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reading/책읽기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The Sense of the Ending)'

노코미스 2013. 6. 17. 15:42

 

 

2011년 맨부커 수상작

원제: The Sense of the Ending

작자: 줄리언 반스

번역: 최세희

 

스승의 날, 신랑이 책방에 근무하는 제자가 책 몇권을 이것저것 가지고 왔다.

이 친구는 스승한테 가지고 온다해서 특별히 도서를 선정하는 기준이 딱히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냥 본인생각에 내가 읽었으면 좋을 듯한 책을 고르는 듯 하다.

그 중에는 몸에는 참 좋을 것 같은데 도저히 손이 가지 않는 책도 있고..

어떤 것은 영 마음도 손도 가지 않는 책도 있다.

 

그래도 가끔 좋은 책도 있다.

이 책은 제목이 나를 은근히 잡아당기는 처음부터 마력이 있는 책이었다.

소설일거라 생각도 못했다. 엣세이일까..?

아뭏든 받은지 한달정도 되었으나 그동안 읽을 시간이 없어 묵혀두고 있다가

지난 일요일 딸 만나러 서울가야할 일이 있어서 오가는 시간을 활용하기 위하여 가지고 갔었는데..

 

이것이 대박이다.

 

근래에 읽었던 책 중에 가장 지적이며 철학적이며, 문학적이라고 하면 너무 과찬일까?

아니 전혀 과찬이 아니다.

내 표현언어가 짧아서 그렇지 여기서 칭찬을 한없이 더 보태더라도 전혀 과하다할 수 없는 책이 이책이다.

내가 미술이건 음악이건, 문학이건 조금 깊이 들어가면 무식이 탄로날만큼 그 깊이가 얇은 만큼

줄리언 반스 같은 이도 문학에 조금만 관심이 있으면 알만한 사람은 알듯한 이미 무게감 있는 작가일진데,

내가 그를 몰라본 것이다.

 

1부는 단순히 10대 20대를 지나면서 겪는 젊은 날의 성장통에 대한 이야기쯤으로 보고 넘어갔다.

전혀 다른 이야기라 생각하고 넘겼던 2부로 들어가면서 소설은 1부에서 깔아놓은 포석을 바탕으로

매우 철학적이며 논리적이며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진행된다.

우리의 일상적 기억과 논리가 얼마나 부정확하고 불명확한지 순간순간 독자의 뒤통수를 소리없이 후리친다.

그 반전의 논리가 너무나 디테일하고 정확해서 그 앞에서 한마디 섣부른 의문조차 제기할 수 없다.

 

처음부터 1인칭 화자의 기억은 특별한 순서없이 두서없이 떠오른다.

어차피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 같지 않은 법이다.

이것이 소설의 모티브이다.

 

사람들은 각자가 자기의 기억으로 자신의 소설을 쓴다.

그래서 모든 세상의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기억으로 쓰면 소설 몇권은 쓸 수 있다고 장담한다.

그러나, 남들의 입장에서보면 그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소설이 될지를 잘 몰라서들 하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도 개인이 시간속에서 기억하고 있는 진실과 실제로 일어난 일로서의 진실이 다름으로 해서 생기는  

충격적인 사건을 그리고 있다.

소설속의 나는 다소 진지할 때 진지하지 못하는 찌질함도 있지만 나름대로 쾌할하고 다정다감하고

예의도 지킬 줄 아는 기본은 되는 인간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실제로 어느 순간의 나는 얼마나 찌질하고 못나고 유치하고 유아적이었는지..

그리고 그런 착각으로 인하여 40년이 지난 이후 나의 그런 착각으로 인하여

얼마나 충격적이고 엄청난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인지..

 영화 올드보이만큼이나 그 결과는 더 충격적이다.

 

소설속의 주인공처럼 가끔 우리역시 내가 내뱉은지조차 잊고 있었던 나의 말이 저주가 되어

나를 회한의 두려움에 떨도록 만드는 그런 경우를 가끔 경험하기도 하지만

다행히 정말 다행히도 우리가 겪은 그런 저주는 소설속의 이야기에 비하면 정말 사소한 것들이었다. 

아니 어쩌면 더 큰 불행이었을수도 있으나 어쩌면 내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것'일수도 있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자신이 어린날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했던 말들이

주변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 결과에 대해서 조차 전혀 감(The sense of the Ending)을 잡지 못하다가 나중에 진실을 알고 난 후

사죄한다 말조차 의미없는 통한의 상황에 놓인 평범하지만 찌질할 수 밖에 없었던 한 남자의 이야기..

 

부정확한 기억과

부정확한 자료와 부정확한 해석에 의해서 사실이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한 개인의 역사에 관련된 사람들의 책임에 대한 이야기

 

그 이야기를 풀어가는 소설적 기법에 있어서도 기가 막힌다.

줄리언 반스가 기획한 예측할 수 없는 그리고 충격적인 몇번의 반전에 휘둘리면서  

나의 논리적 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얄팍하고 단편적인 것인지를

부끄럽지만 한번 더 깨달으면서 좋은 책을 선물해준 나의 제자에게 감사문자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