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reading/책읽기

무라카미 하루끼의 '1Q84'

노코미스 2009. 10. 4. 23:16

 

  

 

무라카미 하루끼~

'상실의 시대' 이후, 공식적으로 처음 선택한 책이다. '먼 북소리' 및 다양한 잡기들을 많이 쓰긴 했지만

'상실의 시대'의 여운을 오랜동안 지니기 위해서 다른 책은 일부러 피해왔다.

그러다가 이번에 '1Q84'가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어온다.

 

이 책은 읽는 내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책 중 하나인데..

주로 그 생각은, 책의 내용보다는 작가의 재능 또는 작가의 작법에 관한 것이다. 

 

하나는, 무라까미 하루끼..이 사람 거의 천재가 아닌가하는.. 생각

 

텍스트 전반을 거쳐서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 수학, 음악, 문학 영역을 종횡무진하면서 소설을 상당히

입체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체호프의 소설작법 '권총이 등장하면 반드시 발사되어야 한다'는 기본원칙을 충실히 따르면서

텍스트에 등장하는 모든 단어, 모든 문장, 모든 문맥은 반드시 다른 단어, 다른 문장, 다른 문맥과  

연결되어 마치 음악이 춤추듯이 이야기로 살아난다.

 

그리고 처음에는 서로 아무 상관없이 전혀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면서

전혀 만날 일이 없어보이던 사람들 즉, 아오마메와 덴고를 각각 x축과 y축에 놓고는

그것이 언젠가는 0점에서 만나도록 이끌어가는 기술..

그리고 미리, x와 y에 상수를 매우 정교하게 설정해 놓고

하나하나 명쾌하게 풀어가는 기술은 대단히 유연하다.

거기에 바흐의 평균율 작법기교와 매치하는 기법까지 더하면 이는 뭐.. 소설이 입체화되어 나타나는 느낌이랄까.. 

 

그러니, 어느 부분에서 새로운 단어가 제시되면 그 단어가 다음 어디에서 어떻게 풀어져 나갈지가 기대되어 도무지  책을 손에서 놓기가 쉽질 않다.

 

그러나, 두번째의 느낌은 다소 실망스러운 부분이다.

무라까미 하루끼가 머리도 좋고 재주있는 이야기꾼이기는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의 연륜과 명성이 갖는 권위를 다소 편리한 방향으로 이용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물론 이것은 무라카미 하루끼 개인의 사고유형일수도 있겠다.

내가 그를 개인적으로 잘 모르지만..그의 작품을 읽어면서 느끼는 바는 

아마도 그는 혈액형으로 치자면 A형이라기보다는 B형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무슨 말인고 하면, 글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쓰기 보다는 유희하듯이 쉽게 쉽게 또는 자신의 편의성에 맞추어 얼마든지 상황을 조절하면서 쓴다는 말인데..

 

타고난 재능상 이야기를 쉽게 풀어가는 것은 좋지만.. 가끔은 그가 최근에 공부하고 읽은 내용들을 걸름없이 너무 직접적으로 작품에 포함시켜 자신의 주제에 억지로 갖다 끼워서 페이지 늘이기용으로 쓰기도 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예를 들면, 체홉의 '사할린 섬'이야기나 '고양이 마을'이야기나 또는  후카에리가 낭독한 긴 구전소설 등은 굳이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면서까지 넣을 필요가 있는 내용일까 하는 생각..

 

세번째는 주제와 관련된 생각이다.

텍스트 중간중간에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물론 풀어놓고는 있지만 주제를 마무리시키는 결정적 하이라이트가 짚히지 않는다. 사건의 흐름으로 보건데 그것은  '선구'의 리더를 암살하는 장면에서 드러나야 할 것 같은데..

물론, 하루끼 스스로도 그런 노력을 한 것 처럼 보이다. 리더가 죽기전에 자신의 모습을 아오마메에게 모두 보여줌으로서 그가 처해 있는 개인적 딜레마 즉, 한 조직의 리더역할과 개인의 신념간의 갶에서 오는 딜레마(이는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집단'의 주제에 대한 반복이다)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에 대한 길고 긴 강연을 폄으로서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는 듯이 보이긴 하나..전혀 그의 출현이 앞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를 하나도 해결해 주는 것도 없고,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결론지어주는 것도 없다. 

 

네번째는 찜찜한 마무리다.

마무리 부분에서 아오마메와 덴고가 가까이 오면서 거의 x축과 y축이 교차지점 0에 가까워지긴 했지만, 그 과정에 풀어야 할 여러가지 변수들의 성격을 독자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지 않음으로서 영~ 결론에 대한 의문을 갖게 만든다. 즉, 아직 덴고의 어머니, '상실'의 의미, 리틀피플, 안티리틀피플 등 소설속에 등장은 했어나 아직 발사되지 않은 단어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것을 풀지 않는 이상 그가 주장해 오고 적용해온 소설작법의 기본 원칙이 유명무실해져 버린다.

 

이 상태로는 소설의 장르조차 애매모호하다. SF소설인지, 덴고와 아오마메의 오랜시간을 지켜온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인지, 아니면 사회체제 또는 선과 악에 대한 철학적 고민인지..

물론 그가 말하길..'소설가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일 뿐이라'하였다

하더라도..사실적으로 보면, 아직 '문제제기'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조만간에 제 3권을 발간할 거라는 말이 나돌기도 하니..그렇게 되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기는 하다..

 

마지막으로 이 부분은 무라카미 하루끼에게 가장 치명적인 부분이며, 나에게 가장 허무감을 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그것은 바로 아오마메가 '선구'의 리더를 암살하는 장면이다.

 

어쩌면 리더의 암살 장면은 텍스트의 전체 흐름상. 지금까지 끌어왔던 많은 의문점을 풀어주거나 또는 맺혀있었던 많은 매듭들을 풀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장면일거라 생각했는데..실제로는 그닥 풀어준 것이 없다.

 

후카에리가 등장하면서부터 끊임없이 책의 전반을 채우고 있는 내용이 '선구'라는 집단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것의 실체와 존재 이유..작가는 그것에 대해 무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을 법 한데..아무것도 없다. 단지, '선구'의 리더인 개인적 고민만 살짝 언급하곤..그 다음은 해결방법이 없으니 구렁이 담 너머가듯이 스리슬쩍 SF로 쟝르로 넘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살짝 실망을 금치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 미심쩍은 회의감을 구체적인 실망감으로 전환시켜주는 우연을 하나 경험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지옥의 묵시록'이다.

 

오후에 이 책을 다 읽고, 저녁시간에는 우연히 발견하게 된 '지옥의 묵시록을 보게 되었다. 

3시간이 넘는 긴 영화를 지루하단 생각없이 재미있게 보았다. 

마침내 암살명령을 받은 '윌라드 대령'이 '카츠대위'를 찾아내었다.

근데, 여기서부터..난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이게 뭐야..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인데..

어떤 장면과 계속 오버랩된다. 뭐 이래~?

 

조금전에 내가 손에서 놓았던 '1Q84'의 리더암살장면과 똑 같다.

누가 문제인가, 누가 누구것을 베꼈는가..?

당연히 '지옥의 묵시록'은 오래전 영화이다.

물론, 하루끼가 그것에서 영감을 얻을수는 있었겠지..

그러나 이는 영감의 수준이 아니다.

 

암살자가 여자가 아니고 남자라는 점

사용한 도구가 핀이 아니고 도끼라는 점

방법이 급살이 아닌 도살이라는 점

장소가 고급호텔이 아닌 깊은 정글이었다는 점..

그 외는 똑 같다.  

 

그가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밀실에서 거대한 몸집의 카츠대위와 처음으로 대면하는 장면,

오랜시간 어둠에 적응되어 있는 망막을 밝은 햇빛에 노출시키면서 괴로워하는 모습..

이미 개인의 사상이 스며들 공간이 없어진 조직속에서

갈갈이 찢어진 영혼을 안고 괴로워하는 한 개인으로서의 리더..

암살명령을 받은 암살자와 암살대상이 되는 피암살자간에 오가는 영적 신뢰.. 등등

 

영화를 보기전에 난,

각각 600페이지가 넘는 2권의 책을 지루할 사이없이 노련한 작가의 사고의 유연함과 작가의 유려한 작법에

이끌려다니면서 공감하고 감탄하면서 아주 재미있게 그리고 편안하게 작품을 즐겼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난 다음, 하루끼에게 뭔가 살짝 속은 듯한 이 느낌은..뭘까??

내가 민감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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