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reading/영화읽기

질병과 죽음을 안고 있는 생애 마지막 단계, 무엇이 사랑인가? '아무르'

노코미스 2013. 1. 4. 12:11

 

 

 

 

 

 


아무르 (2012)

Love 
7.8
감독
미카엘 하네케
출연
장 루이 트렝티냥, 엠마누엘 리바, 이자벨 위페르, 알렉상드르 타로, 윌리엄 쉬멜
정보
드라마, 로맨스/멜로 |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 127 분 | 2012-12-19

 

AMOUR  사랑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에 대한 최악의 정의는 도올 김용옥의 정의이다.

그는 최근 펴낸 저서 '사랑하지 말자'에서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사용되고 있는 '사랑'이란 단어는

성을 죄악시한 서구 기독교문명속에서 축적된 의식의 컴플렉스속에서 형성된 싸구려 팬섹슈얼리즘 문화를 대변하는 단어라 주장한다.

일부는 정확한 지적이라 치더라도 그것이 모든 사랑을 대변하지는 못하므로

그저 도올의 여러 괘변중 하나라고 치부해버리고..

 

오늘날 젊은 사람들을 대변할 수 있는 서구의 젊은 철학자 알랭드보통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는 사람과 사람의 사랑은 '욕구'의 문제라고 하였다.

그것도 옳은 말이긴 하겠지만 그것은 사랑이 시작되는 싯점에 적용되기에 적당한 논리이다.

 

좀 더 성숙한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이란 '관심'이며'존중'이며 '책임감'이라 했다. 그리고 이해하는 것이고 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렇듯 다양한 사랑의 정의앞에서 감독 미카엘 하네케는

노년기의 사랑에 대해서 고민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주인공 조르쥬(쟝루이 트린티냥 연기)와 안느(엠마뉴엘 리바 연기)는

파리 중산층이 사는 아파트에서 자식에게 의지하지 않고 노부부가 서로 의지해가면서 독립적으로 잘 살아가는

 80대의 부부이다. 80대이긴 하지만, 그래서 몸짓이 조금 느려지긴 했지만 골방 늙은이가 아닌

생활인으로 건강하게 살아가는 나름 성공된 삶을 살아가는 부부이다. 

 

 

 

 그런 부부에게 어느날 갑자기 예기치 않은 질병이 찾아온다. 이런 질병은 생물학적 한계로 인해서 오는 질병이라

노인의학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질병들이다. 어느날 갑자기 안느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듯한 모습..

 

좀 전에 '조금은 괴팍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여전히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야~'라며

반평생을 같이 살아온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던 안느가 남편을 향한 촛점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남편의 요구에 전혀 반응을 하지 않는다.

 

그런 반응을 보는 상대배우자의 당혹스러움은 어떤 것일까..?

 

 

남편 조르쥬의 놀라움은 정작 이 상황이 장난이기를 바라는 마음 반,

장난이라도 이런 장난은 싫을만큼 이 상황이 주는 충격이 크다.

 

그러나, 장난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조르쥬는 재빠른 대응으로 안느의 상태를 점검하고 현실을 수용할 준비를 한다.

의사의 설명을 듣고, 휠체어를 준비하고 아이들에게 상황을 설명해주고

가사를 돌볼 사람을 고용하고..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조르쥬가 아내인 안느의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아내를 끝까지 책임질 것이라는 헌신적 각오와

그리고 자녀에게 노부모가 혐오스러운 짐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현실적 각오이다.

 

 

 

남편이자 아버지의 이런 마음과 달리

이런 상황에서 자식들의 반응은 좀 더 물질적이고 피상적이다 

 

조르쥬와 안느에게는 외동딸 에바(이자벨 위페르 연기)가 있다. 그녀는 예쁘고 착하고 평범하다.

여느 중년처럼 남편과의 관계에서 약간의 소원함이 있고, 자녀의 방황때문에 머리아프고 

노년을 위해서 재테크를 어떻게 해야할지를 고민해야 하는 중년의 자기 삶을 살아야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엄마의 상태를 보면서 당혹스럽고 슬프기도 하지만 정작 자식인 자기가 뭘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제안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아버지더러 '왜 엄마를 입원시키지 않느냐', "왜 엄마를 혼자 가두느냐?'며 따진다.

 

그것이 아버지가 엄마의 마지막 인간적 품위를 지켜주기 위한 최선의 배려인지도 모르고

자식은 노부모의 선택에 판단자 역할만 하려고 든다.

 

그것이 병든 노부모에 대응하는 모든 자녀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영화는 노인의 생물학적 퇴행으로부터 오는 심리학적 특성들을 잘 표현한다.

 

조르쥬는 자신들 부부가 자녀에게 부담이 되길 원칠 않는다. 어쨋거나 노부분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길 바란다.

 

그리고 에바가 제안하듯이 안느를 요양병원에 입원시킬 수도 있겠으나 그는 안느에게 요양병원을 보내지 않겠노라고 약속했다.

이것은, 현대사회가 노인복지를 위하여 세웠다는 요양병원이 과연 노인 환자들의 인간적 품위를 최소한이라도 지켜주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리고 점차 안느가 악화되어가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지면서

자신의 가장 사적인 부분까지 노출시켜가면서까지 무방비상태로 타인의 손에 의지해야만 하는

수동적인 객체로서 안느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배우자의 참담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안느의 증세는 호전되기 보다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더 악화되어 간다.

노년기의 뇌세포의 퇴화 또는 기능저하는 생물학적 현상이라 노인의학에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인 듯하다. 

 

노년의 질병과 관련된 어떤 증세가 보일 때, 그 증세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본인은 어떤 심정일까?

 

뇌경색으로 오는 반신불수 노인의 역할을 해야하는 안느역의 엠마누엘 리바 역시 실제로 80대의 할머니시다.

그녀 역시 젊은 날 '히로시마 내사랑'의 히로인역을 맡았던 만만찮은 스타이다.

지금도 80이라는 숫자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뒤태가 꼿꼿하고 눈망울이 초롱하다.

 

반신불수에서 점차 전신마비 지경상태까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가는 노년의 모습을

연기하기 위하여 혼신을 다하는 모습에 80대의 노익장을 느끼게 한다. 

 

아뭏든, 안느는 생물학적 변화에 따르는 심리적 변화를 아주 리얼하게 잘 표현한다.

처음에는 망가져버린 자신의 모습에 대한 수치심으로 어떻게든 스스로 해 보려고 노력하기도 하고,

애쓰도 잘 되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화가나서 혼자 화를 내보기도 하고

또 컨디션이 좋은 어떤 날 훈련이 잘되면 모든것이 잘 될 것 같아 희망이 보이기도 하고,

점차 증세가 악화되면서 타인과의 소통부터 단절되면서 일방적으로 간호받는 수동적 객체로 전락되면서

사회적 약자로서의 절망에 이르기까지..

 

 

 

한 때는 평생 이렇게 아름답게 품위를 지키며 늙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모든게 변하기 시작한다.

 

이 상황에서 가족이 해 줄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까?

 

배우자로서 끝까지 안느를 보호하고

마지막까지 책임지고자 했었던 조르쥬의 사랑은 이런 상황에서 조차도 지켜질 수 있을까? 

 

이 영화의 가장 하이라이트는 조르쥬가 안느에게 가한 마지막 행위이다. 

그는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옳았는가? 

그것은 누구를 위한 행위인가? 조르쥬 자신을 위한? 아님 안느를 위한?

 

안느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을 과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 조르쥬 자신을 위한 행위였다면

인간이 말하는 '사랑'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를 보여주기 위했음인가?

 

아뭏든

정의하기 어려운 단어 '아무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