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1989)
The Name Of The Rose





- 감독
- 장-자끄 아노
- 출연
- 숀 코너리, 크리스찬 슬레이터, 피도르 찰리아핀 주니어, 엘리야 배스킨, F. 머레이 아브라함
- 정보
- 스릴러 | 이탈리아, 프랑스, 서독 | 130 분 | 1989-06-03
첫 국내 개봉당시 영화가 가진 진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단지 숀코너리 얼굴하나 보려고 택했었던 영화.
중세 서구사회의 기독교문화나 그 종교사 등에 대한 이해가 전혀 무지했었던 시절에 보았던 나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에 대한 기호는 전혀 읽지못한채
문맹자가 책읽을 때 그림만 보듯이 그렇게 영상만 보고 나왔더랬다 .
최근 주말 시간 여유가 생기면서 그랬는지..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문득
사제복을 입고 있는 숀코너리와 알프스 깊은 계곡에 은둔해있었던 수도원의 잔상이 나의 뇌리에 떠오르면서
스카이라이프를 뒤져서 찾아보게 된 '장미의 이름'
여전히 이태리 북부의 산간 지역은 외로워보였지만 아름답고
산꼭대기에 우뚝 솟아있는 석조양식의 수도원은
나의 피아몬테지역에 대한 그리움을 자극하면서 영화속으로 끌어들인다.
다시 본 영화는
이전에 이 영화를 보면서 전혀 깨닫지도 느끼지도 못했던 수많은 상징과 기호로 점철되어 있었고
보기드문 수작임을 새삼 깨닫는다.
사후조사를 해 보니 움베리토 에코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란다.
원작은 더욱 더 방대하고 더 많은 역사와 레프런스와 기호들을 포함하고 있다지만
이해력이 약한 나같은 사람은 주제가 방대한 것 보다는 오히려 단순화시켜놓은게 더 좋다.
방대한 지식을 간추려서 2시간도안되는 분량으로 줄여서
주제를 명료하게 전달할 수 있는 영화라면 상당히 좋은 영화이다.
원작은 모르고 영화만 본 사람은 영화로만 느끼면 된다.
그 느낌이 만만치 않은 영화이다.
때는 1372년.. 우리가 역사속에서 중세 암흑기라 일컫는 14세기를 대표한다.
잔설이 남아있는 피아몬테 산악지대 어느 수도원에
프란체스코 소속 수도사 윌리엄과 그의 제자' 아르조'가 찾아온다.
그들은 베네딕토회에서 운영하는 이 수도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라는
교황청의 명령으로 이 곳에 왔다.
영화는 아직 어린 청소년기에 있었던 아르조가 먼 훗날 6-70년경이 지난 후에
그 수도원에서 보고 들었던 비밀스럽고 혼란스러웠던 기억들을 상기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다.
어린 아르조의 눈에는 이 수도원에서 일어나는 일과 보고 들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혼란스럽다.
이 수도원이 보여주는 온갖 종교적 독선과 숨겨야하는 수많은 비밀들..
수도사가 갖추어야 하는 덕목이 무엇인가?
즉, 왜 냉철한 이성을 신봉하는 스승은 끊임없이 교황청으로부터 위협을 받는가?
많은 사람들이 시대의 영적 지도자로 숭배하는 청빈한 엄격주의파 수사 우르베르토는
왜 또 교황청으로부터 위협을 받는가?
먹을 것이 넘쳐나는 수도원과는 달리 수도원 아래 마을의 사람들은 왜 저렇게 비참하게 살아가야 하는가?
천민촌의 이름모를 소녀와의 관계를 통해서 알게 된 이 알수 없는 감정은 또한 무엇인가?
이는 사랑을 실천하는 종교인에게 금지되어야 하는 감정인가?
인간에 대한 감정은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없는가?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모든 사건은
이 수도원의 서고에 보관되어 있었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냉철한 이성이
신에 대한 맹목적 신앙을 방해할 것이라 생각한 호르헤라는 노수사의 종교적 독선에 의해 시작되었음을 알게 된다.
물론, 이것은 이 영화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종교에서 이성은 필요한가?하는..
이성적인 수도사 윌리암의 과학적 조사에 의해서 밝혀진 살인사건의 전모는 다음과 같다
7일동안 수도원에서 발생했던 희생자들의 공통점은
모두 도서관의 필경사나 번역사들이었다.
그들의 주검에는 모두 혓바닥과 검지손가락 끝이 까맣게 변해있다.
그리고 어느 이상한 책 한권과 관계가 있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호르혜 수도사에게 그 책이 문제가 되는 것은
첫째, 하필이면 훌륭한 성자와 선지자들이라 하는 사람들까지도 신봉하게 만들어
하느님의 은혜로 창조된 이 세상의 형상을 <자연과학>으로 해석하게 만들고
하느님을 '자연의 이치'라는 허울좋은 이름으로 부르게 만드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의 서책이라는 점과
두번째는 그 책의 2권에서 '인간의 웃음'을 다루면서,
신에 대한 두려움을 다루는 종교인이 가장 경계해야 할 '웃음'을 마치
선을 지향하는 힘 또는 예술,
그리고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지혜라 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악마의 속삭임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웃음'에 대한 정의와 그의 논리가
수도사들에게 진실로 믿어지게 되는 날,
신학은 삼단논법의 이성앞에서 희롱거리가 될 것은 자명한 일..
이러저러한 두려움으로 이 서책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한 노수사는
책을 넘기는 모서리에다 독약을 묻혀서 지식에 대한 열망이 많은 수도사들을 하나하나 제거해나간다.
스승 윌리엄이 사건의 진상을 다 밝혔지만
오히려 교황청에서 나온 재판관은 일련의 사건들을 악마의 소행으로 묻으버리려 한다
종교는 자신들의 도그마를 유지하기 위하여
이번 살인사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두명의 수도사와
아르조에게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깨닫게 해 준 마을의 집시소녀를 이교도와 마녀로 희생시켜서
종교의 힘을 신비주의화시키고자 한다.
짚시소녀는 이번 살인사건과 아무관계도 없고 수도사를 유혹한 적도 없고
단지 생존을 위해 신체적 거래를 했을 뿐이지만 모든 죄는 이 가난하고 불쌍한 여인에게 뒤집어 씌운다.
아무리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스승님이라 할지라도
이 불쌍한 여인을 교황사절단의 마녀사냥에서 구해낼 도리가 없다.
스승 윌리엄이 그 시대에는 귀하디 귀한 손잡이식 돋보기로 상징되는 이성과 진리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유는
어느사회에서나 자신을 변호할 수 없고 변호할 능력이 없는 무지한 사람들이
희생당하지 않도록하기 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합리주의자 수도사 윌리엄 나름대로의 인간에 대한 동정이었다.
그러나 종교인이 이성을 맹신하게 될 때 하나의 함정이 있다.
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처럼 보일수도 있다는 점이다.
아뭏든,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날 밤 화형으로부터 짚시소녀를 살린 것은 아마도
밤새 그녀를 살려달라고 기도했던 아르조의 영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는 눈에 보이진 않지만 신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냥 믿을 수 있는 사실관계이다.
아르조는 마지막 노년에 그녀를 회상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이라 표현했고,
그런 피조물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했다.
즉, 그녀는 인간을 대표하는 상징이고, 아르조에 와서야 불쌍한 인간에 대한 사랑이 종교에 통합된다.
스승 윌리엄은 아르조에게 진리에 대한 사랑과 신에 대한 사랑을 가르쳐주려고 애썼지만
진심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은 몰랐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대 철학자들도 사랑이라 함은 신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 하였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육욕이라 하였다.
그러나, 아르조는 인간을 사랑하였다.
처음에 '장미의 이름'에서 장미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일까 궁금했었다.
영화를 보고나서, 장미란 인간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으나
아르조는 아직도 그녀의 이름을 모른다고 하였고,
실제로 움베르토 에코 역시 제목에 대한 해석은 독자의 몫이라고 하였으니
나도 잘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80이 넘은 아르조는
스승이 물려준 돋보기로 진리를 추구하면서
자기가 만난 피조물 중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인 인간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으면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해주었던 신을 경배하면서
어린시절 경험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으니 인간을 잊지않고 있다.
즉, 신에의 사랑
진리에의 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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