밖에..

 

 

 

다시 모여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간다.

 

가는 길에 왼편 가로수길 너머로 아른 아른 보이는 엘리제 궁전(대통령 궁)도 구경하고

오른편으로는 나폴레옹이 누워있는 앵발리드 궁전도 지나치고

 

앞쪽으로는 윈도 브러쉬가 훔치고 지나간 빗방울 묻은 창문사이로

콩코드 광장의 오벨리스크도 감상하고..

 

 

 

그러는 사이 파리의 첫날이 저물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