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9. 27. 월요일 날씨:쾌청
추석연휴를 맞아 모친을 모시고 경주 나들이를 나섰습니다.
그러잖아도 최근에 삼국시대 역사와 관련된 서적을 하나 읽다가
삼국유사를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모친이 무슨 마음이신지 경주를 가자십니다.
왜 하필 경주냐 여쭈니 그곳이 볼 것이 많지 않느냐 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우리나라에서 서울부산을 제외하곤 경주만큼 볼거리가 많은 곳도 드물지요.
유적지로 치자면 단연 으뜸이구요~
흔쾌히 시동을 겁니다.
그리고는 이참에 신라에 대해 좀 더 체계적으로 알아보자는 심정으로
신라가 시작되는 출발점부터 보자는 심정으로 출발합니다.
그래서 신라의 건국시조인 박혁거세의 탄생지 나정부터 시작합니다.
어머니한테도 그렇게 운을 띠웁니다. 모친도 뭔지는 모르지만 좋답니다.
경주 나들목으로 들어서서 포항쪽으로 조금만 가다보면 첫번째 사거리에서 언양쪽 길로 우회전합니다.
약 1키로미터 남짓 될까말까하게 가면 나정 주유소가 나오고 그곳을 끼고 북쪽으로 올라가면 됩니다.
입구에 나정, 양산재, 보광사, 배씨시조사당, 일성왕릉이 이 주변에 오밀조밀 모여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름한점없는 파란 코발트빛 하늘 아래 연분홍 코스모스가 하늘거리고
연회색 아스팔트 도로가 마을어귀까지 시원하게 뻗어있습니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가을소녀입니다.
코스모스 앞에서 내일보다는 젊은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나봅니다.
'경주 나정' 팻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소로를 따라 걷습니다.
이곳에는 벌써 가을빛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나정 주유소의 왼편을 끼고 올라오면 나정 주차장으로 바로 올 수 있으나
지금은 정비작업중이라 통행을 금지시켰더군요.
나정주유소에서 언양쪽으로 한 블럭 올라와서 좌회전하면
팻말있는 곳에서 다시 좌회전하여 농로를 따라 들어갑니다.
이 적막한 곳에 누가 찾아올까 했는데..
저 같은 마음으로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이 더러 있군요~
대부분이 가족단위의 관람객들이군요~
한국의 남쪽 지방 소나무들은 그 기상이 참 좋습니다.
유적지 입구에서 바라볼 때, 저 끝쪽으로 소나무 숲이 형성되어 있고
그 앞쪽으로는 초록빛 공터로 남아져 있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우물은 보이질 않습니다.
나정이라 하면 우물을 일컬을 텐데..
전설에서도 우물옆에 알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전에 보았던 사진들에는 조그만 비각도 있었던 거 같았는데 그런거 조차 없습니다.
안내판이 없으면 이곳이 유적지인지조차 알수가 없을만큼 흔적이 없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니 '나정 복원 정비 계획' 안내판이 있군요~
2002년에서 2005년 유적지 발굴조사를 한 모양이군요~
단지 우물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8각형의 신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우물터와 팔각 형태의 신궁지의 배치형태인모양이군요~
이 곳을 2020년까지 71억원을 들여서 복원할 모양이군요~
어마어마한군요~
잘되길 바랄 뿐입니다.
나정(蘿井)은 신라시대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깃든 우물로,
오릉의 동남쪽에 있는 남산끝자락 나즈마한 구릉에 자리하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옛날 진한 땅에는 여섯 촌이 있었는데, 기원전 69년 어느날 고허촌장 소벌공이
우물가에 흰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우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그 자리에 가 보았더니 말은 간 곳이 없고
단지 큰 알만 있었다. 그 알에서 사내아이가 나와 길렀는데, 이름을 혁거세라 하였다.
혁거세는 그 출생이 신비하고 기이하며 기량이 남달리 뛰어났으므로 사람들이 존경하였다.
혁거세가 13세가 되던 해(기원전 57년)에 이르러 6부 촌장들이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고,
나라이름을 서라벌이라 하였다.
-안내문 참고-
안내문에서는 신라건국이야기를 박혁거세 탄생설화처럼 신화화해서 말하지만
실제로는 박혁거세라고 하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 단순하진 않은 듯합니다.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박혁거세가 흉노족의 후예로서
기량이 예사롭지 않아 왕으로 추대된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원주민 집단인 진한 6촌장과의 관계에서는 을이었다느니,
실제로는 모계사회인 신라에서 알영이 진짜 왕이고 박혁거세는 오히려 약자였다느니,
어떤 이는 오릉 전설과 관련하여 박혁거세와 알영이 모종의 암투에 의하여
암살당하였을 것이라는 등
참으로 별별 다양한 썰들이 많더군요~
그러나 고대사에는 절대 문외한인 저로서야 어떤 썰이 진실에 가까운 것인지 조차 가늠하기 어렵고
그저 재미로 참고할 뿐 입니다.
아뭏든,
조선 순조 3년에 신라 시조 임금의 내력을 새긴 유허비를 이 곳에 세웠으며,
이후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2002년부터 2005년까지 4차례에 걸쳐 발굴작업이 이루어졌답니다.
이 조사를 통하여 신라시대의 팔각 건물지를 비롯한 유구가 확인되었고
그 유적들은 탄생설화와 관련된 신궁 또는 국가적인 제의 시설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발굴 당시의 흔적도
복구흔적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곳은 이곳 유적지 발굴 당시 나온 유물들 중
학술적 가치가 있는 유물을 제외한 나머지 유물들을 한꺼번에 매몰해 놓은 장소 표시입니다.
이 조그만 언덕위에서 약 2070여년 전에
앞으로 1000년 사직을 누리게 될 신라라는 나라가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이 꽃들은
2000년후의 후손들이
2000여년전 이 땅에서 살다간 선조들을 그리워하는 이 마음을 이해할까요~?
'내 나라 > 서라벌 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배리 석조여래삼존입상과 페츄니아 축담이 아름다운 삼불사 (0) | 2015.10.10 |
---|---|
신라 역사 첫자리와 끝자리, '창림사지와 포석정' (0) | 2015.10.09 |
솔그림자 내려앉은 오솔길을 따라 '신라 7대 왕 일성왕릉' (0) | 2015.10.04 |
인연따라 들러게 된 탑동 비구니 사찰, 보광사 (0) | 2015.10.04 |
박혁거세를 서라벌 왕으로 추대한 진한 6촌장의 재실, 양산재(楊山齋) (0) | 2015.10.01 |