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reading/영화읽기

과연 누가 진실이고 무엇이 진실인가? '라쇼몽'

노코미스 2013. 2. 11. 16:18

 

 


라쇼몽 (0000)

In The Woods 
8.6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출연
미후네 도시로, 모리 마사유키, 쿄 마치코, 시무라 다카시, 치아키 미노루
정보
스릴러 | 일본 | 90 분 | 0000-00-00

 

시간 날 때 언젠가는 봐야지 하고 찜해두었던 영화 '라쇼몽'

명절을 앞둔 전날 여유있게 꺼내본다.

 

영화는 막이 열리는 순간부터 이미 장대같은 비가 내리고 있다.

그 빗소리는 마치 이 세상의 모든 사소한 잡음들을 다 삼켜버릴듯한 거대한 기세로 장막을 가득 채운다.

 

전란통 화재에 반은 소실되어 금방이라도 내려앉아버릴것만 같은 '라생문'아래에서 믿을 수 없는 인간에 대해

한숨쉬며 고민하고 고뇌하는 스님과 나뭇꾼의 한숨소리는 기세등등한 빗소리에 잠길듯 묻힐듯하며 간간히 흘러나온다.

 

여기에 비를 피하러 뛰어 들어온 한 사람이 더 더해지면서 오늘 오후 스님과 나뭇꾼이 연루되었던 '숲속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즉, 이 영화의 메인 스토리는 숲속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다.

그러나, 이 스토리는 4개의 스토리로 각색된다. 누가 누구입장에서 사건을 보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세 사람 그리고 목격자 한사람. 모두 신원은 밝혀졌다. 연루된 사람 모두 자기 변론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련된 4사람의 이야기가 모두 다르다. 과연 누구의 말이 진실이고 누구의 말이 거짓인가?

 

모두들 서로가 서로를 거짓말쟁이라고 한다. 자신만이 진실이라고 한다.

그들의 눈빛은 각자 자신들이 진실임을 증명한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왜 똑 같은 하나의 사건이 관련된 네 사람에 의해 모두 다르게 이야기되고 있을까?

이 중에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과연 누가 진실이란 말인가..?

 

이야기를 청했던 사람은 중간중간 후렴을 넣는다.

 

"그게 인간이야, 인간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야~

인간들의 그런 이기심과 아귀다툼에 신물이나서 여기 라쇼몽에 살던 도깨비들까지 도망을 갔다는 이야기가 있어~

전쟁과 화재와 가난..이렇게 먹기 힘든 세상에 진실이 어디에 있겠어?"

 

영화는

이런 이야기를 심플하면서도 임펙트있게 전개해나간다.

 

관아에 끌려와서 피의자들이 자기변론을 할 때, 감독은 피의자들을 관객앞에 앉힌다.

영화속에서는 그들을 심판하는 판사가 없다. 영화속의 피의자들은 관객을 대상으로 자신을 변론한다. 

관객은 그 순간 영화밖의 객체가 아닌 스토리속의 한 영역을 맡게 되면서 단순한 구경꾼이 아닌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대한 인식의 주체가 될 수 밖에 없다. 대단한 감독이다.

 

그리고, 숲속에서 일어난 단순한 살인사건을 있는 그대로 하나의 사건으로 영화화했을 수도 있을법한데

'라쇼몽(羅生門)'이라는 불교적 상징물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것은 감독의 또 다른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숲속에서 있었던 실제 살인사건은 상당히 단순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다조마루라고 하는 산적이 있고, 마침 숲길을 지나가던 사무라이 남편과 아릿다운 아내가 있었는데

아내가 너무 아름답게 보였던 다조마루가 사무라이 남편을 속여서 포박을 해 둔 후, 아내를 간통하게 된다.

그후, 숲에 들어간 나뭇군에 의해  사무라이 남편은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이 남편을 누가 죽였는지 그 살인범을 찾는 과정에

관객들은 배심원으로 앉게 된다.

 

그 과정에 목격자와 피의자로 붙들려 온 나뭇꾼과 산적 다조마루, 아내,

그리고 영매를 통해서 들려주는 남편 사무라이 말이 모두 다 다르다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제일 먼저 잡혀온 다조마루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여자가 너무 아름다워서 겁탈한 것 까지는 모두 같다. 처음에는 너무 아름다워서 아내로 취하고 싶었지만

막상 취하고 나니 일반 여인들과 다를바가 없어서 그냥 갈려고 했더니 여인이 울며 쫓아와서 하는 말이

"여자가 두 남자를 섬기고 어떻게 살겠느냐 ? 두 사람이 진검 승부를 하여 자신은 살아남은 쪽을 택할 터이니

남편과 승부를 겨루어라~"라고 애걸을 하여

남자의 밧줄을 풀어주고 23회의 검을 주고 받은 후 본인이 남편을 죽였다고 진술한다

 

 

 

다음에 가까운 사찰에서 숨어있다 잡혀온 여인은 다르게 말한다.

 

다조마루가 자신을 겁탈한 후, 자신과 함께 떠나자고 했다.

당신을 먹여살릴만한 돈도 마련이 되어 있고, 당신이 원한다면 산적짓도 그만두고 다른 일도 할 수 있다고 그녀를 설득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을 버릴수 없다하고는 다조마루에게 끝까지 저항하자 그가 달아났다.

 

그가 떠나자,

결박당해 있는 남편에게 쫓아가 안겨 흐느껴 울며 위로를 받고 용서를 구하고자 하였으나

 남편의 얼굴에 서려있는 증오와 분노의 독기를 보는 순간 치솟아오르는 굴욕감과 모욕감에

자신의 단도로 남편을 스스로 죽였다고 진술한다.

 

 

 

 

세번째 영매를 통해서 들려주는 죽은 남편의 이야기는 또 다른 개연성으로 전개된다.

 

자신의 앞에서 아내를 욕보인 다조마루는 여인을 잠깐 다독이며 위로하는듯이 하고는 돌아서서 떠나려하니,

울며 쓰러져 있던 아내가 다조마루를 쫓아가서는 자신을 데리고 가 달라고 애원했다.

"난, 이런 순간을 늘 기다려왔다. 다른 삶을 늘 꿈꾸워 왔다. 어디든 날 데려가 달라~

그리고 당신에게 욕을 당하고 저 남자와 살 수가 없다. 그러니 저 남자를 죽여달라~

그리고는 날 어디로든 데리고 가 달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다조마루는 여인을 밀쳐내었고

포박당한채 아내가 겁탈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분노와 증오감으로 울분을 감추지 못했던

남편 사무라이는 아내를 밀쳐내는 다조마루를 보는 순간 그 남자에 대한 증오심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대신, 자신을 죽여달라하는 아내에 대한 배신감에 울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다조마루가 남편을 죽일 마음이 없어보이자 아내가 더욱 포악해지면서 두 남자에게 난폭하게 덤비기 시작했다.

"너는 내 남편이면서 왜 날 보호하지 못하고 구하질 못하였느냐"고 따짐과 동시에

 자신을 겁탈하고는 책임지지 않는 다조마루를 향해서도 공격을 취하자 다조마루는 도망을 가버리고

아내는 자신을 보호해주지 못하면서 자신을 모욕하는 남편을 자신의 단도로 살해한다.

 

..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를 들은 나뭇꾼은 이 모든 이야기들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나뭇꾼이 알고 있는 또 다른 이야기는 무엇인가? 

 

그러나 나뭇꾼은 지금에와서 쉽게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도 지금까지 거짓증언을 해 왔으므로..

 

..

여기까지 보고 나면 관객들은

4명 모두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똑 같은 사실 줄거리이지만 다만 사실에 대한 인식의 주관성에서 오는 차이임을 느끼게 된다.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에서 고민하는 문제가 여기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과연 우리가 어떤 객체를 바라볼 때 주체의 주관적 경험과 완전히 분리된 객관적 진실만을 볼 수 있을것인가?

하는 인식론적 문제말이다.

 

모든 사건을 바라볼 때, 누가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른 진실을 보게 된다는 이야기를 '숲속에서 일어난 단순한 살인사건'하나로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은 이렇게 설득력있게 풀어간다.

그 심플한 이야기를 다른 곳도 아닌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라쇼몽(羅生門)'아래에서 말이지..

 

'라쇼몽(羅生門)' 이란 '그물처럼 얽혀진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으로 직역되는 것 같다.

 

이렇듯 사람마다 각자의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관점에서 사실들을 해석하니

인간사 얼마나 복잡하고 힘들겠어~?

 

비록 삶이 만만치 않고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복잡한 삶속에는 여전히 서로를 신뢰할만한 절대 선(善)이 어딘가에는 존재하고 있음도

영화는 함께 보여준다.

 

일본 영화의 고전답게 묵직한 메시지가 심플하면서도 가볍지 않게 아주 잘 그려진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