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reading/영화읽기

아리스토텔레스의 도시 테살로니카를 배경으로 한 '영원과 하루'

노코미스 2016. 8. 1. 13:04

 

 

 

 

 

세계가 인정한 노장의 영화에 내가 이렇다 저렇다 감상평을 쓴다는 것은

감히 일반인이 도달할 수 없는 넓고 깊은 정신세계를 가진 고승의 사자후에 토를 다는 것과 같은..

절대 무의미한 일로 보인다.

 

그리고 이미 이 영화의 의미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대해서는 여기저기서 많은 사람들이 평론을 하고 있어서

굳이 내같은 문외한까지 끼어들 자리는 더더욱 없어보인다.

 

나같은 깊이가 얕은 사람이 보고 이해하기에는 좀 어렵고 무겁고 다소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이미 설명된 평론가들의 해설을 읽고보니 이해안되는 바 아니어서 그냥 그렇게 받아들인다.

 

 

 

"내 말을 가지고 이제야 사랑하는 당신에게로 돌아왔소

너무늦었지만 모든 건 진실을 위한 기다림이었다오"

 

코폴라무(작은꽃)

세니띠스(망명)

에르호(나)

아르가르디니(너무 늦음)

 

평생을 진실을 찾아 헤매었던 노시인이 드디어 삶의 마지막 순간에 만난 4개의 시어

그 시어로 부르는 삶의 진실.

 

 

 

 

그러나 한가지 해결되지 않은 의문 하나.

 

진실을 찾은 노시인에게 '내일'은 무엇일까?

 

   안나, 당신은 내일을 'eternity and a day'라 하였지..

 

 

'Eternity and a day'

 

나의 고민은 영화가 끝나고 이 단어를 음미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영원과 하루,  이것이 '영원'과 '하루'가 각자 독자적인 단어로서

서로 대비적 용어로서 사용된 것인지..

아니면

두 단어가 and로 결합되어 연속성을 지닌 단일단어화된 

즉, '영원+하루'같은 용례로 쓰인 것인지 도무지 가늠이 안된다.

 

의 의미로 본다면 '영원히 기억되는 하루' '하루의 영원성'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마지막에 안나가 말했다는 ''내일이란 'Eternity and a day''는 문장으로 보면 이것은 '영원하고도 하루더'라는 의미가 더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다.

 

아..

나의 이 부질없는 의문에 누군가가 답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라도 좋으니 답변 좀 해주시길 기다릴께요~

 

 

 

 

아뭏든

이 영화는 내가 스스로 모든 메시지와 상징성을 명쾌하게 이해하기에는

감독이 추구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사유의 깊이가 너무 깊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이해부족의 문제는 결국 내 문제이지 영화나 감독의 문제는 아니다.

 

이해의 문제를 제외하면 여러가지로 내게 의미있는 영화였다.

그리스 북부 지역의 테살로니키라는 지역에 대한 정서-

아테네나 그리스남부도서지역과는 완전히 다른 - 그리스의 또 다른 얼굴을 볼 수 있게 해 주었고

그리스가 처해있는 국경문제, 이민자 문제, 역사의식 등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을 엿볼수 있는 계기,

그리고

그리스에는 단순히 춤추고 노래하며 삶을 찬미하는 조르바만 있는것이 아니고

고대 철학의 근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손들이 아직 살아가고 있다는 점 등을

재인식하게 해 준 영화가 되었다.

 

무라까미 하루끼가 그랬다. 대체로 그리스사람들은 왜 저렇게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을까?라고..

처음 그의 말을 들었을 때, 난 좀 의아했었다. 무슨..? 내가 알고 있는 그리스인이란

아무튼 디오니소스의 피를 물려받은 조르바인들이고

우울과 진지는 그들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페르소나라고 생각했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들에게는 신화시대부터 평생을 진리를 찾아 떠돌던 영웅들과 아폴론의 피도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하루끼가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