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썰을 풀기전에 먼저 재미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내 주변에 지인이 '기생충'영화가 요즘 핫하다하니 보러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영화관엘 갔단다.
그리고는 영화의 주인공인 기생충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 것인지를 생각하며 매우 집중해서 보고 있는데
하마 나올까 하마 나올까 기다렸는데 끝내 나타나지 않더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함께 웃었던 기억이 있다.
나도 영화평론가들의 칼럼을 통해 사전이해를 하기전까지만 하더라도 정말 무척추동물 기생충을 다룬 재난영화인가 생각했다.
그것이 동물에관한 이야기가 아닌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들은 의문은
왜 '기생충'이라는 타이틀을 붙였을까가 궁금했다.
영화를 보고나니 더더욱 궁금해졌다. 이토록 선하게 생긴 소시민인 그들에게 왜 기생충이라 네이밍했을까?
감독은 기생충을 어떤 유형의 동물로 규정하면서 그 명칭을 차용했을까?
혹시, 내가 모르는 다른 의미의 기생충이란 의미가 있나해서 위키사전을 찾아보니
기생충의 사전적 의미는
첫째, 다른 동물의 체내외에 붙어 해당 숙주의 양분을 얻어 살아가는 무척추동물을 이르는말
둘째,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남에게 덧붙어서 살아가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로 규정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는 사람을 칭하는 타이틀이므로 두번째 의미로 네이밍했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의문을 갖는 것은 잇슈는
기생충을 사람에게 적용할 때 그 의미는 사람의 유형을 구분하는 용어가 아닌 사람의 질을 평가하는 용어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즉, 낮잡아 부르는 말로.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이 사람들을 박사장네보다 다만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리고 약간의 비도덕적인 방법으로 한가족이 모두 그 집의 집사자리를 꿰찼다는 이유로
이들에게 기생충이라는 단어로 폄하해도 되느냐 하는 것이다.
특히,
기우네가 박사장네가족이 캠핑가고 남은 빈 공간에서 짧은순간
부자의 느낌을 코스프레해보고 그 순간을 즐기다가 예상치못한 돌발상황에서 잠깐의 행복은 삑사리나버리고
간신히 맨발로 도망쳐 나오자 직면하게 되는 현실은
장마비에 물에 잠긴 반지하방과 도로에서 넘쳐내려온 오물에 둥둥 떠다니는 허접한 집기들이었다.
그 대비된 모습을 보면서 사실 나는 가슴이 아팠다.
더불어, 대한민국처럼 it강국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사방곳곳에서 터져나오는 와이파이 신호하나 건지기가 어려운 지하단간방에서
일을 하고 싶어도 일거리가 없어 일을 못하는 기우네의 삑사리 인생을 보면서
과연 그들의 행동을 질낮은 개인의 일탈로 치부해도 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몇가지 도덕적으로 용인되지 않은 부분들도 있지만
그것은 그들을 비난하기 위하여 차용한, 기우의 표현으로 치자면 일종의 상징이다.
평생 노력해도 어쩌면 그 축축한 냄새나는 반지하방에서 탈출하지 못할 기우네가
비어있는 부잣집의 공기를 또는 공간을 잠시 공유 또는 차용했다해서
그들을 기생충이라 폄하해도 될 것인가? 그것은 분명, 가진자의 탐욕에서 오는 관점아닌가?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적당한 선에서 자선을 베풀고
그 이상 선을 넘어오는 걸 지극히 경계한다. 선을 넘는다는 것은 나의 기득권을 빼앗기는 것이다.
나는
이 시점에서
봉준호라는 감독의 휴머니티를 믿는 사람으로서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감독은 '기생충'이라는 타이틀을 누구의 관점에서 붙인것일까?
감독자신의 관점인가? 박사장네의 관점인가?
그리고 이 네이밍은 규정의 네이밍인가 경고의 네이밍인가?
기득권을 대표하는 박사장네의 관점에서 이 타이틀을 붙였다면 나는 이 영화를 훌륭한 블랙코미디로 인정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들 입장에서 본다면 당연히 자신들의 부에 빌붙어 사는 기생충정도로 보일 수 있겠지.
하지만 감독의 관점에서 기우네를 기생충으로 칭했다면
봉준호 감독의 사회문제 인식에 실망하지 않을수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
분명 기우네는 박사장네의 그늘밑에서 살아가지만 공짜로 빌붙어서 사는 것은 아니다. 그들 나름의 역할과 도움을 제공한다.
온전히 해당숙주의 양분을 뺏어먹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도덕성에 있어서는 약간의 불감증이라는 문제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들 말대로 그들도 돈만 있으면 박사장 사모님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것은
개인의 문제로 다룰 소재가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로 접근할 문제로 보여진다.
가난의 문제는 현대사회의 매우 중요한 잇슈중 하나이다. 그것으로 파생되는 계층화문제도 큰 잇슈중 하나일터이고.
가난의 문제를 호러영화로 편집했던 대표적인 영화가 허정이라는 감독의 '숨바꼭질'이라고 본다. 그리고
가난은 어찌보면 사람을 몰염치하게 만든다는 가설을 편견없이 보여주는 영화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사회구조속에서 가난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빈부간의 문화적 계층을 만들고 그리하여 선을 넘으면 안되는 차별과 경계를 만들고,
그리하여 반사회적 문제를 야기시킬 수 밖에 없는 사회구조적 문제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앞에 언급된 두 영화, '숨바꼭질'과 '어느가족'은 내가 인지하는 그런 관점이 어느 정도 녹아있는 것 같아 나는 마음에 들었다.
가난에 노출되고, 남의 것을 탐하고, 남의 것을 강제로 공유하는 것을 옳다 그르다로 판단할 수 있는 개인의 일탈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위의 두 감독들은 빈한한 가족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회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기생충'이 위 두 영화와 차별화되는 부분이 있다면
가난의 문제를 빈부계층화문제 및 계층간 차별화문제로 접근하는 부분일 것이다.
여기서 내가 궁금한 것은 빈부간의 계층화 및 차별화현상을 빈자들의 문제로 규정하고자 하는 것인지,
그런 흐름과 조짐에 대한 경고인 것인지..심히 궁금하다.
나는 경고로 받아들이고 싶다.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추악한 기득권유지에 대한 가진자들의 욕구를,
그리고 내가 처해보지 못한 가난한 자들에 대한 무차별적 폄하를 경계하라는 의미로. 그야말로 '상징'으로.
그래야 이 영화가 좋은 영화가 되는 것이다.
만약, 경제력에 의한 어쩔수 없는 빈부계층사회에서
자신들의 삑사리 인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부자들의 기생충으로 규정하는 영화라면
이 관점은 참으로 위험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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