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친이랑 나들이를 나오게 되면 가끔 황당한 경우들이 더러 있습니다.
당신이 나가자고 졸라서 나왔는데
조금 움직이면 다리가 아파서 못가겠다고 그만 집에 가자 졸릅니다.
오늘도 벌써 걱정입니다.
잠시 지나면 또 다리 아프다고 집에 가자할터인데..
그래서 보광사 본 후,
일성왕릉은 먼 발치에서 위치만 보고 돌아갈려고 했었는데
보광사 보살님이 굳이 일성왕릉을 보고 가시라고 권하니 마지못해 일성왕릉으로 향합니다.
멀지 않을까 걱정했더니 몇 발짝 안된다고, 본인이 안내 하시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서니
모친도 어쩌지 못합니다.
보광사 모퉁이에 코스모스무리가 눈부십니다.
약간의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길은 소나무 그림자가 내려앉은 흙길로 되어 있어서
아주 걷기가 편합니다.
불과 100m정도의 전방에 왕릉이 위치하고 있습닌다.
소나무숲으로 울타리를 만들고 봉분이 있는 부분만 열려있어서
봉분위로는 햇살이 쏟아집니다.
일성왕(逸聖王)은 신라 제 7대 왕이군요. 재위기간은 134년에서 154년까지 20년이구요.
「삼국사기」에 의하면 3대 유리왕의 맏아들이거나 혹은 일지 갈문왕의 아들이거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삼국유사」에서는 의하면 3대 유리왕의 조카이거나 6대 지마왕의 아들일거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박씨성이구요. 왕릉의 봉분은 지름 약 16m, 높이 약 5m규모입니다
일성왕은 농사짓는 땅을 늘리고 제방을 수리하여 농업을 권장하였으며, 민간에서 주옥, 금은 사용을 금지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치에 주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군요(사적 제 173호)
주로 왕릉에서 보이는 호석이 보이지 않으나
봉분아래 자세히 보면 호석으로 사용되었을 자연석이 일부 남아있어서 호석을 사용했을 것이라 합니다.
대신 무덤 아래 2단의 축대는 경내를 보호하기 위하여 후대에 설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축대 아래 음식을 올리는 석판의 형태를 보면 이 일대의 모든 왕릉에서
똑 같은 모양을 보게 됩니다. 아마도 일괄적으로 공사를 한 모양입니다.
역시 고대사에 일가견이 있는 분들은 이 무덤이 일성왕릉의 무덤이 맞느냐 아니냐를 놓고
길게 의문제기하시는 분들이 많지만, 일성왕은 출생에 대한 의견역시 다양합니다.
유리왕의 맏아들이라 보는 관점, 조카로 보는 관점, 지마왕의 아들로 보는 관점, 일지 갈문왕의 아들로 보는 관점 등.
유리왕의 맏아들로 보는 관점은
"앞서 탈해가 돌아가셨을 때 신하들은 유리의 태자 일성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누군가가 말하기를
'일성이 비록 맏아들이기는 하지만 위엄과 현명함이 파사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여
마침내 파사를 왕위에 오르도록 한 것이다"는 기록(삼국사기)에 근거하는 것 같습니다.
기록에 따라,
유리왕의 태자 일성과 일성이사금을 당연히 동일 인물로 보는 것이고..
유리왕의 조카로 보는 관점은
파사 이사금 역시 유리왕의 아우 '나로'의 아들일 수도 있다(삼국유사)는 설에 근거합니다
파사 임금이 유리왕의 조카라면 일성이 파사와 형제라 치더라도 유리왕의 조카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유리왕의 아들이나 조카라 치면 도대체 그는 몇세에 왕위에 올랐다는 건가요?
유리 이후로 탈해 재위 기간 23년, 파사 32년, 지마 22년 도합 77년.
탈해 원년에 태어났다하더라도 77세인데, 그 역시 재위 기간 20년(서기134~154년)인데
그러면 77세부터 97세까지 치세를 했다는 의미인가요..??
아뭏든 역사적으로는 그의 시기에는 말갈의 습격과 노략질이 많았군요
때이른 서리와, 가뭄과 우박과 우환들로 편하지는 않으셨겠습니다
능으로 이르는 길은 매우 호젓하니 산책하기 아주 좋은 길입니다.
절과 왕릉 사이 계곡에 계단식 논이 있습니다.
익어가는 벼이삭으로 계곡은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풍요의 계절입니다.
물빠진 개울가에 고마리조차 빛이 나는 계절입니다.
다리 아파서 걷기 힘들다든 모친,
친구가 있으니 보조 맞추어서 잘도 걷습니다.
모친이 관절이 좋지 않다하니
보살님이 민간요법으로 가막사리 고운 물이 좋다며 열심히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마침 길가에 가막사리 무리가 한 모듬 피어있더군요~
가을햇살아래 빛나는 자연도 아름답지만
그 길에 동무하나 대동하고 걸어가는 인생길도 아름답군요~
인연따라 들어간 보광사에서 친절한 보살님 만나
그 덕분에 우리 엄니가 횡재하셨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득템한 소나무 그늘에서 자생한 민들레 한 주먹도 보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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