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성왕릉을 보고는 다시 마을자리쪽으로 되돌아 내려옵니다
남간 마을 입구에서부터 남쪽방향으로 포석정로가 이어져 있습니다.
벼논 사이로 나 있는 포석정로를 따라 가면 길 가장자리 벼논에 남간사 당간지주가 있습니다.
사진 오른쪽 끝부분에 보면 논바닥 한가운데 석주 두개가 나란히 서 있지요~
남간사지 당간지주는 좁은 농로 바로 옆에 위치한 논바닥 한가운데에
마치 히말라야산 설인의 다리같은 모습으로 두 다리를 나란히 하여 든든하게 서 있습니다.
당간지주의 위치는 남간사 절터에서 남쪽으로 500m 아래쪽이랍니다.
그렇다면 남간사(南澗寺)본당은 이로부터 북쪽으로 500m 위쪽이겠군요~
사진에서 당간지주 위쪽으로 보이는 남간마을쪽에 본당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남간마을이라 명하나 봅니다.
남간사는 통일신라 중기 (문헌상으로는 헌강왕 시절 무렵이라고는 하나 정확치는 않다하더이다)에
신라고승 혜통스님이 살던 집터에 지어진 사찰로 현재는 민가로 이용되고 있답니다.
그 터에 주춧돌, 축대 몇개, 석정 정도의 흔적이 남아있다는데 저는 그 곳까지는 확인하지 못하였답니다.
대충 위치정도 확인하고는 다시 창림사지를 찾아 떠납니다.
가는 길은 추수를 앞둔 황금들판으로 풍요롭습니다.
참말 몇십년만에 풍성한 가을 들판을 가까이서 느낍니다.
오른쪽으로는 수확철이 가까워진 금성의 황금들판을 끼고,
왼쪽으로는 은빛 물결을 이루는 금오봉 억새풀 언덕을 끼고
좁은 농로를 어슬픈 운전솜씨로 조심조심 달려가다보니..
저 언덕위쪽에 하얀 3층 석탑이 눈에 들어옵니다.
가까이서 보기위해서는 차에서 내려서 언덕위로 걸어올라가야 하지만
모친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맘에 걸려서 그것 또한 포기합니다.
차에 앉아 줌으로 땡겨서 위치만 확인하고는 그냥 통과합니다.
창림사지 역시 통일신라 중기에 지어진 사찰이라 하는데 조선초기까지는 유지되고 있었다합니다.
이 터가 신라유적에서 의미가 있는것은 이곳이 신라 최초의 왕궁터라는 점 때문입니다.
하필 왜 이런곳에 왕궁터?라는 의심이 나는 위치이긴하지만..
삼국유사에 의하면 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나자 육개 마을 촌장들이 동천에서 몸을 씻기고 난 다음
「남산의 서쪽 기슭에 궁실을 짓고 이 두 성스런 아이를 받들어 모셨다. 사내아이는 알에서 생겼는데
알이 표주박과 같아 성을 박이라 하였고 계집아이(알영)는 태어난 곳 우물의 이름(알영정)으로 이름을 붙였다.
두 성인의 나이 열세살에 이르렀다. 오봉 원년은 갑자년(기원전 57년)인데, 사내아이를 세워 왕으로 삼고
계집아이는 왕후로 삼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남산의 서쪽 기슭을 현재 창림사터로 봅니다.
왕이 된 몇년 후 그가 금성을 지어서 지금의 경주시내로 왕궁을 옮기지만
실제로 그는 이곳에서 건국을 하였고 초기 몇년은 이곳에서 통치를 한 것입니다.
지금의 상태로 보면 과연 이 곳이 왕궁터로서 적합한 곳이었는지
풍토지리학적으로는 문외한인 저같은 사람이 논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뭏든 조금 의심스러워보이긴 합니다만..
하지만
이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그가 태어났다고 하는 우물 즉, 나정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고
앞으로는 경주의 황금 들판이 넘실거리고
뒤로는 정기가 강한 남산을 의지하고 있고..
어째보면 명당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뭏든
이곳, 탑동에서 신라라는 신생국가가, 앞으로 천년의역사를 펼칠 한 어린 국가가 막 태동을 하게 되는 것이군요~
그래보니 감개가 무량해집니다.
대충 혼자 속으로 의심하고 해명하고 정리한 후
부족한 운전실력으로 좁은 농로를 따라 간신히 포석정 뒤쪽에 위치한 마을로 들어섭니다.
마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는 포석정지 담장을 따라 매표소쪽으로 향합니다.
어딘선가 시골화장실에서나 날 수 있는 묘한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동네 어르신들 농사에 쓰는 퇴비 발효냄새인가 했더니..
원흉은 이 은행이군요~
바람이 불때 마다 매표소앞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은행알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ㅎ
그림으로 보는 포석정(鮑石亭)의 전경입니다.
입구 안내문에 의하면 포석정이 아니라 포석정지(鮑石亭址)라 표현되고 있습니다.
포석정의 성격이 여흥, 어무산신무, 경애왕, 최후, 풍류 등의 단어로 규정되고 있군요.
언제 건립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만 사료들을 종합해본 결과
포석정은 통일신라 이전 삼국시대에 건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군요~
공원으로 들어가 봅니다.
9월인데도 추색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대한민국 사적 제 1호 포석정지(址)입니다.
포석정의 정은 정자 정(亭)이므로 원래는 이곳에 정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정자누각은 없어지고 석조구조물만 남아있는 형태이겠지요.
포석정은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를 행하던 곳이랍니다.
유상곡수는 삼월삼짇날에 술잔을 물에 띄워 두고, 왕과 귀빈을 비롯한 참석자가
물길을 따라 앉아서 술잔이 돌아오기 전에 시를 짓던 놀이를 말한답니다.
하지만 최근들어 화랑세기에서 포석사(祠)에 대한 기록이 나오면서
포석정은 연회를 행하던 장소보다는 의식이 행해졌던 곳이라는 설이 점차 힘을 받고 있는 듯 합니다.
다만,
학자들은 후백제의 견훤이 포석정에 군사들을 이끌고 침입한 것이
포석정이 연회를 행하던 곳으로 불리게 된 것과 다소 연관이 있지 않을까 추측한답니다.
아뭏든
원래 목적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927년 경애왕은 이곳에서 연회를 즐기다 후백제 군대에게 붙잡혔고
백제의 견훤에게 자살을 강요당하여 결국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부분에 있어서도
쇠락해가는 국가를 걱정하면서 사당에 기도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설도 있지만
각자의 다른 입장들을 살펴보면 사료에 기반한 다양한 해석중 하나이겠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방법이 객관성 보다는 김씨와 박씨간의 파벌주의(?) 같은 것이 다소 개입되어 있는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
해서, 아직 어느 쪽이 정설인지 알 수가 없어보입니다.
제가 가문 파벌주의-적당한 용어가 떠오르지 않아 이렇게 표현합니다만..-로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말하자면
견훤에게 죽음을 강요당한 경애왕은 박씨가문의 왕이고
견훤에 의해 후대왕으로 추앙되어 신라의 마지막 왕이 된 경순왕은 김씨가문입니다.
김씨가문에서는 박씨가문의 경애왕이 나라를 다스리고 도탄에 빠진 왕으로 그려야만
경순왕이 왕건에게 나라갖다 바친 것에 대한 책임이 다소 경감될 것이고,
박씨가문에서는 경애왕이 신궁에 기도하다가 후백제 군대에게 붙잡힌 것으로 해야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왕이 될 뿐만 아니라
더불어 신라의 문을 닫게 되는 책임을 왕건에게 알아서 나라를 갖다바친
김씨 가문의 경순왕에게 돌릴 수 있게 되니
포석정이 연회장이었느냐 사당이었느냐 그리고
그날 경애왕이 연회를 베풀었느냐 아니면 제사를 지내고 있었느냐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잇슈이기도 하지만
박씨와 김씨 두 가문간에 민감한 사안이 아닐 수 없어 보입니다.
물론 파벌주의를 떠나서
두 가설 중 하나는 사실이겠지요만..
아뭏든
1,000년의 왕실이 한 순간에 무너진 장소입니다.
슬픈 역사와 상관없이 떨어져 누운 낙엽색은 아름답기만 합니다.
'내 나라 > 서라벌 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못위에 솟은 연화석탑이 특이한 망월사~ (0) | 2015.10.10 |
---|---|
배리 석조여래삼존입상과 페츄니아 축담이 아름다운 삼불사 (0) | 2015.10.10 |
솔그림자 내려앉은 오솔길을 따라 '신라 7대 왕 일성왕릉' (0) | 2015.10.04 |
인연따라 들러게 된 탑동 비구니 사찰, 보광사 (0) | 2015.10.04 |
박혁거세를 서라벌 왕으로 추대한 진한 6촌장의 재실, 양산재(楊山齋) (0) | 2015.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